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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익두선생 

 허익두 선생의 아버님는 일본 “동경와세다대학” 핵물리학 박사였다. 60년대 초 김일성이 ‘사회주의 조국으로 민족의 대이동’ 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일본 조총련계 동포들을 북한으로 끌어갈 때, 그 선전에 속아 일가족을 이끌고 북한으로 넘어왔다. 그때 그의 아버님은 김일성의 특별한 초청으로 북한으로 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연구소에 있던 사람으로부터 간첩으로 모함을 받아 정치범들이 가는 탄광촌으로 추방되고 말았다. 핵물리학 엘리트가 평생을 시멘트 공장의 하급 노동자로 비참하게 살아야 했다. 숙청되어 시골로 내려온 아버지는 술로 세월을 보내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날마다 술만 마시니 가정 형편은 계속 어려워졌다. 충격을 받은 익두 선생은 사회에 대한 불만과 원망이 사무쳐, 어릴 때부터 자주 악몽에 시달리며 소리를 지르다 잠에서 깨곤 하였다 익두 선생은 아버님의 천재성을 닮아 총명한 머리를 가졌다. 하나를 가르치면 거의 열을 내다 볼 정도였다. 북한에서 숙청된 집안의 자녀였지만 북한에서 그의 인재 성을 인정받아 3년제 고급전문대까지 공부했다.  

 1998년에 익두 선생은 고향 친구인 박요한 선생과 그의 동생 박다윗 선생과 함께 중국으로 탈북하였다. 중국의 여기저기로 떠돌아 다니던 익두선생은 많은 탈북자들이 모여서 일을 하던 연길시 의란진 돌가루 공장에서 일을 했다. 공안들의 습격으로 그곳을 떠나게 된 익두 선생은 다시 연변 조선족 자치주 왕청현 동명촌에 있는 돌가루 공장으로 가서 일을 했다.

칼빈 선생의 부탁을 받고 1998년 9월 주광호 선생이 가서 돌가루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허익두 선생을 데리고 왔다. 익두 선생은 곱슬머리였다.  북한 형제들은 이발소에 가면 잘라 주는 대로 덤덤히 앉아 있었다. 누구에게 잘 보여야 할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라 외모에 관심 없었고 또 있다고 해도 중국어를 할 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익두 선생은 중국어를 잘했다. 귀동냥으로 배운 중국어로 열심히 이러게 저러게 설명하면서 잘랐다. 그러게 정성들여서 자르고 나온 머리를 보면 항상 김정일 국방위원장 모습이었다. 김정일을 그렇게 싫어하면서도 김정일 스타일을 꼭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익두 선생에 대한 나의 첫 인상은 좋았다. 나는 그에게 김익두 목사님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의 이름을 허익두로 부르기로 했다. 김익두 목사님은 한국에 처음으로 기독교가 들어올 때 큰 부흥사로 활동하셨던 분이다. 익두 선생은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잘 불렀다.  주말에 길림시 송화 강변에 나가면 많은 중국인들이 모여 노래도 하고 춤도 추면서 놀았다. 가끔 우리도 그들과 어울리곤 했다. 익두 선생은 중국노래 “나의 중국 마음” 을 불렀다. 이 노래는 중국의 국민가요이다. 그날 익두 선생은 중국인들의 기립박수까지 받았다. 신이 난 익두 선생은 그 노래를 나에게도 배워주어서 한동안 따라 부르기도 했다. 익두 선생은 축구를 잘했다. 북한 형제들이 다 축구를 좋아했지만 익두 선생은 특별히 좋아했고 또 잘 찼다. 축구 할 때면 아무리 오래 차도 지칠줄 몰랐다. 성경 공부를 하면서 익두 선생이 하는 질문은 늘 깊었고 날카로웠다. 기도시간에는 늘 어머니와 동생을 위해서 기도 많이 했다. 마음이 여렸고 인정도 많았다.

