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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바울 선생 

처음 길림에서 사역을 시작했다가 제남으로 이사 올 때 우리와 함께 하던 조선족 강길호 형제와 헤어지게 되었다. 사역 장에 통역을 담당할 조선족이 없어졌다. 위험한 상황이었다. 위급한 상황이 생겨도 대처할 능력이 없었다. 중국 조선족 형제를 구하려고 백방으로 알아보았지만 함께 성경 공부를 하면서 우리를 도와줄 마땅한 사람이 잘 없었다. 우리 사역장의 형편을 알고 있던 주광호 선생이 조선족 전요셉 형제를 데리고 제남에 있는 우리 사역 장을 찾아왔다. 그때 최바울 선생도 함께 데리고 왔다. 바울 선생은 자기 이름을 최철호 라고 소개했다. 40 정도 밖에 보이고 머리가 많이 벗겨져 있었다. 최철호 형제도 주광호 선생처럼 북한군 특수 부대 출신이었다. 군대 문화가 강한 북한 사회에서 특수 부대 출신이었다는 것은 정말 자랑스러운 것이었다. 최철호 형제는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자기를 소개했다.

“한국에서 온 선생! 나는 보통 사람들하고 다르오. 나는 군대에 있을 때 특수 부대에서 복무했구, 평양에 있는 대학도 다녔소. 우리 북조선에서 일반 사람은 죽을 때까지 평양이라는 데는 문턱두 못 가보는 사람들이 많다는 거 아시오?”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요? 여기 사역장에 들어오면 이름부터 바꿔야 합니다. 철호 형제는 뭐라고 바꾸면 좋을까요?”
“이름은 왜 바꿉니까?”
“여기서는 서로 본명을 사용하지 않아요.”
“그러오? 거 잘됐군. 그러면 선생은 내 이름을 뭐라고 하면 좋겠습니까?”
“여기 있는 모든 형제들이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 이름으로 바꿨어요. 철호 형제도 그렇게 바꾸는 게 어때요?”
내가 묻자 최철호 형제는 배를 내밀며 목청을 돋우어 말했다.
“그러면 이왕 이름을 달 바에야 성경에서 제일 높은 사람 걸루 하나 해 주십시오!”
“성경에 보면 사도 바울이라는 분이 나와요. 그분도 철호 형제처럼 키도 작고 머리도 좋고 공부도 아주 많이 한 사람이에요. 비슷한 점이 많아요.”
나는 사도 바울처럼 머리가 벗겨졌다는 말을 하면 최철호 형제가 기분 나빠할 것 같아 좀 다르게 표현했다. 최철호 형제는 바울이라는 사람이 머리가 좋다는 나의 말을 듣자 반색을 했다.
“그러문 그걸루 합시다 뭐.” 
바울 형제는 자기를 인정해준다고 좋아했다. 이렇게 해서 최철호 형제는 최바울 형제가 되었다. 
“여기서는 이 책으로 공부해요. 이제부터 이 책을 보세요.” 
내가 성경 한 권을 내밀자 바울 형제는 성경책을 받아 들고 대뜸 두께부터 가늠해 보았다.
“한국 선생, 나는 공부 많이 해본 사람이오. 이 정도 책은 아마 한 주일이면 뗄 것 같습니다!”
이 말만은 정말 쉽게 받기 힘들어서 대꾸해 주었다.
“6개월을 줄 테니까 한번 해 보십시요” 
바울 형제는 두고 보라는 듯이 의기양양해서 나갔다.

최 바울 선생은 북한군과 남한군이 정면으로 대치하고 있는 38 분계선에 있는 특수부대에서 10년 동안 군사 복무했다. 온갖 특수 훈련을 다 받았다. 바울 선생이 복무한 북한군 특수 부대는 북한에서도 집안 성분이 특별히 좋은 사람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군대였다. 제대하면 좋은 대학에도 우선적으로 배치 받아 갈 수 있었고 곧바로 간부생활을 할 수가 있었다. 바울 선생은 군인 시절부터 미군들과 얼굴을 맞대고 살았기에 미국이나 한국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바울 선생은 제대 후 북한 군 수산총국에서 청년 조직을 책임진 간부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북한에서는 꽤 큰 권세를 누리는 직장이었다. 부러울 것이 없이 살았지만 젊은 시절 최바울 선생의 야망은 컸다. 그 자리에 머물지 않고 더 큰 간부가 되기 위해 평양 김책공대에 입학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종합대학 다음으로 좋은 대학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지방의 쾌 높은 직위의 간부로 발령 받았다. 가기 전에 어머니를 만나려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평양에서 멀리 멀리 떨어져 있는 함경북도로 가기 위해 열차를 타고 보름 동안 갔다. 평소대로라면 2틀이면 가야 할 거리를 전기가 없어 열차가 가다 서다를 반복하다 보니 보름이나 걸렸다. 고향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최바울 선생은 비참한 상황들을 목격했다. 남의 무릎에 애기를 앉혀 놓고 화장실 갔다 온다고 하고 부모가 도망치는 것부터 시작해서 길바닥에 쓰러진 무수히 많은 아이들을 보았다. 평양을 제외한 북한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힘들게 찾아간 고향에서 그가 만난 현실은 큰 충격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풀을 뜯어 먹으면서 살고 있었다. 당시 평양을 제외한 지방 도시들은 식량이 없어서 대량으로 굶어 죽어 가던 시기였다.

