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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풍 



   
   1기 사역장이 제남으로 이사 간 후 주광호 선생이 유기풍 선생을 데리고 왔다. 유기풍 선생은 자신을 소개하면서 북한의 “금강산댐”에서 군 생활을 했다고 했다. 나는 처음 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북한 사람들만 알아듣는 말이었다.

북한은 금강산 깊은 산골짝에 거대한 댐을 지었다. 건설 중 장비가 없는 북한은 김정일 위원장의 명령에 의해 중장비 대신에 10 만 명의 군인들이 동원 되었다. 기계가 해야 할 일을 군인들이 개미처럼 달라붙어 했다. 좁고 협착한 골짜기에 10 만 명의 군인들이 밀집해서 살았다. 이들은 북한군 중에서도 가장 생활 형편이 열악한 “공병군인”들이다. 늘 굶주렸고 생필품 부족에 시달렸다. 낮에는 군인이었지만 밤에는 강도들로 변했다. 밤에 다른 부대 병영을 찾아가 양식은 물론이고 입고 있는 속옷까지 말끔히 벗겨갔다. 금강산 좁은 골짜기들은 밤이면 새들도 숨죽이고 날지 못하는 무시무시한 강도들의 천국으로 변했다. 그런 곳에서 10년 동안 군사를 복무를 했다고 하면 사실 군인이라기보다는  옛날 이야기에서 나오는 산속의 토비라고 말해야 한다.  북한 사람들은 금강산댐에서 일하던 군인이라고 하면 타툴  생각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기풍선생은 자기는 급이 높은 강도라고 했다. 그게 무순 말인 가고 물었더니 일반 군인들을 상대로 강도질을 하는 사람이 아니란다. 군인병영을 습격하는 것이 아니라 길가에서 숨어서 기다리다가 병영을 습격하고 오는 강도들을 습격해서 강탈하는 강도라고 했다. 그러면 수고스럽게 여러 번 싸우지 않아도 한 번에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결국 강도중의 강도라는 말이다. 말하는 내용도 살벌했지만 이런 말을 덤덤하게 하고 있는 이 사람도 정말 살벌했다. 유기풍 선생에게서는 누가 설명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살벌한 기운이 풍겨 나왔다. 키는 별로 크지 않았고 몸도 조금은 왜소했지만 그의 눈은 중국 진시황제의 병마용의 병사들처럼 가늘었고 눈꼬리가 위로 사납게 치켜 올라갔다. 어이가 없었다. 주광호 선생이 데리고 오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이랬다.  꼭 자기 같은 사람들만 데려왔다. 연변에서 제남까지 며칠 동안 열차를 타고 온 사람을 돌려보낼 수도 없었다. 화가 나서 이러게 기도했다. 
“주님 왜 저입니까? 왜 제가 이런 사람들만 맡아야 합니까?” 
기풍선생은 말을 별로 하지 않았다. 행동으로 말을 하는 사람이었다. 사역장의 질서와 훈련들은 탈북자들에게 있어서 쉬운 것들이 아니었다.  술도 못 마시고 담배도 피우지 못했다. 마음대로 외출도 할 수 없었다. 하루종이 앉아서 기도하고 성경만 읽고 암송하면서 배워야 했다. 도중에 들어온 사람이라서 많이 힘들 텐데 기풍 선생은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다. 말도 별로 하지 않고 그저 덤덤히 따라오면서 지켜보기만 했다. 다른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눈물 흘리고 기도하는 것을 그저 말없이 보기만 했다.  찬양도 하고 함께 축복의 노래도 따라 불렀다. 성경도 읽으면서 사역 장이 별로 싫지 않은지 떠나지 않고 계속 잘 따라 오기 시작했다.

기풍 선생도 칼빈 선생에게서 성경을 많이 배웠다. 통독시간이 끝나면 다른 사람들은 쓰러져 자기에 바빴지만, 기풍 선생은 침실에 들어가지 않고 계속 통독을 했다. 그냥 조금 더 읽고 보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 많이 했다. 은혜를 받아서 하는 행동이 아니라 승벽이 강한 사람이라 남들에게 뒤떨어지고 싶지 않아서 그런다고 처음에는 생각했다.  그러나 기풍 선생은 변하기 시작했다. 중국 무사들의 칼처럼 위로 휘어져 올라갔던 눈 꼬리가 아래로 어느새 부드럽게 내려왔다. 성형 수술을 한 것도 아닌데 전혀 딴 사람 얼굴이 되었다. 말투도 많이 부드러워 졌다. 신기했다. 은혜가 사람을 바꾸는 것을 자주 본 적이 있었지만 기풍선생처럼 얼굴 까지 바뀌는 사람은 이때 처음 봤다. 기풍 선생은 스스로 사명을 붙잡기 시작했다. 남을 괴롭히고 험하게만 살던 이런 삶은 이제 진정으로 끝내고 다른 삶을 살고 싶어 했다. 자기도 남은 생애에는 복음을 전하면서 예수님을 전하면서 살고 싶다고 했다.  