 익두 선생은 눈이 많이 안 좋았다. 늘 안경을 끼고 다녔다. 안경에 대해서 신경을 많이 썼다.  사역 장이 제남으로 이사 갈 때였다. 열 차 시간을 기다리면서 대합실에 앉아 있었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구경하던 익두 선생이 뛰어와 큰일이나 난 것처럼 떠들기 시작했다. 지금 역전 안경점에서 200 짜리 무테안경을 150 으로 할인해서 팔고 있다는 것이다. 그걸 사달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다른 북한 선생들에게는 똑 같이 50원짜리 안경을 해주었다. 익두선생 한 사람에게만 비싼 안경을 사 줄 수 없었다. 사정을 설명하고 다음 기회에 보자고 했더니 지금부터 150원을 채울 때까지 금식을 하겠다고 생떼를 부리기 시작했다. 열차 시간이 다 되어 오는데도 고집이 얼마나 센지 떼를 그치지 않았다. 결국 내가 지고 말았다. 150원을 주었더니 안경점으로 달려갔다. 잠시 후 개표가 시작되고 사람들이 다 열차를 타러 가는데도 익두 선생은 돌아오지 않았다. 열차가 떠나기 직전에야 헐떡거리며 달려 왔다. 마음을 졸이면서 눈이 빠지게 그를 기다린 나는 화가 났지만 그는 멋진 안경이 생겼다고 좋아했다.

정주에서 살 때는 공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기타를 파는 상가를 발견했다. 이놈이 짐작했던 대로 또 다시 강떼를 부리기 시작했다. 그거 사 줄 때까지 금식 하겠다고 난리를 부리기 시작했다. 한 번 져준것에 재미가 든 것 같았다. 냉정하게 거절했다. 며칠이 지난 후 그가 충분히 단념하는 것을 보고서야 사주었다.

모든 북한 형제들이 나를 힘들게 하고 속을 썩였지만  익두 선생도 참으로 나를 많이 힘들게 했다. 깊은 밤, 잠이 들었다가 누군가가 시끄럽게 찬양을 부르는 소리에 깨어났다. 들어보니 익두 선생이 통독 실에서 찬양을 부르고 있었다. 조금 기다려 보았지만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잘 수가 없어 통독 실로 나가 보았다. 익두 선생이 귀에 헤드폰을 끼고 찬양을 따라 부르고 있었다. 헤드폰 때문에 자기 목소리가 얼마나 큰지 모르고 있었다. 
“익두 선생, 다른 사람들 다 자고 있는데 혼자서 이러고 있으면 어쩝니까?  조용히 하세요.”
찬양에 심취해 있던 익두 선생이 후다닥 놀라 나를 바라보더니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덤벼들 듯이 와락 일어나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선생님은 왜 나만 가지고 자꾸 이러십니까! 왜! 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라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멍하니 서서 바라보기만 하던 나의 눈에서 갑자기 눈물이 흘러 내렸다. 사역을 시작하고 처음 6개월 동안 힘든 일이  많았다.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수십 번을 더 짐을 쌌다 풀었다 했었지만 이때가 제일 힘들었다. 내 방으로 돌아와서 울면서 주님께 기도 드렸다. 
“하나님, 너무 힘듭니다. 왜 하필 접니까? 왜 하필 이 자립니까? 이번에는 정말 한국으로 가겠습니다.” 
가방을 꺼내 짐을 다 싸고 하나님께 마지막 인사를 드렸다.
“하나님, 오늘이 사역 장에서 마지막 날입니다. 이제 한국 가면 자리도 많을 텐데 중, 고등 부를 하든, 청년부를 하든 저에게 맡겨진 일 열심히 잘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조용한 음성이 마음에 다가왔다.  
“그 짐 가방 내려놓아라. 네 자리가 여긴데 어딜 가느냐? 한국에 네가 갈 곳이 없다.”
한국에 갈 수 도 없었고 사역장에 있고 싶지도 않아 앉아 울고 있는 나의 방에 익두 선생이 찾아와서 용서를 빌었다. 나는 익두 선생에게 호소했다. 
“익두 선생이 알다시피 지금까지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이미 다 주었어요 형제들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하고 있어요 내가 익두 선생에게 이제 더 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이야기만 하세요 내 생명까지도 줄 수 있어요” 
익두 선생은 울면서 고백했다. 처음 이 사역 장에 올 때 공부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고 했다. 며칠 동안 살면서 동정을 살피다가 기회를 봐서 한국 놈은 죽이고 돈을 빼앗아 가려고 계획했었다고 했다. 
익두 선생은 자기의 결점과 장점을 솔직하게 고백했고 인정했다. 잘 도와달라고 했다. 나도 약속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겠다고 그리고 우리가 함께하면서 하나님의 귀한 일꾼들로 세워져 보자고 했다. 그날 이후부터 익두 선생은 많이 달라져갔다. 