바울 선생도 어쩔 수 없이 풀로 끼니를 연명하면서 살아야 했다. 10년 동안 특공 무술을 배운 튼튼한 몸도 4달을 풀로 연명하니 지팡이를 짚고 걸어야 할 정도로 허약해졌다. 결국 그의 어머니는 풀을 뜯다 쓰러졌다. 힘이 없어 쓰러진 어머니를 업지도 못하고 질질 끌어 집에 모셔다 놓고 여동생에게 잠깐 다녀 올 테니 기다려달라고 했다. 어머님은 아무래도 바울 선생이 올 때까지 못 견딜 것 같다고 했다. 최 바울 선생은 중국으로 간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떠났다. 그의 어머니는 죽으면 죽었지 김일성과 김정일을 배신하지 못한다고 막았기 때문이었다. 바울 선생은 중국으로 식량을 구하러 중국으로 나오다 그만 국경 경비 군인들을 만나 싸움이 붙었다. 죽었는지 기절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몇 사람을 때려 눕혀 놓고 탈북 했다. 일이 안되다 보니 싸우면서 얼굴을 들켜 북한으로 되돌아 갈수가 없게 되였다. 그렇게 탈북자가 되었고 그 후 북한의 식량난 속에서 그의 가족들은 전부 굶어서 돌아가고 평양에서 사는 큰 형님과 탈 북한 그만이 살아남았다. 

 바울 선생은 하모니카와 피리를 잘 불었다. 어떤 때에는 모든 일과가 끝나면 새벽 1시에 도 피리를 불다가 자군 했다. 처음 한 달이면 성경을 다 배울 수 있다고 장담했던 대로 성경을 열심히 배웠다. 말씀들도 열심히 외웠다. 진칼빈 선생이 그를 많이 도와주었다.  바울 선생은 기도에 특별히 열정적이었다. 이 때문에 지식적인 것 보다는 하나님을 체험하는 쪽으로 빨리 성장했다. 사역 장에 온 후 한 달이 지난 후 예배 시간 이러게 말했다.
“선생님, 제가 오늘 특송을 좀 부르겠습니다.”
사역 장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바울 선생이 이런 말을 하자, 북한 선생들 모두 의아해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바울 선생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이렇게 좋은 사역 장에 보내 주신 주님의 은혜가 고마워서 아무래도 특송 하나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바울 선생은 “하늘가는 밝은 길”을 불렀다.  1절이 끝나고 2절로 넘어가면서 그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나는 놀랐다. 저러게 강하고 거친 사람이 운다는 것이 놀라웠다. 탈북자들은 웬만해선 울지 않았다. 수많은 죽음의 고비를 넘어온 사람들이라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았다. 기뻐도 그저 덤덤히 앉아서 표현하지 않았고 슬플 때에는 더더욱 슬픈 감정을 표현하지 않았다. 그저 얼굴을 찡그리고 덤덤히 앉아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런데 바울선생이 울면서 찬송을 불렀다 놀라운 것은 다른 북한선생들도 바울 선생의 찬송을 들으면서 같이 우는 것이었다. 나도 눈물이 나왔다. 바울 선생이 부르는 찬송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고 그 진심 속에 담긴 은혜는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힘이 있었다. 제일 강했던 사람이어서인지 제일 먼저 깨지기 시작했다. 사람을 변화 시키는 하늘의 힘은 바울 선생의 찬송가에서부터 시작해서 조용히 우리 사역 장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제남의 사역 장은 매우 열악한 조건이었다.  방 두 개 밖에 없는데다 낡은 아파트라 방음 시설이 전혀 되지 않았다. 찬송하는 소리 기도하는 소리에 온 아파트가 울렸다. 밤에 잘 때에는 박스 안에 담긴 갈치 고기들처럼 누워 자야 했다. 다행히 제남 사역 장에 오래 있지 않았다. 큰 집을구 할 수 있는 사역비가 허락되어 우리는 정주로 이사 갔다.

정주(鄭州)에 도착한 우리는 좋은 집을 구할 수 있었다. 방이 3개에 넓은 거실이 있고, 난방 시설까지 되어있는 고급 아파트였다. 집 때문에 고생 많이 했던 북한 형제들은 신이 났다. 집을 사역 장으로 개조하는 여러 가지 일들을 아이들처럼 서로 자기가 하겠다고 다투면서 했다 

 


    정주 사역장 부엌에서 식사하고 
   있는 모습을 찍은 사진이다.
   바울 선생 얼굴이 제일 크게 나와 
   버렸다.






