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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선주 선생 

1기 사역 초기였던 1998년 8월 22일 나는 주광호 선생과 함께 연변 조선족 자치주 연길시의 한 시골 마을인 의란진에 가서 민선주 선생을 사역장에 데리고 왔다. 그곳 조선족 전도사님이 민선주 선생을 소개해 주었다. 민선주 선생은 사역장에 처음 왔을 때의 다리를 심하게 절었고 깡마른 몸매에 키가 작은 청년이었다. 그에게 길선주 목사님의 함자를 따서 민선주라고 이름을 고쳐주었다.  민선주선생은 다리가 불편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팔 힘은 특별히 좋았다.


민선주 선생은 절뚝거리는 다리 때문에 많은 고생을 했다. 북한을 탈출하려고 결심하고 일곱 번이나 두만강을 넘어왔지만 다리 때문에 미처 도망가지 못해 매번 공안에 잡혀 북송되었다. 북한 보위부에서도 민선주 선생을 장애인으로 취급하고 매번 풀어주었다. 선주 선생은 여덟 번째 만에야 절뚝거리는 다리로 탈북에 성공했다. 그러나 신체가 건강한 탈북자들도 살아가기 힘든 중국에서 장애를 가진 선주 선생이 거처할 만한 곳은 없었다. 선주 선생은 추운 겨울에도 역이나 길거리에서 땅에 떨어진 음식 찌꺼기를 주워 먹다가 사역 장으로 왔다.

민선주 선생은 나에게 어머니 이야기를 자주 했다. 민선주 선생의 어머니는 산파였다. 북한에 있을 때 어머니가 자주 산모의 태를 가져오면 그 태를 삶아 먹으면서 굶주림을 달랬다고 했다. 어머니는 민선주 선생을 버리고 탈북하여 중국으로 갔다. 북한 여인들이 대개가 그러듯이 시골마을의 가난한 한족 사람에게 팔려가서 살고 있다고 했다. 민선주 선생은 울면서 자기를 버리고 간 어머니를 원망했다. 그러면서도 어머니가 보고 싶다고 했다. 그의 말을 듣다가 눈물이 나왔다. 울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 눈물이 나왔다.

민선주 선생은 처음 사역 장에 와서도 장애인이라고 동료들이 무시한다고 섭섭해 했고 힘들어 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하나님께서 자기의 다리를 고쳐주신다는 믿음을 가지기 시작했다. 민선주 선생은 형제들이 잠든 새벽에 홀로 통독실에서 울면서 기도했다. 그러게 기도하다 그는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과 교제하기 시작했다. 선주 선생은 은혜가 충만했고 빠른 속도로 변화되어 가기 시작했다. 성경을 이해하는 속도도 남달랐다. 성경 공부에 뒤쳐져 있는 기풍선생이나 박요한 선생을 칼빈 선생 혼자서 감당하기 힘들어 하면 선주 선생이 대신해서 가르쳤다.

하나님을 만난 후부터 민선주 선생은 변해가기 시작했다. 정주 대학교 캠퍼스에서 축구를 할 때였다 선주 선생은 운동장 옆에 앉아서 구경만 했다. 구경하기가 지루한지 선주 선생은 아이스크림 하나 사달라고 졸랐다. 시합이 끝나면 다른 형제들과 함께 먹자고 조금 기다리라고 권했지만 선주 선생은 자꾸 졸라댔다.

“먼저 하나 사주면 안되나요? 예? 하나만요 선생님 나만 하나 사주세요”

사역장의 형평성만 생각하고 있던 나는 민선주 선생을 꾸중했다. 훗날 어머니 이야기를 할 때에야 선주 선생이 왜 그랬는지 깨닫고 많이 후회했다. 어려서부터 어머니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그는 나에게서 사랑을 느끼고 싶었던 것이다. 그가 나에게서 원한 것은 아이스크림이 아니라 사랑이었다. 하나님을 만나고 난 후부터 민선주 선생의 행동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자기가 먹기 위해 감추어 놓았던 과자도 다른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자기의 장애만 크게 보던 그가 다른 사람을 돌보기 시작했다.

민선주 선생은 금식을 자주 했다. 처음 사역 장에 와서는 자기를 버리고 간 어머니를 늘 원망했지만 금식하면서부터는 어머니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고 자기를 버린 가족들을 위해서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의 설교의 실력은 날이 갈수록 높아져 갔다 그는 정말 북한 사람답지 않게 설교를 잘했다. 박 베드로 목사님이 그의 설교를 듣고 감탄했을 정도였다. 그의 설교에는 설득력이 있었다. 민선주 선생과 대화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빨려 들어가서 설득 당하는 것을 자주 경험했다. 설교로 인해 그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길림에서 제남으로  이사 가는 날이었다. 기차에 올라 화장실로 가다가 화장실 안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무디 형제를 만났다. 이사하면서 여러 가지 문제로 고달팠던 나는 나도 모르게 벌컥 화를 내었다.