  

정주시 놀이 공원에 가서 찍은 사진이다. 말이 없고 살벌하기만 하던 사람이 놀이공원에 가서는 전혀 딴 사람이 되었다. 정신을 잃은 사람처럼 여기저기 뛰어 다녔고 이것저것 타보면서 신나고 즐거워했다. 자랑하고 싶단다. 이런 곳에 왔다는 것을 사진으로 남겨서 누군가에게 자랑하고 싶단다. 그래서 사진을 많이 찍었다. 전동차가 지나가는 그 순간을 포착해서 사진을 찍어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아까운 필름 몇 장을 허비하기도 했다. 참 고집에 쎘다. 지가 한다고 하면 꼭 해야만 했다. 

 
          칼빈 선생과 기풍선생이 함께 찍은 사진이다.

거친 사람들은 의리를 소중히 여긴다. 칼빈 선생이 자기에게 성경을 배워주면서 고생 많이 했다고 많이 챙겨주려고 애를 썼다.

 


기풍선생과 권능선생이 함께 찍은 사진이다. 






기풍 선생과 권능 선생은 친구이다. 사역장에 오기 전에 연변의 의란진 돌가루 공장에서 서로 만나 알고 지냈고 친구로 지냈다. 사슴과 표범처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이 친구로 지내는 것이 신기했다.







북한 선생들이 선교사로 임명되고 이 일을 기념하기 위해 처음 정주시 소림사로 갔을 때 기풍 선생이 찍은 사진이다.어려서부터 싸움꾼으로 살던 사람이라 중국의 무술 영화를 참으로 좋아했다. 소림사는 기풍 선생에게 어린 시절의 성지와 같은 곳이었다. 우리는 유람을 갔지만 기풍 선생은 성지순례를 갔다. 너무 좋아하다 못해 경건하기 까지 했다.  



 성탄절 명절이 오자 우리는 이 날을 즐겁게 보냈다 북한 선생들에게는 생애 처음으로 경험하는 성탄절이었다.  예수님을 알고 성탄절의 의미를 알게 된 북한 선생들은 새로운 즐거움을 맛보고 다들 좋아했다. 김순교 목사님이 예배를 인도하시며 설교를 통해 예수님이 탄생한 이 날의 의미에 대해서 여러 면으로 잘 설명해 주셨다. 오후에는 정주시내에 있는 공원에 가서 사진도 찍고, 산책도 하고, 맛있는 음식도 먹으면서 밤늦게까지 놀았다. 이날 공원을 걸으면서 기풍 선생이 나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북한에서는 바나나 하나만 먹어도 6개월 이상 바나나를 먹어보았다고 자랑한다고 했다. 지금 이곳에서처럼 공원의 가로등 불빛은 북한 어디에서도 볼 수 없다고 했다. 호롱불도 없어서 해가 지면 다들 잠자리에 든다고 한다. 기풍 선생은 신나게 이야기했다.  늘 말없이 사람을 경계하면서 살던 그가 경계심을 풀고 인간에 대한 미움을 풀고 마음을 열어 놓은 것이다. 겉보기에는 강도를 때려잡는 강도였지만 조심스럽게 열어 보이는 그의 마음의 속살은 한없이 여리고 아름다웠다. 

북한 선교사로 세워진 후 북한 선생들은 순번대로 돌아가면서 1주일 씩 사역 장을 이끌었다. 기풍 선생이 한 주일 간 사역 장을 책임지고 운영하는 차례가 되었다. 자신감이 넘쳐 있는 그에게 일주일 생활비 500 을 주면서 잘해보라고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사역 첫날 기풍 선생은 평소에 북한 선생들이 먹고 싶어 하던 음식들을 잔뜩 사다가 식탁에 산더미처럼 쌓아놓았다. 그리고 사역장의 모든 일과를 확 뒤집어 버렸다. 월요일 아침부터 축구 하러 가자고 했다. 다른 선생들도 이것저것 소신껏 일과들을 바꾸었지만 토요일 날 운동하러 가는 원칙은 바꾸지 않았다. 그러나 기풍 선생은 다른 선생들과는 많이 다르게 해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오전에 축구를 마치고 나자 오후에는 또 수영장을 가자고 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북한 선생들에게 사역 장을 넘겨주고 처음부터 시시콜콜 간섭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선생들이 실수를 많이 하기를 바랐다. 그래야 나의 경험을 더 많이 가르쳐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예상했던 대로 수영장에서 사고가 터졌다.  북한 선생들은 처음에는 한겨울에 수영을 다 해본다면서 모두들 신나게 수영을 했다. 북한 선생들은 생전 처음으로 남, 여가 혼용해서 사용하는 수영장에 들어와 봤다. 북한 사회는 여성에 대해서 이슬람 국가들보다 더 보수적이었고 엄격했다. 여자와 남자가 함께 수영하는 일은 영화에서만 볼 수 있고 미국에만 있는 외계 문명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그런 사람들이 수영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여자들을 보더니 눈이 돌아가고 정신들이 나가버렸다. 모두가 수영은 하지 않고 한 줄로 나란히 앉아서 입들을 크게 벌리고 여자들만 구경했다. 사람들이 우리 선생들을 이상하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나는 북한 선생들과 기풍 선생을 억지로 끌고 나와 버렸다.  결국 기풍 선생은 이틀 만에 한 주간 생활비를 다 써버렸다. 돈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일은 북한 선생들에게 어려운 문제 중의 하나였다. 그 동안 그저 끼니 걱정을 면하는 것에 만족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돈을 계획적으로 사용하는 일에 서툴렀다.