 방음 장치는 누가 할 거냐고 물으니 바울 선생이 큰 소리로 자기가 하겠다고 나섰다. 그에게 통독실로 쓸 방에 스티로폼을 사서 도배하라고 시켰다. 바울 선생은 스티로폼을 사러 나갔다 이내 돌아왔다. 바울 선생이 사 온 것은 스티로폼이 아니라 가늘고 긴 각목들과 낡은 카펫들이었다. 이상해서 물었다. 
“이것들을 가지고 뭘 할 거예요?” 
“방음 장치를 하라면서요?” 
“방음 장치는 스티로폼으로 하지 않나요?” 
입이 붙어 버린 사람처럼 가만히 서 있던 바울 선생이 다시 물었다. 
“스티로폼이라는 건 뭡니까?” 
할 말이 없었다. 그가 스티로폼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보지 않은 내가 잘못이었다. 그에게 스티로폼을 설명해 주었지만 아무리 설명해도 소귀에 경 읽기였다. 바울 선생은 스티로폼이 어떤 물건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얀 솜을 압착한 물건 아닙니까?······해면보구 그러는 거 아임까?” 
계속 이런 식이었다. 설명을 포기하고 그를 데리고 직접 잡화점을 찾아갔다. 이번에는 내가 막혔다. 스티로폼을 중국어로 뭐라고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중국어를 할 줄 아는 바울 선생에게 다시 설명하니 여전히 눈만 크게 뜨고 내 입만 바라보았다. 답답한 나는 창고에 들어가 한참을 헤매다가 찾아 들고 나왔다. 
“이거예요. 이게 바로 스티로폼이에요.” 
이번에는 바울 선생이 놀랐다 
“머리에 터럭이 나서 이런 건 본 적 없습니다!” 
바울 선생은 도배를 마치고 벽 앞에 서서 애들처럼 좋아했다. 스티로폼이라는 물건을 보았을 뿐만 아니라 이 신기한 물건을 가지고 뭔가를 만들었다는 게 기분이 좋다는 것이다. 


  바울 선생은 자기에게 성경을 가르쳐 주느라 
  고생 많이 한 칼빈 선생을 좋아했다. 이 사진을 
  찍은 곳이 어디인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평소에도 칼빈 선생을 좋아했던 바울 선생이 
  그와 함께 찍은 사진이다. 아이들이 타는 기구를 
  타고 두 선생이 참 좋아했다. 그리고 사진까지 
  찍었다. 당시에는 필름을 사용하는 카메라여서 
  사진 한 장을 함부로 찍을 수가 없었는데도 찍었다.





    바울 선생은 정말 싸움을 잘했다. 우리가 성도로 이사한 후 나의 동생인 최휘석 목사님이 오셨다. 최휘석 목사님은 대학교 시절 전국 유도 대회에 나가서 두 번씩이나 우승을 한 유도 선수였다. 사역장은 넓었고 혈기 왕성한 최휘석 목사님은 북한 사람들과 씨름을 하기 시작했다. 북한 사람들 아무도 그를 당해 낼 수가 없었다. 모든 북한 선생들이 다 달려들었지만 바울 선생만은 조용히 앉아서 구경을 했다. 결국 최휘석 목사가 그에게 정식으로 요청했다. 
    “바울 선생 한 번 붙어 봅시다”

바울 선생이 손을 내 저었다. 관심이 없다고 했다. 북한군 특수부대가 어느 정도인지 알고 싶었는지 최휘석 목사님은 지꿋게 요구했다. 
“그러지 말고 한번 붙어 봅시다.”
바울 선생이 마지못해 일어났다. 자신만만하게 바울 선생과 붙었던 최휘석 목사님은 첫 판을 시작하자마자 번쩍 들려 방구석으로 날려가 버렸다. 바울 선생은 유도를 배운적이 없었지만 여러 가지 특공 무술이 몸에 배여서 인지 유도 유단자를 너무 쉽게 다루었다. 약이 오른 최휘석 목사가 다시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최휘석 목사가 그를 공중에서 한 바퀴 돌려서 땅으로 꽃아 버렸다. 보통 사람이라면 허리가 부러질 동작이었지만 바울 선생은 고양이처럼 가볍게 땅에 내려 앉았다. 정말 몸을 잘 다루는 사람이었다. 서로 약이 오른 두 사람은 그날 40분 동안이나 유도인지 씨름인지 알 수 없는, 시합도 아니고 싸움도 아닌 경기를 했다. 결국 두 사람이 기진맥진해서 늘어지고 나서야 시합은 끝이 났다. 승부를 판정할 수는 없었지만 바울 선생이 싸움 군이라는 것만은 알아주어야 했다. 

