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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무디 선생 

  

   방무디선생은 1998년 8월 내가 북한 사역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함께 했던 선생이다.  방무디 선생은 함경북도 온성 군 창평리 사람이다. 북한에서 10년 동안 군사복무를 했다. 제대 후 고향으로 와서 결혼 하고 딸을 낳았다.  딸이 세 살 되던 해 양식이 없어  아내는 집을 떠났다. 방무디 선생은 딸을 부모님께 맡기고 양식을 구하려고 중국으로 탈북했다. 방무디 선생은 딸을 무척 사랑했다. 가족들 이야기나 질문이 나오면 그 순한 입을 꾹 다물고 벙어리가 된다. 마음속 깊은 고통은 때때로 표현하지 않을 때 더 잘 느껴진다는 것을 무디 선생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나는 사역을 시작하면서 북한 형제들의 이름을 성경적인 이름으로 바꾸어 주었다. 북한 형제들이 성경 공부를 하다가 체포되어 강제 북송이 되면 매우 위험해진다. 북한 보위부는 성경 공부를 하다가 잡혀온 사람들에 대해서는  예외 없이 정치범 수용소로 보낸다. 이름을 바꾸는 것은 이들의 안전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었다. 동시에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사람들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내 이름도 박 베드로 선교사님께서 주님의 빛을 발하라는 의미에서 최광으로 바꾸어 주셨다. 북한 선생들에게 내 이름의 의미를 설명해 주면서 이름을 바꾸자고 하자 모두들 동의했다.  나는 방 무디 선생에게  “무디” 라는 이름을 권했다. 방 무디 선생의 눈이 둥구래졌다.
 “무디? 무디?  무신 말이 그런 말이 있슴까? 그거는 무신 소림까?”
방 무디 선생이 놀란 눈으로 이름의 의미를 물었다.
“19세기에 미국에 디엘 무디라는 큰 부흥사가 있었어요. 그분은 수십만 명의 사람들을 주님께로 돌아오게 한 위대한 부흥……”
방 무디 선생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아니? 이보시오, 남조선에서 왔다는 선교사 양반! 그게 한마디로 말하자 문 미국 놈 이름이 아니오? 아니 사람을 어떻게 보구 그런 말을 함부로 함까? 그래 이제부터 내를 미국 놈 만들려고 그럼까? 안 됨다! 절대 안 됨다!”
방 무디 선생은 자다가 끓는 물벼락을 받은 사람처럼 펄펄 뛰었다. 
“아니? 그게 말이 되는 소림까? 어디 미 제국주의 침략자 이름을 사람에게 갖다 막 부치라구 아니 사람을 어뜨게 보구 그럼까? 절대 안 됨다!”
내가 아무리 무디 목사님이 위대한 분이라고 설명해도 막무가내였다.
“아니! 절대로 안 되꾸마! 그게 글케 좋다 문 당신이나 가지오! 나는 안되꾸마!”
다른 북한 형제들은 내가 권하는 이름들을 싫어하지 않고 받았다. 다들 자기를 감추려고 하는 이름이라 그 의미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유독 방 무디 선생만이 미국 사람 이름이라고 절대로 안 된다고 고집을 부렸다. 하지만 나와 모든 북한 형제들이 그를 무디 형제라고 부르기로 합의 해버렸다. 그 후부터 그 형제가 싫든 좋든 상관없이 그를 방무디 형제라고 불렀다. 