김규성 목사님의 사모님이 아들 종윤이를 데리고 우리 사역장을 찾아왔다. 그동안 우리 사역장에는 될 수 있는 한 한국 사람들을 데리고 오지 않았다.  한국 사람이 한 사람 왔다 가면 언제나 부작용이 심했다. 많은 분들이 귀한 사역 현장을 보고 나서는 나도 헌금 좀 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간다. 그런 말을 들으면 북한 형제들은 한국 사람들이 돈 많은 재벌들처럼 돈을 보내준다고 생각한다. 그때부터는 선교사가 돈을 얼마나 받았으며 그 돈을 사역장에 얼마나 쓰고 자기는 얼마를 얻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만 하게 된다. 주광호 선생으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은 다음부터는 김의환 목사님과 박베드로 목사님 이외에는 정말 순수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 가진 것 없이 가난한 분들이 아니면 데리고 오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북한 선생들은 나와 오랫동안 함께 지내면서도 한국 사람들을 별로 만나지 못했고 특별히 한국 아이와 한국 여성은 처음 만났다.  또 사역 초기부터 함께 하면서 섬겨주던 김규성 목사님의 가족들이라 가족처럼 특별히 반가워했다.

 
 정주시 공원에서 찍은 사진이다.  왼쪽부터 
    유기풍 선생, 
    종윤이를 업고 있는 허익두 선생, 김 권능
    선생이 보인다.










오른쪽 허익두 선생이고 가운데 석은미 사모님이다.


종윤이는 초등학교 학생이었지만 축구를 좋아하고 제법 잘 했다. 그리고 사역장에 머무는 동안 선생님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축구를 좋아하는 어린 종윤이에게 마라도나처럼 공을 몰고 돌진하는 익두 선생은 환상 그 자체였다. 늘 익두 선생의 꽁무니를 쫓아 다녔다. 익두 선생도 마음이 여리고 자상한 편이라 종윤이를 무척 좋아했다.   

 
 정주시내 놀이 공원에서 찍은 사진이다. 
     북한 선생들은 이 낡고 초라한 전동차를 
     특별히 좋아했다 모든 사람이 다 타고 
     사진을 찍었다 북한에 살 때에 티. 비에서 
     평양놀이공원에서만 보던 물건이라고 
     했다. 이제는 평양에 사는 사람들이 
     부럽지 않다고 했다.

 




 익두 선생과 칼빈 선생이 정주시 놀이 공원에서 찍은 사진이다. →

처음 익두 선생은 칼빈선생을 싫어했다. 특별히 혼자서 신앙적인 냄새를 풍긴다고, 혼자 잘난 척 한다고 싫어했고 자주 티격 거리면서 싸우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익두 선생도 주님을 영접하고 나서는 누구보다도 칼빈 선생을 이해했고 좋아했다.  서로 주님의 은혜를 나누기도하고 말씀을 토론하기도하고 앞으로의 사역에 대해 사명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었다. 그때 익두 선생은 늘 손에 말씀 암송 노트를 들고 다녔다. 그래서인지 사진을 찍을 때에도 말씀 암송 노트를 들고 찍었다.

익두 선생은  1기 사역을 하면서 가장 나를 힘들게 했던 선생이었다. 순간순간 폭발하는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 본인도 많이 힘들어 했다. 하루에도 여러 번 신경질을 부리는 그를 위해서 그 누구보다 많은 기도를 했다. 어는 날은 너무 힘들어서 저 사람은 좀 내보내 달라고 기도했다. 정말 마음먹고 기도했다. 하나님은 내가 쓸 것이니 너는 걱정하지 말라는 음성을 주셨다.  하나님이 어떻게 저 혈기 많고 괴팍한 녀석을 쓰실지 궁금했다.

 익두 선생을 바라보면서 늘 그의 혈기와 괴팍한 성격이 나를 힘들게 한다고 생각했다. 익두 선생만 없으면 이 사역은 더 이상 아무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어느 날 기도하던 중 은혜 받고 충격을 받았다. 여태껏 나를 괴롭힌 것은 익두 선생이 아니라 나 자신의 탐욕과 내 안의 혈기라는 것을 발견했다. 표출 할 수 없는 내 안의 혈기를 익두 선생에게서 만날 때마다 나는 고통스러웠던 것이다. 그것이 익두 선생을 통하여 조금씩 다듬어져 가고 있었다. 주님이 익두 선생을 두고 내가 쓴다고 했던 말씀의 의미를 그때야 깨달았다. 내가 익두 선생을 다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익두 선생을 통해 나를 다듬고 있었다. 이 깨달음은 그를 향한 나의 마음을 바꾸었다. 부담스럽기만 하던 그가 고마웠고 감사했다. 익두 선생이 있었기에 내가 지금 여기까지 이렇게 다듬어 질 수 있었다. 더 잘해주지 못했던 지난날로 인해 많이 미안했다. 그를 향한 내 마음이 변하니 그때부터 익두 선생도 변화되기 시작했다. 그의 괴팍함과 혈기는 대부분 영적인 어두움 때문이었다. 성경을 배우면서 영적으로 회복되기 시작하면서 익두 선생은 많은 부분 회복이 되었다.