바울 선생은 북한에서 살 때 양식 걱정을 하지 않고 살았던 사람이라 여러 가지 음식을 다양하게 잘 만들었다. 거기에다 자기가 직접 요리를 만들어 북한 선생들에게 대접하는 것을 좋아했다. 북한 선생들이 생애 첫 설교를 하는 날이 왔다. 나는 북한 선생들이 2주일 동안 밤잠을 자지 않고 준비한 설교를 발표할 수 있도록 넓은 거실에 강대상을 만들었다. 이날은 특별히 청도 한인교회 박주안 전도사님과 신대원 동기 김규성 전도사님도 함께 참가하여 북한 선생들의 설교를 평가했다. 나까지 3명으로 된 설교 평가 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우리는 제일 앞에 앉고 북한 선생들은 뒤에 앉아 경청했다. 한 사람씩 강대상 앞에 나와 설교를 시작했다. 북한 선생들의 설교는 너무 재미있고 즐거웠고 놀랍기만 했다. 내 일생에 이날처럼 즐거운 날은 다시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북한 선생들이 처음 설교를 한 이날을 명절처럼 보내기로 했다. 마침 바울 선생이 식사 당번이었다. 바울 선생은 신이 났는지 아침부터 요란하게 광고를 했다. 
“이 천하에 바울이가 오늘 점심은 돼지고기 회를 만들어 줄 테니까 아침밥 적게들 드시오!” 
북한 선생들은 설교 때문에 긴장되어서 아침을 설쳤고, 나와 전도사님들은 바울 선생의 말을 듣고 아침을 간단히 먹었다. 돼지고기 회라는 처음 듣는 음식이 궁금했던 것이다. 점심이 되자 돼지고기 회가 나왔다. 회를 본 순간 나는 놀랐다. 식탁에 올라온 돼지고기는 시장에서 사 온 돼지고기 그대로였다. 
“어험! 이 돼지고기를 말임다. 옆에 있는 식초에 이렇게 꾹꾹 찍어서 잡수시면 되겠습니다!” 
바울 선생은 직접 시범까지 보이면서 돼지고기 회 먹는 방법을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바울 선생은 날고기를 식초에 찍어서 참 맛있게 잘도 먹었다. 살면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돼지고기 육회였다. 나는 웬만해서는 음식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 돼지고기 회만은 먹을 수가 없었다. 박주안 전도사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규성 전도사님은 못마땅한지 한마디 했다. 
“이렇게도 먹을 수 있었네.” 
다음부터 바울 선생 식사 당번 때 절대로 돼지고기를 사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바울 선생은 아예 이날을 특별 서비스 하는 날로 마음먹었는지 저녁에는 큰 잉어 두 마리를 사왔다. 회 생각이 나서 내가 말했다. 
“바울 선생, 이거 회를 해서 먹으면 어때요?”
“그렇지 않아도 회를 하려고 가져왔습니다!”
바울 선생이 신이 나서 말했다. 저녁에 다시 기다렸더니 잉어를 초장과 식초에 절이다시피 해서 회라고 내놓았다. 이번에는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회를 설명해 주었다. 바울 선생은 스티로폼을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회도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고기를 날 것 채로 어떻게 먹슴니까? 말두 안 됩니다!”
돼지고기는 날 것 채로 먹으라고 하면서 물고기는 절대로 날 것 채로 먹지 못한단다. 다행이도 김치를 담그고 된장찌개를 만드는 것은 우리와 똑같았다.

  1기생 북한 선생들이 연변으로 파송 되어 나갈 때 바울 선생은 길림으로 갔다. 길림시 명성교회 목사님과 집사님들은 바울 선생이 탈북자이지만 북한 선교를 한다 해서 정말 많은 도움을 주셨다. 바울 선생은 강석환, 이빌립, 이용섭, 조선족 천상은 형제 등 9명의 형제들을 모집하였다. 그리고 길림성 매하구(梅河口) 조선족 교회 옆에 있는 자그마한 사랑방에 임시 사역 장을 꾸려 놓고 사역을 시작했다. 나는 바울 선생의 사역 장을 제남으로 내려 보내 그곳에서 부터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하게 하였다.

 바울 선생은 사역에 대한 의욕이 높았다. 열심히 학생들을 가르치고 섬겼다. 그러나 시작부터 순탄하지 않았다. 권능 선생 사역장 박다윗 형제가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고 엉뚱하게도 바울 선생 사역 장으로 불똥이 튀었다. 다윗 형제는 술을 잔뜩 마시고 바울 선생 사역장에 택시를 타고 왔다. 택시비를 요구하는 기사에게 돈 대신 주먹을 휘둘렀다. 화가 난 택시 기사가 공안에 고발을 해 바울 선생 사역장에 공안이 덮쳐다. 바울 선생 팀 형제들은 온지 며칠 되지도 않아 노숙을 하며 지냈다. 
혼인 난 바울선생은 사역장을 데리고 기풍선생이 먼저 가 있는 중경으로 갔다. 하지만 중경에서도 바울 선생의 사역은 순탄하지 않았다. 나는 연변에서 납치되어 간 칼빈 선생 박요한 선생 문제와 감옥에 갇힌 민선주 선생 문제들을 수습하느라 오래 동안 중경으로 내려오지 못했다. 이 때문에 사역 비가 제때에 공급되지 않았다. 바울 선생은 힘들게 지내고 있었다.  사역은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양식이 떨어진 북한 형제들은 논밭에 나가 물고기와 우렁이를 잡아서 연명하고 있었다. 미안했다 나는 위로 겸 앞으로 하나님의 일을 할 사람들에게 견문을 넓혀주고 싶어 학생들을 데리고 장강(長江)으로 유람을 갔다. 