처음 북한 형제들을 찾아왔을 때 나는 20일간의 단기 선교로만 생각하고 왔다.  내가 떠난다고 하자 북한 형제들은 섭섭해 했다. 쉽게 마음을 열지 않고 무뚝뚝하기만 하던 사람들의 반응이라 기분이 좋았다. 매일의 삶이 전쟁터 같은 긴장이었지만 어느새 나는 북한 형제들과 정이 들어 있었다. 나도 북한 형제들이 좋았고 북한 형제들도 내가 간다고 하니 싫어했다. 나는 그냥 떠나기가 미안해 한 가지 약속을 했다. 
“주님께서 허락하시면 꼭 다시 돌아올게요.”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대학원 마지막 학기 개강을 기다리고 있었다. 갑자기 나에게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평소 그렇게 건강하던 몸이 아파 오기 시작했다. 꼭 이렇다 할 이유도 없이 온 몸이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마음에 기쁨과 평안도 사라지고 찬양도 할 수 없었다. 괴로운 마음을 박베드로 선교사님께 하소연했다. 
“1년 정도 휴학을 하고 북한 선교를 하는 것이 어때요?”
아프고 힘들다고 하소연 하는 사람에게 하는 말이 너무 심했다. 그런데 더욱 어이가 없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나의 반응이었다. 나도 모르게 “예!” 하고 대답했고, 얼른 중국으로 가기 위한 비행기 표를 끊었다. 내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뭔가에 홀린 것처럼 나는 기계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놀랍게도 비행기 표를 사자 아프던 몸도 곤고하던 마음도 거짓말처럼 나았고 마음에 기쁨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래 이제부터 북한 선교하는 거야.”
행복했다. 왜 그런지 이해할 수 는 없지만 그냥 무턱대고 행복했고 즐거웠다. 

나는 다시 북한 형제들에게 돌아갔다. 북한 형제들은 매우 반가워했다. 오랫동안 사귀어 왔던 친구들을 만나는 것같이 친근하고 편안했다. 모든 형제들이 즐거워했지만 특별히 방무디 형제가 좋아했다. 내가 다시 돌아오게 된 사연을 듣던 무디 형제가 갑자기 신이 나서 떠들기 시작했다. 
“아! 그거 말임다. 우리가 선교사님 다시 오게 해 달라 구 기도라는 거를 했다 아임까. 아 근데 거, 기도라는 게 응답이 되긴 되네 응? 와! 그거 진짜 신기하다야.” 
방무디 형제는 기도가 응답되었고 그렇게 해서 돌아온 나를 외계에서 온 사람처럼 신기해서 만져보고 좋아했다.  내가 북한 형제들에게 물었다. 
“나는 지금 전도사일 뿐이고 목사 안수도 받지 않았어요. 선교사로 인정받을 수도 없고 돈도 없는데 왜 나를 다시 오라고 기도했나요?” 
무디 형제가 잔뜩 웃으면서 주먹으로 내 배를 툭툭 치며 대꾸했다. 
“우린 선생이 좋슴다. 우리까(와) 같이 살아주니까······. 그리구 선생님은 우리처럼 돈이 없잽니까? 그러니까 우리까 똑같이 먹고 똑같이 한 자리에서 자니까 그래서 좋슴다. 믿을 수가 있잽니까!”

무디 형제는 앞으로 불룩하게 나온 내 배와 자기 배가 비슷해서 좋다고 했다. 무디 형제는 식성이 좋았다. 대충 먹어도 보통 사람의 배는 먹는 것 같았다. 북한 사람들은 늘 양식이 부족한 데서 살다 보니 공동 식사자리에서 남보다 많이 먹는 것을 창피하게 생각했다. 이 때문에 무디 형제는 자기처럼 배가 앞으로 불쑥 튀어나온 내 배를 좋아했다. 일종의 동질감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점심을 먹던 무디 형제가 불쑥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거이 선상님! 내까 한번 배 싸움 해봅시다여!” 
북한 형제들은 좋은 구경이라고 열심히 응원했다. 
“맞다! 맞다! 해 봐라 멋있겠다!”
“히~야! 죽인다!”
 거실에서 나는 무디 형제와 어여차 여차 소리를 지르면서 뒤로 물러섰다 앞으로 달려 나오면서 서로의 배를 충돌시켰다.  내가 키도 더 크고 몸무게도 더 나가서인지 부딪칠 때마다 무디 형제는 저만큼씩 튕겨 나갔다. 그러면 아-압 아-압 하면서 온 얼굴이 터질 정도로 기합을 주고 다시 덤벼들었다.  자꾸만 튕겨 나가자 약이 오르는지 급기야는 내 허벅지를 붙들고 씨름으로 넘어갔다. 
“아-아-아-읍!” 
소리를 지르면 힘이 더 잘 나는지 그는 소리소리 질렀다. 형제들은 재미있다고 발을 동동 굴러대면서 신나게 응원했다.