 
     정주 시내 한 고원 앞을 지나가면서 나와 
     익두 선생이 찍은 사진이다. 아무 특별한 
     의미 없이 그냥 두 사람이 찍고 싶어
     찍었다. 오늘 이렇게 귀한 역사 자료가 될 
     줄은 미처 몰랐다.























1기생 북한선생들이 지도자로 세워지고 첫 설교를 마치고 소림사로 유람하러갔다. 그때 소림사입구에서 찍은 사진이다.

이곳에서 모든 선생들이 기념으로 사진을 찍었다.  항상 조금씩은 유별난 익두 선생은 성경책을 끼고 서서 사진을 찍으면서 이러게 말했다. 
“선생님 나는 앞으로 목사 될 사람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하고 다르지 않습니까? 영상에서 보니까 목사님들이 사진 찍을 때는 항상 이렇게 성경책을 끼고 사진을 찍던데 나도 성경책을 끼고 찍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이 소림사 까지 성경을 들고 왔다. 마음이 찡했다.   
“ 하나님 들으셨나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내 마음속에는 평양에 초대교회 목사님들이 떠올랐다.
소림사를 다녀와서부터 다른 선생들도 지도자의 품격을 갖추기 시작하기 시작했고 익두선생이 제일 많이 변하되기 시작했다. 

 정에 목마르고 사랑에 목마른 사람들이 북한 사람들이다. 김규성 목사님의 석은미사모와 종윤이가 한 달 동안 가족들처럼 함께 지내면서 깊이 정이 들었다가 떠나가자 석은미 사모와 종윤이가 그리워서 익두 선생이 편지를 썼다. 

 

사모님께 드립니다
안녕하십니까.  헤어진 지 한 달 밖에 안됐는데 많은 세월이 흐른 것 같군요 한 달이라면 어제 그제로 생각 되겠는데 오히려 수많은 날과 달이 흘러 지나간 것처럼 생각이 됩니다. 이상하지요? 왜 그런지...저희는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 사랑과 보호하심 속에서 무고히 잘 지내고 있습니다. 사모님도 건강히 잘 지내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종화 종윤이도...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안부를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번에는 왜 그런지 겨를이 없어서 편지쓸 시간이 없어서 (잠잘 시간은 있는데 말입니다.) 로인 분들께서 인사말 드리지 못합니다. 사모님 대신해서 잘 전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복음의 위대한 빛으로 조국반도가 하나로 되는 그 날 까지 긍지감을 않고 민족 앞에 떳떳이 설 수 있도록, 몸은 비록 쇠잔하여 가도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다고 한 사도바울의 외침과 같이 끊임없는 기도와 간구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빛내어 주시기를 바란다고 말입니다. 뿌리가 억세고 튼튼해야 그 가지도 건강해지고 무성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그래서 순교선생님의 오늘까지의 성장이 무심히 보게 되지 않습니다
.
종화 종윤이도 이런 훌륭한 뿌리 분들- 1세의 분들의 영향과 지도 밑에서 훌륭히 잘 육성되리라 보아집니다. 하나님 바라시는 풍성한 열매가 선생님대에 열리게 되겠는지 아니면 종화 종윤이의 때에 맺히게 되겠는지 오직 주님만이 아시고 계획하실 일이라 생각됩니다. 사모님과 할아버지 할머니 분들이 주님 이미 뿌려놓으신 말씀의 씨를 잘 가꾸고 물을 주고 해서 또 한 세대의 주님을 위해 헌신하는 귀한 복음의 귀한 일군이 장성케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합니다. 참 사모님 가르쳐주신
"주안에 있는 나에게 "  부를 때마다 은혜와 사랑 충만한 그 나날들이 떠오릅니다. 보고도 싶구요, 원래 이 말이 제일 첫 머리에 나와야 하는건데...  요즘은 권능선생 (우리는 며칠전부터 선생님이라 부르기로 했습니다 정말 황송하기 그지없습니다.) 저의 지도밑에 이 찬송이 안 빠지는 날이 없습니다. 
참 은혜스럽기도 합니다
. 사모님도 물론 같은 심정이겠지요. 여기까지 쓰니 할 말이 없어졌습니다. 물론 종이 여백도 얼마 안 남았고요 오래 만에 귀가한 남편 되시고 아버지  되시고 아들 되시는 분께 온 가족이 합심하여 기쁘고 즐겁고 하나님께 영광 되는 행복한 순간이 차례지기를 부탁드리며 이만 펜 놓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 함께 찍었던 사진 중에서 몇장 꼭 철저히 보내주십시오 기도제목 종윤이 편지에 적었는데 해주시기 바랍니다
. 믿습니다.
99년 3월 1일  정주에서 익두 드림