   장강 유람을 가서 바울 선생과 함께 찍은 
   사진이 다행히 한장 남았다






유람을 간다는 말에 바울 선생팀 학생들은 아이들처럼 신나고 즐거워했다.
“히야~ 선생님, 살면서 유람이라는 거는 처음 가봄다. 이거이 유람이라는 건 외국 사람들이나 다니는 건 줄로 알고 있었지 않슴까?”
“우리도 유람 간다. 만세!”
특히 만식 형제가 좋아했다. 장강을 둘러보다가 유람선을 탔다. 배 앞머리에 서 있던 만식 형제는 다른 사람들이 깜짝 놀랄 만큼 큰 소리로 만세를 소리소리 불러댔다. 
“만식 형제, 뭐가 그렇게 좋아요?”
“이제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오늘 이렇게 김정일이두 타보지 못한 장강(長江) 유람선을 타보았으니 말임다.”
장강 유람 후 바울 선생도 다시 의욕을 찾았고 형제들도 안정을 얻고 열심히 성경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장강 유람때 뱃머리에 서서 계속해서 만세를 외치 던 만식 형제이다
.




 







   성도에서 사역할 때 바울 선생 사역장 
   형제들과 우리 가족들이 도강원으로
   유람가서 찍은 사진이다
.
   
가운데 내가 있고 오른쪽 하얀 잠바를
   입은 사람이 바울 선생이다





   

  
  우리 가족들과 함께 사천성 성도시
  “도강원”으로 유람을 갔을 때에도 
  바울 선생과 북한 형제들은 매우 
  좋아 했다. 
  그때 바울 선생과 다윗형제  
  빌립형제들이 우리 가족들앞에서
  북한 사람들 특유의 곱사등이 춤을 
  추었다. 그 춤이 특이하고 재미 
  있어서  사진으로 남겼다.

 

 







바울 선생은 도강원을 유람하면서 말을 타고 찍는 사진에 욕심을 부렸다. 바울 선생 사역장 형제들에게만은 허락을 했다. “도강원” 에서 말을 타고 사진을 찍은 바울 선생이다. 




처남인 나태효 목사님이 우리 사역 장을 보고 싶다고 미국에서부터 중국으로 오셨다. 목사님은 30년 전, 태권도 공인 8단 유단자로 미국으로 건너가셨다. 미국에서도 태권도 사범을 하며 미국 시민이 되셨다. 그 후 목회자로 부르심을 받아 목사로 시무하고 계셨다. 나태효 목사님이 올 때 나는 한국에 있었다. 나 대신에 북한 선생을 공항에 내보내 주겠다고 약속하며 물었다. 
“목사님, 북한 사람들 만나본 적 있어요?” 
“없어요. 전혀 없어요.” 
“무섭지 않아요?” 
“북한 사람들? 거 잘 먹지도 못해서 힘도 없는 사람들이라던데 뭐가 무서워요? 부담 없이 도와줄 수 있는 데까지 도와주고 말씀 전해 주고 가려고 해요.” 
‘내가 누군데!’ 하는 말이었다. 어려서부터 무서움이 뭔지 모르고 살았던 사람이었다. 자신 있어 하기에 목사님 혼자서 북한 형제들을 만나게 내버려 두었다. 나 목사님은 공항에서 바울 선생을 만나 반갑게 악수 하는 순간 허물어져 버렸다. 목사님은 어려서부터 싸움꾼인지라 손을 잡는 순간 단박에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 보았다. 그 순간 태권도 8단이라는 화려한 자존심은 깨져 버렸다. 바울 선생을 따라 사역장 으로 들어가면서 목사님은 겁에 질렸다. 따라 가는 것이 아니라 포로처럼 끌려가는 사람 같았다. 바울 선생 사역장은 어두컴컴한 지하 통로를 한참이나 허리를 숙이고 기다시피 들어가야만 했다. 마피아 소굴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4번씩이나 공안들의 습격을 받고 화가 난 바울 선생은 아예 땅굴 같은 곳에 사역장을 잡았다. 한참을 기다싶이 들어가니 희미한 불빛이 보이면서 음산한 지하방이 나왔다. 바울 선생이 암호를 전하는 것처럼 문을 똑딱거리자 예고도, 소리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목사님을 통독실에 모여 있던 북한 형제들에게로 안내했다. 햇빛 밝은 밖에서 들어오다 보니 사역장 안의 모든 것이 어둡고 침침하게만 보였다 이 구석 저 구석에서 시커먼 얼굴을 한 북한 형제들이 한 사람씩 다가와 거친 목소리로 인사하기 시작했다. 
“나는 함북에서 온 이만식이라 하오. 댁은 뉘기요?” 