  한국기독교 총 연합회 북한 선교 팀과 함께 백두산 기도모임에 갔을 때 찍은 사진이다. 제일 오른쪽에서부터 최광목사, 방무디 선생, 주기철 선생, 지간구 선생, 진칼빈 선생, 조선족 강철호 선생이다. 




     한기총에서 오신 분들은 다들 연세가  많아 지프차를 타고 올라갔다. 우리보고는 걸어서  올라오라고 했다. 무디 선생이 눈을 크게 뜨고 화를 냈지만 단체로 배두산   티를 사서 입자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좋아서   펄쩍 펄쩍 뛰었다.

 

 
           
  백두산 천지를 배경으로 한 방무디 선생

다른 사람들은 구경하데 바빴지만 방무디 선생은 오로지 사진 찍는데 급했다.  백두산에서 이 사진을 찍고 방무디 선생은 하늘을 다 얻은 것처럼 기뻐했다. 바로 이 배경 이 자세로 김일성이 사진을 찍었고 그 사진은 북한 사람들이 매일 경배하고 절해야하는 초상화가 되었다.
김일성의 초상화에서만 보았던 똑 같은 배경이 나타나니 방무디 선생과 다른 북한 선생들이 매우 흥분하고 좋아했다. 북한 사람들은 이웃 도시에 가려고 해도 허락을 받고 가야하고 대부분 허락해주지 않는다. 때문에 백두산은 북한의 귀족들이나 특별한 국가 표창이나 특별히 허가받은 사람들만 가는 곳이다. 북한 사람들에게는 성지와 같은 곳이다. 왜서인지 북한 사람들은 김일성과 김정일을 그러게 싫어하면서도 그들의 옷차림과 행동은 잘 따라했다. 

 나는 본격적으로 사역을 시작하면서 질서 없고 산만하게 살아가던 북한 형제들의 생활 방식을 끝내버렸다. 일과를 정해 놓고 그에 따라 북한 형제들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술과 담배를 금지 시켰고 아침 일직 기상시키고 성경 통독을 시작하고 말씀을 암송하게 하고 하루 2시간씩 기도모임을 가졌다. 조그마한 인정도 사정도 봐주지 않고 모든 일과를 집행했다. 그러게 좋아 보이던 사람이 태도가 돌변하자 제일 황당해 하고 반발이 심했던 사람이 방무디 선생이었다. 그는 고함을 지르면서 반항했다.  
“북조선에서 군대 생활 할 때는 썩어질 정도로 힘들고 배두 고팠지만 그래두 담배는 피우게 했담 말이여! 안 그래여? 다들? 아 근데, 이젠 맘대루 살아 두 되는 중국에서 이 도깨비 같은 책만 하루 죙일 읽게 하구, 담배두 못 피게 하구, 술도 못 먹게 하니 사람이 살갔시여 응? 응?”
방무디 선생은 정말 정말 말을 듣지 않았다. 통독 시간에는 늘 천장만 바라보고 앉아 있었고 다른 사람들이 잠깐씩 졸 때는 코를 골며  잠들어 버렸다.  