수영장 사건으로 인해 선생들의 영적 상태가 흐트러질 것 같아 걱정이 되었다.  사역장의 분위기가 산만해지면서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북한 선생들이 서로 다투기 시작했고 특히 기풍선생과 자주 다투었다. 화가 잔뜩 난 기풍 선생은 자기 방에 들어가 문을 닫아 버리고 나오지 않았다. 나는 기풍 선생을 달래서 내 방에 불러놓고 수영장에 간 것이 왜 잘못되었는가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해주었다. 그제야 기풍 선생은 즉흥적으로 행동했던 자기의 잘못에 대해서 진정으로 후회했다. 기풍 선생은 사역자로서 정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40일 금식 기도에 들어갔다. 기풍 선생이 금식을 시작한 지 18일째 되던 날, 잠시 한국으로 갔던 김순교 목사님이 돌아왔다. 목사님은 오시면서 사탕, 과자 등 맛있는 먹거리들을 한 가득 가져왔다. 한국에서부터 온 사탕이 너무도 먹고 싶었던 기풍 선생은 자기도 모르게 사탕 한 알을 입 안에 넣고 삼켜버렸다. 이로 인해 40일 금식은 중도에 끝나고 말았다.

기풍 선생은 친구인 권능 선생과 함께 파송되었다. 두 사람은 권능 선생의 아버님이 숨어서 살고 있는 숲속 마을을 찾아갔다. 장만식 아바이가 숲 속 마을에서 권능 선생 아버님과 함께 살고 있었다. 장 아바이는 북한에 있을 때부터 기풍 선생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이 때문에 변화된 기풍 선생을 보고 깜짝 놀랐다. 다시 나타난 기풍 선생은 술을 마시지 않았다.  담배도 피우지 않았다. 사람들과 말할 때에도 정중했고 겸손했다.  거기에다 권능 선생과 번갈아 매일 가정 예배를 인도하면서 숲속 마을에 있는 탈북자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찬송가도 가르쳐 주었다.  장만식 아바이는 매일 보면서도 믿기 힘들어 이러게 말했다. 
“아이쿠! 야 이놈 봐라, 저 놈이 이리케 사람이 돼서 돌아왔어? 히야~ 거 신기하다야.”
기풍선생이 바뀐 것을 보고 권능 선생의 아버님인 김 아바이도 한마디 했다. 
“그거 너 거 공부하는 거게 뭐가 있긴 있는 모양이다야!”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기풍 선생의 변화된 모습을 보고 놀라워했고 신기하게 여겼다. 
장 아바이가 정색을 하고 기풍 선생에게 공손하게 말했다.
“나도 사역장에 학습하러 가문 안 됨까? 기풍 선생님.”
기풍 선생은 나이가 57세나 되는 장 아바이가 공부하러 간다고 하자 만류하였다. 젊은 사람들도 버티기 힘든 훈련을 노인이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기풍 선생님, 이번에 갈 때 나를 빼 놓으문 안 됨다. 나는 죽어도 학습하러 가겠슴다.”
장 아바이는 기풍 선생의 다리를 붙들며 매달렸다.

기풍 선생은 권능 선생의 아버님과 함께 숲속 마을에서 살던 탈북자들과 안도현 조선족 교회에서 살던 탈북자들을 모집했다. 장만식 아바이, 권능 선생 동생 김영윤, 북한에서 넘어온 지 겨우 3일 밖에 되지 않은 유칼빈 그리고 김예진, 이현수 형제와 조선족 김 선생 등 모두 8명의 형제들을 모집했다. 
  기풍 선생은 옳다고 확신하는 일이 있으면 즉시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학생모집을 끝낸 기풍 선생은 나에게 사역 비를 독촉했다. 위험한 연변을 떠나 중국의 남방 지역으로 가서 사역을 시작하려는 것이다. 사역비가 없었다.  나는 그때 중국으로 들어올 비행기 값도 없어 한국에서 계속 모금 활동을 해야만 했다. 사역비가 오지 않자 기풍 선생은 함께 공부했던 조선족 전관화 선생의 아버지께 사정해서 돈을 빌려 사역을 시작했다.  연길 시 역전 맞은 편 건물에 사역 장을 만들어 놓고 사역을 시작했다. 등잔 불 밑이 어둡다고 북한 보위부가 제집 드나들 듯이 드나드는 연길 시에서 중국 공안의 늘 지나다니는 연길 역전 길 옆에 사역 장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믿는 사람의 믿음은 그대로 이루어진다. 기풍 선생의 단순하고 확신적인 믿음으로 인해 두 달 동안 연길 역전 앞에서 사역하면서도 아무런 사고도 발생하지 않았다. 그 후 기풍 선생은 중국 대륙의 중심 도시인 중경 시로 사역 장을 옮겨 가 그곳에서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했다.