 



공부하고 있는 바울 선생 사역장 형제들이다




 나태효 목사님은 우악스럽고 살벌한 북한 사람들의 억양을 처음 들었다.   두려움에 정신을 가다듬지 목사님은 간단히 자기소개를 하셨다.
“미국에서... 온... 나태효... 목사라고 해요.”
죄 지은 사람처럼 겨우 본인 소개를 마치자 갑자기 북한 형제들 중 한 사람이 벌떡 일어나더니 큰 소리로 외쳤다.
“미 제국주의 침략자를 타도하자!” 
목사님의 마음에서 뭔가가 철렁하고 내려앉았다. 
‘내가 과연 여기서 살아서 나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살아서 나갈 수 있을까?’ 
소리를 지른 형제는 미국에서부터 자기들을 만나러 온 목사님이 반갑다고 북한에서 부르던 구호를 농담 삼아 한 것뿐이었다. 그러나 북한 사람을 만나 본 적 없는 목사님께는 그들의 눈빛, 얼굴 표정, 태도, 말투 모든 것이 무섭기만 했다. 처음 보는 북한 형제들의 눈에는 독기와 살기가 가득했다. 그날 저녁 목사님은 바울 선생과 한 방에서 자면서 짐짓 이렇게 말했다. 
“나는 미국에서 태권도 사범을 하던 사람이요. 태권도 8단 소유자요.” 
목사님은 바울 선생의 반응을 살펴보았다. 
“그런 거 어디다 써요? 북한에서는 독침, 칼침으로 하지 그런 거로 안 합니다.” 
이부자리를 펴면서 바울 선생은 별로 관심 없다는 듯이 대꾸했다. 목사님은 그날 밤 잠들 수 없었다. 
“주님 제발 여기서 살아만 나가게 해 주세요.” 
천장에서는 무엇인가 쿵쾅거리며 마구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쌀자루가 있어서 쥐가 들락거리는 소리였지만, 그런 것을 알 길 없는 목사님은 어서 날이 밝기만을 간절히 기다렸다. 북한에 납치되어 간 사람처럼 기를 펴지 못하고 살고 있는 목사님에게 구원자가 나타났다. 2기 북한 학생들에게 성막 강의를 해 주기 위해서 최휘석 목사님이 온 것이다. 최 목사님은 처음 1기생 때부터 성막 강의를 하러 왔던 분이라 북한 형제들에 익숙해 있었다. 최 목사님은 온 첫날부터 웃으면서 북한 형제들과 자연스럽게 대화도 하고 말씀도 전했다.

최 목사님이 의지가 되자 그때부터야 목사님은 기를 펴고 처음으로 예배 때 설교도 하고 학생들과 조심스럽게 이야기도 나누셨다. 북한 형제들은 그가 미국에서 왔다고 하니 신기해하며 호기심에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목사님, 미국 사람들은 인디언들의 머리 가죽을 벗겨서 팔아먹는다는데 정말임까?”
“미국에서는 흑인들을 개나 말처럼 취급한다는데 정말임까?”
“미국 사람들은 눈깔들이 노랗다는데 정말임까?”
“미국이 살기 좋습니까?”
“미국 놈들은 왜 그렇게 우리 북조선을 못 살게 함까?” 
나 목사님은 이들에게 미국에 대해 설명하느라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북한 형제들은 목사님의 말을 열심히 듣기는 했지만 하나도 믿지 않았다. 점심 식사 시간이 되자 북한 형제들에게 무엇인가 해 주고 싶었던 목사님이 물었다. 
“형제님들이 제일 먹고 싶은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오늘 사 줄게요.” 
북한 형제들이 한 목소리로 즐겁게 말했다. 
“계란! 목사님, 계란! 계란 사 주시오!”
기분이 좋아진 목사님은 계란을 사려고 밖으로 나왔다. 나와 보니 중국이었다. 시장가는 길을 알려고 손짓 발짓 온갖 시늉을 다 해 가며 물었다. 간신히 영어를 조금 할 줄 아는 대학생을 만나 안내를 받아 계란을 살 수 있었다. 학생들이 그렇게도 계란을 먹고 싶어 하니 실컷 먹이기로 작정하고 10kg들이 통에 하나 가득 사 가지고 돌아왔다. 
‘이 정도면 아마 며칠은 실컷 먹겠지.’ 
저녁 시간이 되어오자 목사님은 북한 형제들이 계란으로 무슨 요리를 하는지 궁금해서 물었다. 
“계란으로 뭘 만들어 먹어요?”
바울 선생이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몽땅 삶았습니다.” 
“몽땅?”
“예.”
“삶았다구요?”
“예.”
“왜요?”
“먹자구요.”
목사님은 물어볼수록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거 다 먹을 수 있어요?”
“그거? 얼마나 된다구.”
“??”
그날 저녁 식사는 삶은 계란과 간장이 전부였다. 북한 형제들은 삶은 계란이 가득 담긴 큰 통을 가운데 놓고 둥글게 모여 앉아 계란 껍질을 까고는 간장에 쿡쿡 찍어 먹기 시작했다. 서서 바라만 보고 있는 목사님에게도 친절하게 권했다. 
“같이 먹읍시다. 목사님, 많이 드세요. 목사님, 잘 먹겠습니다!”
목사님은 계란을 사 준 대가로 삶은 계란 두 알로 저녁을 때워야 했다. 북한 형제들은 계란 한 통을 순식간에 해치웠다. 다음날 바울 선생이 말했다.
“미국 선교사님, 계란 정말 잘 먹었슴다. 한 번만 더 사 주시면 안 되겠슴까?”
목사님은 계란 대신 각 사람에게 소형 녹음기를 하나씩 사 주셨다. 이때부터야 목사님은 북한 형제들이 조금씩 편해지기 시작했다. 일주일 후 내가 아내와 함께 바울 선생 사역장으로 갔을 때 목사님은 안색이 중환자처럼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내가 오기만을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고 하소연하셨다. 