나는 언제나 강하고 교활하고 거친 북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늘 생과 사를 넘나드는 험한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라 그들의 이런 태도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방무디 선생은 깊은 산속의 마음 좋은 아저씨처럼 사람이 순했고 신기하게도 거짓말을 하지 못했다. 자기의 감정을 꾸밈없이 솔직하게 다 말해버리고 이 때문에 잘 속기도 했다.  방 무디 선생은 식사 시간마다 늘 입버릇처럼 이러게 말했다. 
“하~아! 내가 이거 성경 통독이 아무리 힘들어두 이 눔의 이밥(흰 쌀밥) 때문에 참는다이..”
한 번은 무디 형제가 불쑥 나에게 질문 했다. 
“근데 선상님, 아 아니, 선교사님, 선교사님은… 거이, 거 미국 놈들 봤시여?”
“아 예, 봤습니다.” 
“히야~ 그놈들이 어케 생겼습데까? 우리 선교사님이 미국 놈들을 봤시여 잉? 히야~ 멋있다.” 
“선상님, 아 아니, 선교사님, 선교사님은 아우? 우리 북조선이 미국 놈들까 거 뭐야, 전쟁을 한다잖슴까? 그러문 있잽니까, 우리나라가 거이 미국 놈들 단숨에 해 제낄 껌다. 이거를 암까?"
무디선생은 마치 성스러운 낭독을 하듯이 진지하게 말했다. 무디 선생은 천성적으로 거짓말을 잘 모르다 보니 북한 정부가 선전한 모든 것을 그대로 믿고 있었다.
웃음이 나왔지만 무디 선생의 너무 진지한 태도 때문에 참으며 대답했다. 
“아 예, 압니다. 압니다.” 
무디 선생이 얼굴을 활짝 펴더니 형제들을 둘러보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야, 야, 인마들아, 거보라이 내가 뭐랬나야? 선상님이 말이야. 아니, 아니지. 선교사님이, 아이거 왜 자꾸 이케 삭깔려(헷갈려)? 응! 응! 이거 안다 그랬지 않구 머이가?” 
무디 선생은 자기 믿음이 사실로 확인 된 것이 기쁜지 손을 높이 들어가면서 고함지르듯이 말했다. 아이 같은 마음이 표현하는 순수함이었다. 