“뭐 하는 거예요? 엉? 너 무디! 너 북한으로 다시 돌아가! 너는 부모님 말도 이렇게 안 들어 엉? 왜 이렇게 말 안 들어?”

나도 모르게 혈기가 와락 나왔다. 그렇지 않아도 노골적으로 성경과 통독에 대해서 등한해 하는 그를 언짢아했던 바였다. 요즘엔 밤에 몰래 밖에 나가 담배꽁초를 주어다가 피우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가까스로 형제들 전원이 담배를 끊어 가는데 다시 담배 냄새를 풍기면 다른 사람들도 동요되고 힘들어진다. 그는 깜짝 놀란 순한 눈을 퀭하니 뜨고 나를 바라보더니 말없이 열차 칸으로 들어가 버렸다. 괜히 지나쳤나 싶어 후회가 되었다. 자리로 돌아가니 방금 전까지 서로 장난을 치며 즐거워하던 형제들이 갑자기 입을 꾹 다물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내가 무디 형제에게 화를 내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무디 형제, 미안해요. 내가 좀 지나쳤던 것 같아요.”

“아? 예-에, 일없시여. 아 아니, 일없습니다.”

내가 사과하자 무디 형제는 익숙하지 않은 경어를 사용하며 어색하게 나의 사과를 받았다. 이 넓은 세상에 한 몸 머무를 곳이 없어 이런 수모를 당한다고 생각하는지 몹시 우울해 했다. 몹시 미안했다. 어떻게든 달래주고 싶어 제남(濟南)까지 가는 3일 내내 거듭거듭 사과했지만 그때마다 그는 처음처럼 어색하게 나의 사과를 받았다.

당황했던 것은 나를 향한 북한 형제들의 태도가 몹시 냉냉해진 것이다.  나는 이때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아무리 북한 형제들을 사랑하고 몇 개월을 동고동락했다 하더라도 그들에게 나는 그저 친절한 남조선 사람이고 무디 형제는 자기들과 같은 북한 사람이었다. 짧은 시간 동안 북한 형제들과 아주 친해졌다고 자만했던 내가 부끄러웠다. 저들과 하나가 되기에는 분단 50년의 장벽은 너무나도 너무 컷다.

“우리가 다 같이 잡혀도 선생님은 고작 추방당하겠지만 우리는 잡혀가서 죽어야 합니다.”

이것이 나와 그들의 차이었고 내가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절대로 하나가 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제남으로 이사를 간 후 나는 이 문제를 가지고 3일 간 금식 하면서 철저하게 주님 앞에 회개하였다. 민선주 선생이 괴로워하는 나를 이해 해주었다. 그리고 나와 함께 3일 금식도 함께 해주었다 금식 이후 사역장의 분위기는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때 아무 말도 없이 함께 금식하는 민선주 선생이 정말 고마웠다 그때 그 고마움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이 사진은 정주에서 공부할 때 놀이공원에서 찍은 사진이다. 앞에 앉은 사람은 박요한 선생이고 뒤에 앉은 사람이 민선주 선생이다. 주변에서 허익두 방무디 진칼빈 선생들이 자기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한국의 롯데월드나 에버랜드에 비하면 정말 초라한 놀이 공원이었지만 북한 형제들은 이곳을 미국의 디즈니랜드를 만난 것 보다 더 기뻐하고 즐거워했다. 


민선주 선생은 놀이 기구를 탈 때는 괴성에 가까운 환호를 질렀다. 누가 보던 말든 아랑곳 하지 않고 고함을 지르면서 놀았다.  

  칼빈 선생의 폐병이 하나님의 은혜로 치유되는 것을 본 민선주 선생은 자기 다리도 기도하면 고쳐주신다는 확신을 가지기 시작했다. 파송 되면 많은 곳으로 다녀야 하지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장애로 인해 많은 걱정했던 그였다. 민선주 선생은 나와 사역장 동료들에게 자기 다리를 위해서도 기도해달라고 공식적으로 부탁했다. 선주 선생은 매일 새벽 4시 반부터 일어나서 기도했다.