북한 선교에 대한 기풍 선생의 의욕과 열정은 정말 컸지만 기풍 선생의 사역은 순탄치 않았다. 기풍 선생 팀이 중경으로 내려간 후에도 나는 약속된 시간에 사역 비를 공급할 수가 없었다. 중경에서 사역비가 떨어지자 기풍 선생은 곤경에 빠졌다.  연길에 있을 때에는 그래도 주변에 있는 조선족 교회에 부탁해서 최소한 먹을 것은 지원 받을 수 있겠지만 아는 사람이 전혀 없는 중경에 있었기에 꼼짝 없이 굶어야 했다. 인간은 침대 위에서 따뜻한 밥을 먹으면서 성숙하지 않는다. 특히 지도자는 더욱더 그러하다 우리 사역이 주님의 이름으로 진행하는 구제 사역이었다면 양식이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안전 문제에 대해서도 심각한 문제들이 별로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역은 북한 선교사를 양육하는 사역 장이기에 처음부터 많은 어려움들이 생겼다. 그 많은 어려움도 지나가 보면 주님의 세밀한 섭리 속에서 진행되는 예비하심이었고 그 고난을 통해서 북한 형제들은 더욱더 성숙하고 강한 믿음을 형성하곤 했다. 

연길에 있을 때에도 중경에 내려온 이후에도 사역비가 제때에 공급되지 않자 기풍 선생도 학생들도 이 사역의 가능성에 대해 확신을 잃고 동요하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당장 떠나가겠다고 난리를 부리기 시작했다. 기풍 선생은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오지 않는 나를 기약 없이 기다릴 수도 없었고, 사역 장을 해산하고 떠나자고 해도 차비가 없었다. 그렇다고 아는 사람도 없고 중국어도 모르는 북한 형제들이 중국의 대도시 중경에서 눌러 살 수 도 없는 일이었다. 결국 그들은 한국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여기 까지 왔으니 되돌아가지 말고 또 돌아가 봐야 그들을 반겨주는 사람도 집도 없는 그들이라 바라 볼 곳은 한국 밖에 없었다. 학생들이 기풍 선생에게 제안했다. 
 “선교사님이 맨날 이렇게 힘들게 사역하시는데 우리가 한국 가서 돈 벌어서 도와주는 게 어떻습니까? 한국에 가문 정착비도 준다구 하는데, 그 돈 모아서 마음껏 북조선 선교 하라고 선교사님에게 주고 우리는 한국 가서 다시 통독하는 게 어떻습니까? 웰남(베트남)가서 한국 대사관 들어가면 바로 한국 보내준다구 하는데 우리 다 같이 베트남 갑시다.” 
“맞다! 맞다! 그거 좋은 생각임다! 그 돈이문 선교사님 북한 선교 맘대루 할 수 있을 검다!”
“좋슴다 선생님! 한국으로 갈 수만 있다면야 그깟 정착비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슴다. 우리가 언제 중국 땅에서 돈이 있어서 살았슴까? 그만한 돈이야 한국에 월급도 많이 준다는데 다시 벌문 되지 않슴까? 우리한테 차려지는 정착비 다 선교사님에게 줍시다. 우린 한국 가고. 응? 응! 그래문 선교사님두 우릴 욕하지 않을 겜다. 갑시다! 가여!”
학생들도 흥분하면서 떠들어 댔다. 결국 기풍 선생은 이들을 데리고 한국으로 가기로 했다. 이때부터 기풍 선생은 어떻게 하면 베트남으로 가는 길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베트남까지는 지도를 보면서 갈 수 있다고 하지만 여비가 없으면 갈 수 없는 너무나 먼 길이었다.

내가 중경의 기풍 선생 사역 장을 찾아 갔을 때는 이미 사역장의 모든 일과가 흩어지고 한국으로 가기 위한 준비를 할 때였다. 나는 이러한 깊은 내막 까지는 알지 못했고 기풍 선생 사역장의 형제들이 심하게 흐트러져 있는 것만 느꼈다.  기풍 선생 사역 장을 내가 살고 있는 성도 시로 옮겨 체계적이고 세밀한 방조와 도움을 주기로 했다. 나는 기풍 선생 사역 장을 성도로 이사 갈 수 있는 경비를 제공했다. 그러다 보니 예상했던 생활비보다 훨씬 많은 돈을 주었다. 한국으로 가기로 했던 기풍 선생 팀에게는 하늘이 준 기회였다. 기풍 선생과 사역 장 학생들은 성도가 아니라 베트남을 향해 떠났다. 이들은 3일을 꼬박 열차를 타고 버스를 타고 중국과 베트남 국경에 도착하였다. 이제 국경을 넘는 문제만 남았다. 국경까지는 돈 덕분에 무사히 왔지만 거기서부터는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많았다. 우선, 중국과 베트남 국경에는 베트남 전쟁 당시의 지뢰들이 그대로 묻혀 있었다. 잘못 들어섰다가 지뢰가 폭발하는 날에는 발이 잘려나가거나, 시체도 찾을 수 없게 공중분해 되어버리는 수가 있었다. 그리고 설령 지뢰밭을 성공적으로 넘었다고 해도 그 다음에는 갖가지 맹수들과 독사들이 우글거리는 무시무시한 정글을 통과해야만 비로소 마을이 나타난다. 그러면 이번에는 또 마을을 지키고 있는 국경 수비대, 그들까지도 무사히 지나가야 한다. 그러면 일은 다 된 것이다. 거기서부터 지도를 따라 걸어서 가든 기어서 가든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까지 가서 한국 대사관을 찾아서 “우리는 북한에서 온 사람들이요!” 라고 소리만 치면 한국행은 따놓은 것이다.