친구인 이상락 목사님이 내가 북한 선교사역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 사역장을 찾아 왔다 우리는 이상락 목사님과 함께 통화(通化)시 집안(集安) 현에 있는 고구려 유적지로 갔다. 형제들은 여기저기 뛰어 다니면서 구경했다. 무디 선생이 몹시 좋아했다. 넓은 잔디 밭을 만나자 무디 선생은 체조 선수처럼 몇 번이나 연속 공중회전을 하기도 했다. 인민군 10년 복무 동안 열심히 연마해온 기술이라고 했다. 일반인이 아무 안전장치도 없이 연속으로 공중회전을 하는 것은 처음 보았다. 이상락 목사님이 경탄을 하자 방무디 선생이 우쭐 거리면서 말했다. 
“한 번 사격 경기 해봅시다여!”
이상락 목사님도 군에 있을 때 사격을 꽤 잘했기에 선뜻 응했다. 목사님은 정조준하고 열심히 쏘아 10발 중 8발을 명중시켰다. 무디 선생은 조준도 별로 하지 않고 한 손으로 대충 쏘아댔지만 10발 모두 명중시켜 버렸다. 이상락 목사님의 입을 다물지 못하자 무디 선생이 의기양양해서 말했다.
“남조선 아덜은 군대 복무를 3년 밖에 안 하지 않슴까? 우리는 군사 복무를 10년이나 함다. 남조선 아덜까 맞 붇으문 간단하게 해 제낄 수 있슴다! 하하~”
나는 이 순박한 무디 선생이 좋았다. 어수룩해 보이면서도 재미있기도 한 방무디 형제를 다른 형제들도 다 좋아했다. 열악하고 처절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의례히 그러듯이 북한 형제들도 말이 매우 거칠었고 야비했다.  식사가 끝나고 냉면이 조금 남으면 다 함께 먹어 없애자는 말도 “우리 다 함께 냉면을 타도하자!” 하는 식으로 말했다. 상대를 비하하는 야비한 언사도 서슴지 않았다. 대부분의 다툼과 싸움은 야비한 말 때문에 일어났다.  전투적이고 공격적인 언어가 일상화 되어 있었고 이것이 잘못 되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나는 이들의 말 버릇들을 바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나는 강하게 밀고 나갔다. 이들을 북한 선교사로 키우려면 말을 고치는 것은 정말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저녁 통독이 끝나고 형제들에게 엄숙하게 지시를 내렸다.
“오늘부터 서로 서로 말을 고치세요!”
모두들 의아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오늘부터 서로 경어를 사용하고 부를 때에는 형제님이라고 부르세요  만약 서로 존댓말을 쓰지 않고 옛날식으로 이야기하다가 나한테 걸리면 식사 당번을 시킬 거예요!” 
 무디 형제에게 시범으로  권능 형제를 보고 해보라고 했다. 권능 형제는 사역장에서 제일 어렸다. 무디 형제의 얼굴이 하얗게 변하더니 팔짝 뒤면서 반대했다. 
“아? 거, 선상! 우리 북조선에는 이케 말하는 법이 없시여. 아? 어케 아들보다 좀 큰 새끼 보고 ‘형제님’ 하고, 또 아들 같은 시키가 ‘형제님’ 함까? 하, 이거 어케 들어 줌까? 못함다, 못해. 이것만은 썩어져두 못함다!”
안 한다고 뻗대는 그를 내버려두고 먼저 다른 형제들부터 차례로 돌아가면서 한 번씩 하게 했다. 그리고 맨 나중에 다시 시키니 그는 안 한다고 발버둥을 치다 마지못해 건성으로 했다.
“어이! 권능 형제님.”
간신히 뱉어보고는 부끄러운지 얼굴이 빨개져서 다른 방으로 도망쳐 버렸다. 사역장에서 무디 형제가 나이가 제일 많다 보니 그에게는 오로지 나이 어린 형제들에게 존댓말을 쓸 일밖에 없었다. 존댓말 쓰기가 싫은 무디 형제는 사역장 안에서 기를 쓰고 나를 피해 다녔다. 나도 기를 쓰고 쫓아다니면서 계속해서 반복시키고 못하면 벌을 주었다. 쫓기다 못해 지친 무디형제는 어린 아이처럼 엉엉 울면서 말했다. 
“선교사님! 난 못해여! 못해여! 안 해! 안 해! 아이고 하나님, 저 선교사님 좀 말려 주십쇼 아이고.”
나는 인정사정 봐주지 않았다. 나에게는 그가 소중했기 때문에 반드시 변화시켜야만 했다.무디 형제는 다른 형제들과는 다르게 조용하고 단정한 자세로 사역장의 모든 생활에 모범적이고 바른 소리만 하는 칼빈 형제에게 자주 심술을 부렸다.
"야 인마, 너 혼자 착한 척 하문 우리만 맨날 미국 놈 되잖아! 너 공부 좀 고만해라 응!”  
갑자기 나타난 내가 명령했다. 
 “무디 형제, 아까 했던 말 다시 제대로 해 보세요.”
깜짝 놀란 무디 형제의 눈이 커지더니 소리질렀다. 
“못해여! 못해여! 안 해! 안 해! 아 제기랄, 이거야 살 수가 있나 원!”
도망치듯 뛰쳐나가는 그를 쫓아가서 붙잡아왔다. 
“다시 처음부터 말해보세요.” 
내가 끝장을 보겠다는 태도로 나오자 보기도 싫은지 그는 곰처럼 쭈그리고 앉아서 꾸르륵꾸르륵 숨만 내쉬었다. 
“칼빈… 형…(제).” 
어색해서 얼굴이 빨개지는 그에게 내가 자르듯이 말했다.
“내일 식사 당번 하세요! 무디 형제.” 
다른 형제들도 말 때문에 벌을 많이 받았지만 특별히 무디 형제가 말 때문에 식사 당번을 많이 했다. 두 달 정도 말을 고치느라 애는 먹었지만 힘들게라도 말 문화를 바꾸어 놓았더니 다들 좋아했다. 천성 적으로 착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무디 형제가 아름답고 고상한 언어를 사용하니 정말 사람이 멋있어 졌다. 말을 통해 제일 극적으로 이미지가 변한 사람이 무디 형제였다. 무디 형제도 뭔가를 느꼈는지 그 후부터는 거친 말을 사용하는 사람을 싫어하기 시작했다.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자 무디 형제도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숲에서만 살던 곰에게 공부를 시키는 것처럼 힘들었지만 정작 은혜를 체험하고 나니 이방 저 방으로 뛰어 다니면서 형제들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모두다 항일유격대 식으로 공부합시다여!!”
정직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으면 정말 잘 믿게 되는 것 같았다. 무디 선생은 정말 단순하게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을 믿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선병문 목사님께서 우리 사역 장에 오셨다. 북한 선생들과 함께 점심 식사를 하시면서 목사님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목사님이 무디 선생에게 물어보셨다. 
“돈은 누가 주나?” 
무디 선생이 덤덤하게 대꾸했다. 
“하나님이 주십니다.” 
목사님은 무안한지 아무 말이 없다가 잠시 후 다시 물어보셨다.
“돈은 누가 주나?”
“하나님이 주십니다.” 
역시 같은 대답이 나오자 언짢으셨던지 몇 번이고 다시 물었다. 그때마다 무디 선생은 고집스럽게 똑같은 대답만 반복했다. 단순한 건지 무식한 건지 갈피를 잡지 못해하던 목사님이 다시 나에게 물었다.  
“최 선교사 돈은 어떻게 하나, 하나님이 주시나?”
“예, 그렇습니다.” 
나도 무디 선생과 똑 같이 대답하자 선병문 목사님은 돈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으로 이해를 해버렸다. 우리는 걱정이 되지 않는데 목사님이 오히려 더 많이 걱정하면서 가셨다. 조금 재미있었다.