바울 선생의 사역은 조금 유별났다. 사역 처음부터 중국 공안들에게 쫓겨 다니더니 사역 내내 계속해서 공안들에게 쫓겨 다녔다. 다른 사역 장들은 잘 숨어 안정되게 사역을 했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바울 선생은 한 달 이상 쫓기지 않고 사역한 적이 없었다. 제남에 있을 때에는 다윗 형제가 공안을 몰고 와서 정주로 도망 왔다. 정주에서도 기다렸다는 듯이 한 달에 한 번씩 공안이 찾아 왔다. 다행히 그때마다 잘 도망을 가서 붙잡히지 않았다. 계속 사역은 할 수 있었지만 자꾸만 이사 다녀야 했다. 
 구창안 목사님이 바울 선생 사역 장에 와서 교회사 강의를 하고 계실 때였다. 북한 형제들에게 강의를 하고 있던 목사님에게 갑자기 이상한 감동이 오기 시작했다.
“학생들을 데리고 빨리 나가라!”
마음속에서부터 계속해서 분명한 음성이 들렸다. 
‘나가다니? 지금 수업 중인데 어디로 나가?’
구창안 목사님은 처음 사역 현장에 들어오다 보니 이러한 느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몰랐지만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몸을 덮쳐왔다. 목사님의 입에서 자기 의지와 상관없는 말이 불쑥 나갔다.
“다들 밖으로 나갑시다.” 
순간 북한 형제들의 눈빛들이 홱 돌아갔다. 바울 선생 팀은 늘 쫓겨 다니면서 살았기에 위험한 상황이 왔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모두 급히 일어나더니 사역장을 뛰쳐나가 뿔뿔이 도망을 쳤다. 목사님도 북한 형제들의 뒤를 따라 허겁지겁 도망쳐 나왔다. 
목사님은 뭐가 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기가 왜 그런 말을 불쑥 내뱉었는지도 이해되지 않았고, 자기의 한 마디 말에 모든 형제들이 그리도 민첩하게 움직이는 것도 신기하기만 했다. 형제들이 사역 장을 나간 지 3분 후 공안들이 사역장에 덮쳤다. 공안들은 이 집에 많은 청년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미리 알고 떼를 지어 왔다. 또 이사 해야 했다.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결국 어느 날 공안들이 전혀 예고도 없이 바울 선생 사역 장에 들이닥쳤다. 이웃 주민의 신고를 받고 온 것이다. 공안들은 바울 선생 사역 장 형제들에게 신분증을 제시하라고 요구하였다. 북한 형제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신분증도 내놓지 않고 눈만 껌뻑 거리면서 가만히 앉아 있었다. 공안들은 이들을 몽땅 공안 국으로 연행해 갔다. 유치장에 갇힌 바울 선생 팀 북한 형제들은 얼굴이 파랗게 질려 버렸다. 
“아이고 바울 선생님, 우리 이젠 다 죽었슴다! 여기 와서 이리케 성경 공부까지 하구 한국에서 왔다는 선교사들 하구 맨날 붙어 댕기면서 살았지, 이제 어떻게 하문 좋슴까? 그 떡 대가리 같은 천국인지 지옥인지 가 보기두 전에 이제는 다 죽었슴다. 이제 어떻게 하문 좋슴까? 아이고 선생님이 어떻게 좀 해보시우······.”
형제들은 절망했다. 사역장의 책임자인 바울 선생만 바라보았다. 
“사람이 한 번 죽지 두 번 죽나. 어차피 사람이 한 번 죽는 거 아님까? 까짓 거 이리케 죽으문 순교라는데 그러문 천국 가는데 뭐가 무섭슴까?
말은 이렇게 했지만 바울 선생도 막막하기만 했다. 
‘앞을 봐도 뒤를 봐도 빠져나갈 길은 없구 이제 북한에 나가문 죽을 일 밖에 없다.’
사역 장 선생인 자기까지 낙심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바울 선생은 명랑하게 웃고 떠들었다. 문득 사도 바울은 감옥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옥문을 깨고 나왔는데, 비록 자기는 가짜 바울이기는 하지만 진짜 바울처럼 한번 하나님을 찬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주머니에 애용하던 하모니카가 들어 있었다. 하모니카를 꺼내 ‘천부여 의지 없어서’ 하는 찬송을 불었다. 조용한 유치장 안에 하모니카 소리가 울렸다. 북한 형제들도 조용히 따라 부르며 하나님께 기도드리기 시작했다. 감방에 있던 중국인들도 하모니카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밖에서 당직을 서고 있던 공안도 찬송가의 곡조가 싫지 않은지 말리지 않고 손가락장단을 치면서 듣고 있었다. 잠시 후, 공안 간부들이 도착하여 북한 형제들을 모두 불러내 물었다.
“너들은 뭐하는 사람들이야?”
“우리는 동북 지방에서 온 조선족들이오!”
공안들은 종이 한 장을 내밀면서 말했다. 
“여기다 집 주소들을 다 써라.” 
바울 선생이 제일 먼저 볼펜을 잡았다. 중국 글을 쓸 줄도 몰랐고 집 주소도 없었다. 내키는 대로 조선글로 이렇게 썼다. 
“주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그러면 당신과 당신의 집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종이가 넘어갔다. 다음 형제가 바울 선생이 쓴 것을 보더니 이어서 썼다.
“하나님은 공안 선생님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독생자를 보내 주셨습니다.” 
또 다른 형제도 이어서 썼다. 
“공안 선생님이 예수님을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공안이 종잇장을 들고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며 한참을 보다가 빽 소리를 질렀다.
“이게 도대체 뭔 글자야? 중국 글로 다시 써라.”
새 종이가 나오자 바울 선생부터 시작해 아까 썼던 말씀들을 다시 반복해 써 넣었다.
“내일 다시 조사할 테니 모두 집으로 가라.”
공안들은 아무리 봐도 이 사람들이 범죄자 같지는 않았는지 새벽 세 시쯤 모두 집으로 돌려보내면서 공안 1명을 감시자로 동행시켰다. 사역장에 도착한 북한 형제들은 조선족 형제에게 공안에게 자꾸 말을 시키게 하고 화장실로 들어가 쪽문을 뜯기 시작했다. 그쪽으로 도망가려는 계획이었다. 갑자기 공안이 소지한 휴대전화로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은 공안이 북한 형제들에게 말했다.
“집에 급한 일이 생겨서 가 봐야 되겠다. 니들 도망 안 칠 거지? 니들 달아나면 내 모가지 떨어지니까 내가 돌아올 때까지 꼼짝 말고 기다리고 있어!”
“우리가 뭐 죄를 지었소? 자기 집 두구 왜 도망가오?”
조선족 형제가 대답했다. 공안은 30분 후에 돌아오겠다고 하고 급히 나갔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그 위험한 상황에서 빠져 나오게 하셨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서 찬송하고 기도할 때 옥문을 열어 주신 하나님께서 공안들의 손에 잡혀 북송될 이들을 풀어 주셨다. 