“하나님, 하나님이 북한 복음화를 위해 필요하니까 저를 부르셨는데, 제가 다리가 이래 가지고 무슨 일을 하겠슴까? 주님, 이 다리 좀 고쳐주십시오. 하나님, 저 이 다리 가지고 아무 것두 못함다. 다리 안 낫고서는 성경을 배워도 쓸데가 없습니다 이 다리 하나님이 고쳐 주세요!”

나는 그가 얼마나 많은 밤을 홀로 깨어 울면서 기도해 왔는지 알고 있다. 나를 비롯해서 사역장의 다른 선생들도 알고 있었다.  파송을 위해 시작했던 사역장의 전체 금식이 끝나고 보식도 마치기 전에 민선주 선생은 다시 장기 금식에 들어갔다.  선주 선생이 금식을 시작한 지 20여일이 지난 토요일이었다. 일과에 따라 우리는 정주대학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금식을 해 기운이 없는데다 성치 못한 다리 때문에 선주 선생은 그날도 벤치에 앉아 구경만 했다. 갑자기 민선주 선생이 운동장 한가운데로 어정어정 기는 것처럼 힘없이 내려왔다. 그때 기다렸다는 듯이 축구공이 그의 앞으로 굴러갔다. 그런데 세상에, 민선주 선생이 그 공을 몰고 상대방 골문 앞까지 몰고 가더니 바로 골인시켜버리는 것이 아닌가!

나와 선생들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을 넋을 잃고 바라보기만 했다.  정말 선주 선생이 정상인처럼 걷고 뛸 수 있다는 게 보면서도 믿어지지 않았다. 나는 그를 얼싸안고 실성한 사람처럼 껄껄 웃었다. 선생들도 펄쩍펄쩍 뛰면서 박수를 치고, “할렐루야!!” 고함을 질렀다. 선주 선생도 엉엉 울면서 자기 다리를 만졌다. 10년 동안 절름발이로 살았다. 그 동안 그 절름발이 때문에 온갖 설음과 슬픔을 당하던 민선주 선생이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장애를 가졌던 다리가 완치되고 정주 항공대학교에서 함께 축구를 하다가 찍은 사진이다. 윗줄 왼쪽에서 두 번째에서 빨간 색 옷과 하얀 모자를 쓴 사람이 민선주 선생님이다.


소림사로 갔을 때 민선주 선생이 찍었던 사진들이다.

민선주 선생은 파송된 후 연변조선족 자치구 안도현에 있는 작은 시골 교회에 은거하면서 학생 모집을 시작했다.  북한 형제 2명과 자매 1명, 탈북자 부부 한 가정을 모집했고 그들을 데리고 안도현 시골 교회에 은거하면서 곧바로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면서 예배 때면 그 교회 성도들에게도 설교를 했다. 사역 장에서도 설교를 잘하던 선생이라 시골 교회성도들의 마음을 쉽게 사로잡았다. 소문이 난자 주변에 있던 한족 교회에서도 선주 선생을 데려가서 예배를 드렸다. 심지어는 술 먹을 일이 있으면 자기 교회 전도사님이 아니라 선주 선생에게서 허락을 받아 가곤 했다. 조선족과 한족들은 민선주 선생이 신분증도 없는 북한 탈북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에게서 말씀을 배우고 싶어 극진히 대접하고 섬겼다.  

 연변 과학기술대학교 이 처장님을 만났다. 이 처장님은 우리가 제남에서 사역 할 때 주광호 선생과 함께 우리를 만나러 연길에서부터 제남까지 내려오셨던 분이다.  이 처장님은 우리가 사역 비가 없어 고생 많이 한다는 말을 듣고 많은 돈을 가지고 왔다. 그러나 후원 받는 곳도 없고 돈도 없는 가난한 내가 돈은 하나님이 준다고 다소 뻣뻣하게 나오자 화가 났는지 한 푼도 헌금 하지 않고 그냥 돌아가셨던 분이다.

북한 선생들을 파송시키고 연길에서 활동하면서 나는 이 처장님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이 처장님에게 인사드리면서 몇 달 전에 와서 보고 간 북한 선생들이 지금은 성경을 잘 알 뿐만 아니라 설교도 잘하고 북한 선교사로 활동한다고 말씀 드렸다. 이 처장님은 믿을 수 없다고  했다. 한번 만나 봐야 인정 할 수 있다고 했다.

이 처장님은 민선주 선생을 만났다. 민선주 선생이 예배를 인도하면서 설교하는 것도 보았다. 민선주 선생은  설교를 통해서 너무나도 분명하고 또 은혜롭게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의 구원을 말하고 있었다.  민선주 선생의 설교를 들은 이 처장님은 감탄을 했다. 은혜보다는 신기하다고 했다.  그때부터 이 처장님은 민선주 선생을 극진히 아끼고 사랑했다. 훗날 이 처장님은 선주 선생이 체포되었을 때 그를 감옥에서 구출해 내기 위해 정말 많은 돈과  도움을 주셨다.