 
  아래줄 왼쪽으로 첫 번째 사람이 방무디 선생이다. 1기생 북한 형제들이 북한 선교사로 세워진 후 소림사로 여행갔을 때 찍은 사진이다. 

 




  학생 모집을 위해 연변으로 파송 된 방무디 선생은  연길 시 “서시장”에 있는 전화 방 아저씨 집에서 살면서 활동했다. 사역 장에 오기 전부터 잘 알고   지내던 분이었다. 무디 선생이 그 아저씨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했는지 전화 방 아저씨는 그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처럼 따르고 순종하기 시작했다. 무디 선생의 사역과 활동을 위해서라면 자기의 전 재산인 전화 방에 있는 모든 것을 허락 없이 사용해도 좋다고 할 정도였다. 

전화 방 아저씨가 무디 선생에게 북경(北京)에서 고아원 사역을 하시는 한국 장로님 한 분을 소개해주었다. 장로님은 무디 선생이 성경 100독을 했으며, 지금 북한 선교를 위해 활동한다는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스카웃 제의를 했다. 스카웃 조건으로 북한에 있는 딸을 데려다 주고 중국 신분증을 만들어 줄 것이며 아름다운 여인을 찾아서 배필로 만들어 준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무디 선생은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예배 인도만 해달라고 했다. 무디 선생은 나에게 많이 미안해 하면서 북경으로 갔다. 무디 선생에게는 정말 거절하기 힘든 조건들이었다. 떠나가는 그에게 어디를 가든지 잊지 않겠다고 했다. 그가 하루빨리 아내와 딸을 만나 행복하길 주님께 기도 드렸다. 
그 후 나는 무디 선생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몇 년이 지난 후 북한으로 체포되어 갔다 돌아온 우리 형제들로부터 무디 선생을 북한 감옥에서 만났다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정말 많이 울었다.

방무디 제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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