팀의 책임자인 기풍 선생이 지뢰밭에 제일 먼저 들어섰다. 군인 시절 금강산 댐 건설만 해온 그는 지뢰밭을 통과해 본 경험이 없었고 그냥 지뢰의 원리에 대해서 조금 배웠을 뿐이었지만, 전쟁 영화에서 본 행동을 흉내 내면서 조심스럽게 한 걸음씩 앞으로 나갔다. 먼저 발을 내딛기 전에 뇌관을 이어주는 전기선이 없나 손으로 더듬어 확인하고 조심스럽게 한 발 한 발 내딛었다. 그러면 기풍 선생이 밟고 지나간 자리를 뒤에서 오는 사람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다시 밟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이 길은 베트남과 중국을 넘나드는 마약 밀매꾼들도 들어서기 싫어할 정도로 위험한 길이었다. 맨 앞에 가는 기풍 선생은 새로 발을 옮겨 디딜 때마다 온 몸을 땀으로 목욕을 했다. 이렇게 천천히 앞으로 나가다 보니 불과 몇 백 미터밖에 되지 않는 거리를 두 시간도 더 지나서야 성공적으로 넘을 수가 있었다. 기적적으로 단 한 사람도 지뢰를 밟지 않고 무사히 지뢰밭을 넘어섰다. 다시 그 무서운 정글로 들어가서 밤새도록 걸어 마침내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을 지나갈 수 있는 길이 바로 국경 수비대 초소 앞을 지나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히 새벽이라 초소 앞도 무사히 지나왔다. 그러게 베트남 땅으로 들어왔지만 여기서부터는 모든 것이 난감해졌다.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하노이로 갈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중국말도 안 통하는 베트남이라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방향을 알 수 없는 데다 밤새도록 초긴장 속에 걸었기에 모두가 완전히 녹초가 되었다.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하노이에 갈 수 있는지도 몰라 난감하기만 했다. 일 단 좀 쉬었다 가기로 했다. 조금 다리쉼이나 하려고 했지만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들어버렸다.

눈을 떴을 때는 베트남 수비대 군인들이 이들을 완전히 포위하고 총 끝으로 흔들어 깨울 때였다. 빙 둘러선 군인들이 그들에게 뭐라고 물어왔지만 난생 처음 들어보는 베트남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모두 눈만 껌뻑 거리고 앉아 있기만 하자 군인들은 이들을 꽁꽁 묶어 병영으로 끌고 가 조그마한 방에 가두어버렸다. 중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을 데리고 왔다. 기풍 선생과 학생들은 자기들은 중국인이 아니라 북한에서 온 탈북자들이라고 서툰 중국어로 열심히 설명해주었다. 자기들이 북한에서 온 탈북자들이라는 것을 알면 한국 대사관으로 인도해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들의 신원을 파악하게 된 베트남 군인들은 갑자기 골치가 아파졌다. 북한과 한국 두 나라 다 수교국이니 이들을 한국 대사관으로 데려가야 할지 북한 대사관으로 데려가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그렇다고 이들을 그냥 두자니 국제적으로 시끄러운 일만 생길 것은 뻔한 일이었다. 베트남 관료들은 갑자기 들이닥친 이 불청객들을 왔던 대로 다시 돌려보내라고 지시했다. 이들은 손에 수갑이 채워진 채 다시 중국과 베트남 국경으로 이송되기 시작했다.

 기풍 선생 일행은 베트남 군인들에게 자기들은 북한 사람들이라고 신원도 확인시켰고 한국으로 망명 신청도 했으니, 이제 자기들을 한국 대사관으로 모셔다 줄 것으로 알고 잔뜩 들떠 있었다. 하지만 군인들이 이들을 데려다 놓은 곳은 그 끔찍할 정도로 무서웠던 중국과 베트남 국경의 지뢰밭 입구였다. 군인들은 총대로 꾹꾹 찌르며 저쪽으로 다시 넘어가라고  내몰기 시작했다. 그제야 사태를 깨닫고 북한형제들은 죽어도 중국으로는 가지 않겠다고 버텼다. 베트남 군인들이 막무가내로 총 끝으로 밀어대자 이들은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서 찬송을 부르며 통성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베트남 군인들은 갑자기 이상한 노래를 부르고 이상한 고함을 지르는 이들을 멍하니 지켜보기만 했다. 어찌해야 할 바를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 아무래도 귀찮은지, 갑자기 정신이 들었는지 소리를 지르고 곤봉으로 때리며,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이들을 강제로 해산시켰다. 안 간다고 끝까지 버텼지만, 끝내 이들은 지뢰밭으로 다시 떠밀려 들어갔다.