 민선주 선생은 기풍 선생과 함께 한국으로 가기위해 우리 사역장을 떠나갔다가 북한으로 북송이 되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사역자로 다시 서게 되었다. 한국에 와서 내가 열방빛교회를 개척했다는 말을 듣고 찾아왔다. 그 때부터 열방빛 교회 초기 맴버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열방빛교회에서 오두산 전망대로 갔을 때 찍은 사진이다. 오두산 전망대 안에 있는 북한 전시관에서 찍은 사진이다. 가운데 서 있는 사람이 민선주 선생이다. 


민선주 선생이 한국에 들어와서 열방빛 교회에서 설교하는 모습을 찍은 사진이다. 이때 민선주 선생의 설교를 듣고 많은 분들이 은혜를 받았지만 김성근 선생은 너무 많은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열방빛교회에서 강화도로 놀러갔을 때 중국에서 함께 공부하던 북한 선생들이 모여서 찍은 사진이다. 윗줄 오른쪽부터 2기생 이빌립 선생, 2기생 최순교 선생, 3기생 배철범 선생이다. 아랫줄 오른쪽에 2기생 김성근 선생, 왼쪽 1기생 민선주 선생이다. 

 민선주 선생은 한국에 와서 “칼빈신학대학교” 에 입학하여 신학 공부를 시작했다. 선주 선생은 중국에서 누렸던 하나님의 은혜보다 더 큰 은혜가 있을 줄로 기대하고 공부를 시작했다.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순수하게 성경만 읽고 성경적인 시각에서만 신앙이 형성된 선주 선생에게는 인본주의적인 색채가 짙은 자유주의적 신학 사상이 고통스럽기만 했다. 갈등하던 선주 선생은 신학교를 팽개치고 중국으로 가서 다시 북한으로 들어갔다. 막무가내였다. 그의 심장에는 북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끓고 있었다. 선주 선생은 고향으로 찾아갔다. 그의 고향은 평양의 위성 도시인 평성 시였다. 선주 선생은 집집마다 은밀하게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아주머니 여기 쌀이 있어요. 이 쌀로 밥을 해서 드시고 힘을 내세요.”

북한 사람들은 낯선 사람이 와서 공짜로 쌀을 주자 꿈을 꾸는 것처럼 믿지 못하고 바라보기만 했다.

“아주머니 하나님께서 살아 계세요. 힘내세요. 하나님을 찾으세요. 그러면 살 길이 생깁니다.”

선주 선생은 올 때처럼 다시 조용히 사라져 버렸다. 이렇게 돌아다니다 돈이 떨어지면 다시 중국으로 넘어와 한국으로 왔다. 선주선생은 서울대학교 연구소에 계시는 김병로 박사님으로부터 사역 비를 지원 받으면서 이 사역을 지속했다. 너무 무모했고 또 위험했다. 한두 번은 성공할 수 있지만 지속적으로 진행할 수 있는 사역이 아니었다. 나는 화를 내면서 말렸다.

“지금 선주 선생이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일꾼으로 준비하는 거예요. 학교로 돌아가서 공부를 하세요.”

민선주 선생은 나의 말을 듣지 않았다. 이미 신학에는 마음을 돌렸다. 다행히 선주 선생은 몇 년간 잡히지 않고 무사히 사역을 진행해 나갔다. 그러나 끝내 일은 터지고 말았다. 북한에서 은밀히 중국으로 나오다가 중국 공안들에게 체포되었다. 북한 땅을 벗어났다고 안전하다고 방심했던 것이다. 선주 선생의 여권은 중국의 지인의 집에 맡겨두고 있었다. 북한 땅에 가지고 갈 만한 물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체포된 선주 선생은 중국 공안들에게 여권이 있는 곳을 말하고 여권을 가져올 수 있었다. 하지만 선주 선생은 침묵했다. 여권만 제시하면 남한으로 추방되어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지만 묵묵히 입을 다물고 탈북자의 신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선주 선생은 북한으로 호송되어 갔다. 그 후 선주 선생은 더 이상 소식을 보내오지 않았다. 북한에 가서도 일반 생계 형 탈북자로 밝히면 다시 풀려 나올 수 있지만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곳에서도 묵묵히 몸으로 주님의 복음을 보여주는 길을 택한 것이다.  선주 선생은 북한을 위해 자기 생명을 소리도 빛도 없이 던졌다. 

민선주 제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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