  공안에 노출 된 사역장을 버리고 이번에는  성도 시 반대편으로 이사를 갔다. 그러나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서 그 동네에 호구 조사가 시작되었다. 북한 형제들이 두려워 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사한지 며칠 지나지도 않아 사역장을 버리고 다른 동네로 갔다. 그 곳에서도 이들이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곧장 호구 조사가 시작되었다. 결국 바울 선생은 사역에 대한 자신감을 완전히 상실했고 사역을 포기했다. 북한 형제들도 성경 공부에 의욕을 잃었다. 바울 선생이 포기하자 김영윤, 이빌립, 이용섭, 박다윗 선생을 제외하고 나머지 북한 형제들도 떠났다. 바울 선생도 떠났다. 자기에게 사역은 아니라고 머리를 떨구고 떠나갔다. 떠나면서 바울 선생은 울었다.
“선교사님, 잊지 않겠슴다. 그래두 선교사님 때문에 제가 예수님을 알게 됐구, 오늘 이만큼이라도 사람 되지 않았슴까? 꼭 잊지 않겠슴다. 다시 만나지 못해 두 잊지 않겠슴다.”
안타까웠다. 북한에서부터 유능한 엘리트였지만 하나님의 일은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사역 장을 떠난 바울 선생은 훗날 하나님으로부터 강력한 치유의 은사를 받았다. 암, 꼽추, “앉음뱅이” 를 고치는 은사를 주셨다 그 후부터 바울 선생은 말씀을 전하는 사역 보다는 병자들을 고치면서 그들에게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시작했다. 한국에 와서도 치유 사역을 중심으로 북한 선교 사역을 시작했다. 현재 바울 선생은 총신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서 “한민족 사랑의 교회”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최바울 제자들

김주복

이용섭

강석환

김영윤

이만식

박다윗

천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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