다시 한 발짝 한 발짝 조심조심 오던 때처럼 지뢰밭을 넘어 중국 쪽으로 돌아왔다. 이들의 난리 법석을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던 중국 국경 수비대는 넘어오는 이들을 차례로 붙잡아 끌고 갔다.   이들은 중국 군인들에게 자기들은 북한에서 왔으며, 베트남으로 도망갔다가 쫓겨 오는 길이라고 사실대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 군인들은 도대체 북한이라는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다.  처음 들어보는 생소한 나라 때문에 국제 문제에 휘말려 들기도 싫고, 이들을 다시 자기 나라로 쫓아 보내려고 해도 멀리 떨어진 반대편 북방 지역의 국경까지 호송해 가려면 돈도 많이 들게 생겼다. 이래저래 귀찮아진 중국 군인들도 이들을 다시 왔던 데로 쫓아버리기로 작정했다. 중국 군인들은 북한형제들을 베트남과 중국 국경 교두(橋頭)로 데리고 가서 베트남 쪽으로 쫓아 버렸다. 베트남 군인들도 이들이 베트남 쪽으로 넘어오지 못하게 막고 중국 쪽으로 쫓았다. 결국 이들은 두 나라의 국경 사이에서 오도가도 못하고 꼼짝없이 앉아 있기만 했다  양쪽 군인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한나절을 앉아 있자 보다 못해 화가 난 중국 군인들이 이들을 붙잡아 너희들 가고 싶은 데로 가라고 중국 쪽으로 쫓아 버렸다. 주님의 은혜였다. 만약 중국 군인들이 합법적인 절차를 밟아 이들을 호송해 갔다면 이들은 모두가 다 북한으로 끌려 간다.  한국으로 도주하다 체포된 이들이 갈 곳은 정치범 수용소뿐이었다.

베트남 군인들에게 돈이고 물건이고 모조리 빼앗겨버렸고, 심지어 신발까지 빼앗겨 버려 완전히 거지 행색이 된 이들은 중국 광동성 변방의 작은 도시를 헤매고 다니며 며칠을 노숙하면서 지냈다. 며칠 째 굶어 쓰러질 것만 같자 기풍 선생이 할 수 없이 나에게 전화를 했다. 사라진 기풍 선생 팀 때문에 마음고생이 많았으나 모두 무사하다는 소식을 들으니 너무나도 반갑고 기뻤다. 즉시 돈을 송금하니 3일 후 모두 무사히 성도(成都)에 도착했다. 그 동안의 사연을 듣자 나는 기가 막혔다. 충격으로 쇼크가 왔다. 머리와 목은 물론 등까지 마비되어 음식도 제대로 먹을 수 없고, 중풍 환자처럼 거동도 불편해졌다.

기풍 선생을 해임시켜야만 했다.  세워진 북한 선생을 해임시키는 일은 고통스럽고 또 어려운 일이었다. 팀장이라는 자부심은 탈북자들에게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대단했다. 아무 희망도 없이 의미도 없이 그저 떠돌아다니면서 살아가던 이들이 진정한 인간의 삶과 자신들의 존재감을 이 팀장이라는 의미를 통해서 맛보고 누리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이런 기도가 나왔다. 
“하나님, 정말 힘듭니다. 기풍 선생을 해임시키다가 맞아 죽는 일이 있어도 저는 천국에 가지 않습니까? 혹시 맞아 죽는 일이 생기면 순교로 받아 주세요.” 
주님의 도우심만 믿고 실행하겠다는 각오로 그를 해임시켰다. 사역 장에 계속 남아서 다시 공부를 해보겠다는 형제들은 권능 선생, 익두 선생, 바울 선생 사역장에 분산시켜 보냈다. 장만식 아바이는 권능 선생 사역장으로, 김영윤 형제는 바울 선생 사역장으로, 유칼빈, 김예진, 이현수 형제는 익두 선생 사역장으로 보냈다. 조선족 김 선생과 나머지 형제들은 이 사건을 겪고서 더 이상 공부하기가 싫어졌는지 떠나겠다고 하였다. 나는 기풍 선생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사역자로서의 마음가짐을 되찾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그를 바울 선생 사역장으로 보내 학생으로 공부하게 하였다.

몇 달 후 민선주 선생이 자기 학생들에게 리더의 권위를 잃고 해임되었다. 나는 기풍 선생을 다시 믿고 싶어 민선주 선생의 사역 장에 기풍 선생을 팀장으로 재임용했다. 한번 과오를 범한 사람을 다시 믿는 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는 늘 기풍 선생이 아까웠다. 어떻게 키운 선생인데 얼마나 많은 눈물과 기도로 세워진 선생인데 그냥 한 번의 과오로 모든 것을 다 잃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다시 기회를 얻어 아름답게 회복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기를 바랐다. 그래서 자랑스러운 북한 선교사로 다시 일어나게 하고 싶었다. 사람을 믿지 않고 안전하게 지내는 것 보다는 믿어주었다가 고통을 당하는 것이 더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기풍 선생에게 민선주 선생의 사역 장을 맡겨 주었다.

기풍 선생을 향한 나의 진심은 전달되지 않았다. 기풍 선생은 나를 완곡하게 오해하기 시작했다. 원래의 팀장이 해임되고 새로운 팀장에 대해 익숙하지 않았던 민선주 선생의 학생들은 나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그것을 알고 기풍 선생은 무섭게 화를 냈다. 자기들은 허울뿐이고 실제적인 모든 사역은 내가 진행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기풍 선생은 민선주 선생과 함께 한국으로 떠나면서 편지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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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광 선생님에게 전합니다. 
이렇게 펜을 들어 욕 많이 하십시오 다름이 아니라 제가 이 사역에 지도자로 설수 없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모세형제와 다윗 형제를 만나고 온 이후부터 우리가 이 사역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선생님이 이 사역을 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1기 사역이 해체된 후 최광 선생님은 우리를 동역 하는 차원인 줄 알았는데 여전히 최광 선생님이 이 사역을 진행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모세, 다윗, 석한, 주복, 등 저희 학생들을 갈라놓은 일 잘 고 있을 것입니다. 선생님은 우리를 준비시키면서 늘 강조하셨지요? 북한 선교는 우리 북한의 영혼이 감당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긴 말하기 싫습니다. 제가 떠난 동기는 먼젓번에 떠난 동기와 다릅니다. 잘 알다시피 처음엔 북한 사역을 위해서 떠나게 되었지만 이번엔 나를 위해서 떠나는 것입니다. 가다가 다리가 잘라진다면 선생님을 만나지 못하겠지만 한국에 갔다면 최선생님을 만날 것입니다. N.S.M 사무실을 통하여 저의 위치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사역을 위하여 권면하고 싶습니다. 사역 방법을 바꾼다면 저와 같은 불신자들이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글씨를 잘 못써서 선주 선생님이 글을 적었습니다. 기도 많이 하겠습니다.   -샬롬-   기풍 올림 

기풍 선생은 화가 나서 떠났고, 나의 마음은 찢어졌다. 사람에게 마음을 전하는 일이 세상에서 서 제일 힘든 일이라는 것을 이때 경험했다. 너무 다른 문화 너무 다른 생각으로 살아가던 나와 북한 선생들에게 이 큰 차이를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없었다. 그저 모든 것을 당하고 감내해야만 할 뿐이었다. 이것이 사역이었다. 억울한 일을 당해도 참아야 하고, 고통스러운 일을 당해도 선교사는 여전히 저들을 믿어주고 사랑하면서, 덤덤히 참으면서, 당하면서 그들을 위해 한 발자국씩 터벌터벌 걸어가는 것이 사역이라는 것을 배웠다.

한국으로 가기 위해 베트남으로 떠난 기풍 선생과 선주 선생은 지뢰밭을 무사히 넘었고, 전에 경험을 살려 베트남 국경 수비대에 잡히지 않고 국경도 무사히 넘어갔다. 이번에도 베트남으로 들어갔지만  한국 대사관이 있는 하노이로 가는 길을 알 수가 없었다. 길가는 사람들에게 물을 수도 없었다. 언어도 몰랐거니와 방랑객 같은 두 사람이 국경 지역에 서서 이 나라의 수도 하노이로 가는 길을 생뚱맞게 묻는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기풍 선생이 철길을 따라가자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다. 하노이는 수도인 만큼 철길을 따라가다 보면 반드시 도착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한 달을 철길을 따라 걸었다. 그렇게 하노이를 찾아가는 데 성공했고, 천신만고 끝에 한국 대사관도 찾을 수 있었다. 이들이 구세주처럼 생각하고 뛰어 들어간 한국 대사관에서는 30분도 안 되어 이들을 쫓아내버렸다. 유일한 희망이 물거품처럼 사라지자 이들은 갈 곳이 없어졌다.

두 선생은 할 수 없이 몇 천 리 길을 걸어 다시 중국으로 되돌아왔다. 지칠 대로 지친 기풍 선생은 하반신이 마비되어 길에서 몇 번씩이나 쓰러지기도 했다. 그 강인한 기풍 선생이 쓰러지는데 신기하게도 민선주 선생은 쓰러지지 않았다. 주님께서 고쳐주신 병든 다리는 건강한 사람의 다리보다 더 튼튼했다. 중국에서 방황하던 두 선생은 광주(廣州)로 가기로 했다. 광주에는 한국 사람들이 많이 있으니 차비라도 좀 얻을 수 있지 않겠냐는 작은 바램을 희망으로 삼았다. 광주(廣州)를 향해 걸어가던 두 선생은 배가 너무 고파 공안국에 들어갔다. 감옥에 들어가면 밥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북한 탈북자들이요!”
 갑자기 나타나 생뚱맞은 말을 하는 이들을 공안들은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보기만 했다. 거지같아 보이는 사람들이 두꺼운 책 한 권씩을 다 들고 있는 것이 이상해 보였던지 한 공안이 그거 무순 책이냐고 물었다  선주 선생이  웃으며 말했다. 
“이건 성경책이요! 당신도 예수 믿으시오!”
“야 인마! 니 꼴 보니 예수 믿고 싶은 생각 하나도 없다. 썩 나가!”
공안은 두 선생들에게 돈 몇 푼 쥐어주고는 밖으로 내쫓아 버렸다. 두 선생은 북한에서 도둑 열차를 타고 다니던 경험을 다시 살려 화물 열차 꼭대기에 올라타고 광주(廣州)로 갔다.  그들은 광주에 도착한 지 3시간 만에 모두 공안에 체포되고 말았다. 공안들은 신원을 알 수 없는 두 선생을 일반 노숙자 무리에 섞어 중국의 여기저기로 아무렇게나 보내버렸다. 그렇게 두 선생은 기약 없이 서로 흩어져 버렸다. 
민선주 선생은 어디인지 알 수도 없는 곳으로 끌려가서 한동안 강제 노동을 하고 풀려났다. 민선주 선생은 상해(上海)로 갔다. 추운 겨울날 상해 거리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다 너무 춥고 배가 고파 결국 지나가는 공안에게 두 팔을 모아 내밀며 애걸했다. 
“나는 북한에서 도망쳐 온 사람임다! 제발 날 좀 잡아가 주십시오!” 
공안에 자수한 선주 선생은 상해(上海
) 간수소에 한 달 동안 갇혀 있었다. 민선주 선생이 간수소에 있는 동안 기풍 선생도 그곳으로 잡혀 들어왔다.   
“아?! 선주야! 니가 어떻게 여기 있니? 아이구 자식아, 반갑다야. 근데 니는 왜 잡혀 들어왔니 응?” 
다시 만난 두 선생은 기쁘고 반갑기도 했지만 서러움이 북받쳤다. 이렇게 넓은 중국 대륙에서 기약없이 헤어졌지만 이러게 다시 만나는 것을 보니 결국 이들이 갈 수 있는 길은 여벌이 없는 외길이었다. 한국으로 떠났던 두 선생은 결국 북한으로 끌려갔다. 두 선생은 신의주 보위부 집결소에서 일주일동안 취조를 받고 다시 안전 부 집결소로 옮겨져서 석방될 때까지 몇 달 동안 함께 있었다(보위부 집결소는 정치적인 범죄자들을 수감하는 곳이고, 안전부 집결소는 일반 범죄자들을 수감하는 곳이다).

북한의 신의주 감옥에서 같혀 있으면서 기풍 선생은 자기가 잘못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기가 주님이 원하는 삶에서 이탈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기풍 선생은 회개했다. 절절하게 회개기도 드릴 때 그의 마비되었던 한 쪽 다리가 풀어졌다. 그는 집결소에서 병들고, 굶어 죽어가는 북한 사람들에게 자기 옷을 팔아서 먹을 것을 사주기도 하고, 또 자기 식사를 나누어 주기도 하면서 주님의 사랑을 실천했다. 예수님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북한 사람들에게 기도해주었고 예수님을 전하면서 살았다.  2000년 2월 16일 기풍 선생은 김정일 생일 특사(特赦)로 석방되어 다시 중국으로 넘어왔다.  기풍 선생은 중국 심양에서 캐나다 출신 선교사님과 장로님을 만나게 되어  다시 북한 선교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 때부터는 정말 신실하게 주님의 일을 감당했다. 기풍 선생을 칭찬하는 말들이 선교사들의 세계에서 심심치 않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2000년 말 내가 서안에서 사역할 때 기풍 선생도 서안에서 5개월 정도 사역을 했다. 그때 만나서 함께 찍은 사진이다.  막내 딸 명현이랑 함께 기풍 선생의 사역장을 방문했다. 사역비도 지원하고 기풍 선생 팀 학생들과 우리 사역 장 북한 형제들이 서로 만나 축구도 함께 하면서 친밀하게 지냈다.  



 






그때 기풍 선생이 나에게 보내준 신년 축하장이다. 
그냥 노트 한 장을 쭉 찢어서 휘갈겨 보내준 신년 축하장이었지만 나에게는 소중한 보물이 되었다. 마음을 좀처럼 표현하지 않는 북한 사람들이었고 또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의 가장 진실한 표창이기 때문이다.


새천년을 맞으며 주안에서 진실무망하며 재덕이 겸전하며
 더 성장할 당신을 사랑합니다. 2001년 정월초  기풍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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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기풍 선생은 서안을 떠나 안휘성으로 사역 장을 옮기고 사역을 하다가 한국으로 입국했다.  한국으로 들어 온 후부터는 “예수전도단”에 소속되어서 흥천D.T.S에서 6개월 공부하고 캐나다로 갔다. 그곳에 있는 예수전도단 캠프간사로 6개월을 섬기다가 다시 미국으로 갔다. 지금은 미국 L.A에 지내면서 영주권이 나오면 예수전도단 소속으로 남미 아프리카로 선교사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

 내가심은 씨앗이 다른 곳에서 아름답게 자라 열매가 되었다. 하지만 나는 기쁘다. 정처 없이 험한 삶을 살아가던 기풍 선생이 주님을 만나 선교사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만족하고 기쁘다. 주님께 감사 드린다. 

 

 

 

 

 

 

 

 

 

 

 

 

 

 

 

 

 

 

 

 

 

 

 

 

 

 

 

 

 

유기풍 제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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