연변으로 파송된 후 익두 선생은 사역장에 오기 전에 살던 연길시 의란진으로 갔다. 그곳 사슴농장 김집사님의 집에서 은거하면서 학생들을 모집했다. 익두 선생은 김성근, 권능선생 동생 김사무엘, 홍만식, 홍충신, 조선족 안형제까지 5명의 형제들을 모집하고 하남성 정주시로 내려가서 사역을 시작했다.

익두 선생은 학생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특별했다. 자기 학생들을 북한 선교의 최고의 일꾼들로 다듬어내겠다는 의지와 결심은 대단했다. 사역 시작부터 학생들에게 은혜를 끼치기 위해 설교 준비에 전력을 다했다. 새벽 2,3시가 되어야 잠자리에 드는 것이 보통이었다. 익두 선생은 사역 첫 시작부터 사역 장 전체 3일 금식을 시작했다. 금식을 통해서 학생들에게 담배와 술을 끊게 하고, 사역장의 일과에 순종시켰다.  익두 선생은 아파트 옥탑 방에 사역 장을 잡았다. 무더운 중국의 남방인데다 옥탑방에 내리 쪼이는 한낮의 태양 열기는 사람이 실신해 쓰러질 정도였다. 그런 곳에서도 학생들을 다그쳐 하루 8시간 통독을 했고 하루 두번 2시간씩 기도훈련을 했다.

연길에 머물면서 1기생 선생님들의 뒤 수습을 끝내고 뒤 늦게 익두 선생의 사역장에 갔다. 말 안 듣는 학생들을 다그쳐 대며 외롭게 사역하던 익두 선생은 내가 오자 반가운 나머지 눈물을 흘렸다. 학생 때는 몰랐는데 사역장의 리더가 되니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인다고 했다. 나에게 그 동안 힘들었던 일들을 하소연했다. 재미있는 것은 김성근 형제가 익두 선생이 내 속을 썩이던 모양을 그대로 익두 선생의 속을 썩이고 있었다.  
“아이구 선생님. 나 성근 이 저놈 때문에 미칠 것 같슴다. 글쎄 내가 학생 때 선생님에게 했던 짓을 옆에서 본 것처럼 흉내내구 있지 않구 뭠까? 혼내구 싶어두 내 생각이 나서 그러지두 못하겠구 정말 속상함다. 그때 선생님두 지금 내처럼 속상했슴까? 아이고 속 터져라 속 터져…”
주님은 어떤 사람이든 그 사람이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신다. 세상에서도 심은 대로 거두는 원리는 동일하지만 특히 선교사들에게는 무서울 정도로 정확했다. 익두 선생뿐 아니라 다른 선생들도 자기가 했던 그대로 학생들에게 당하는 것을 보았다. 익두 선생의 속을 썩이던 성근 선생도 훗날 선생으로 세워져 사역을 해 나가면서, 자기처럼 말 안 듣는 학생 때문에 똑같은 곤욕을 치르는 것을 보았다.


   익두 선생의 헌신과 열정으로 인해 학생들은 하루하루 달라져갔다. 꾸준한 통독과 익두 선생이 심혈을 기울여서 전하는 설교 말씀, 그리고 기도를 통해서 이들에게 조금씩 신앙이 싹터 갔다. 변화되어 가는 형제들을 바라보며 익두 선생은 그 동안 많이 힘들었지만 보람도 느끼면서 사역에 정을 붙이기 시작했다.

익두 선생 사역장 형제들과 우리 가족들이 성도시 “도강원”으로 유람 가서 찍은 사진이다. 윗줄 오른쪽부터 김성근, 이순홍목사님, 사무엘, 유칼빈, 홍충신, 김예진, 조선족 안형제, 이현수, 명현이를 안고 있는 허익두 선생, 맏딸 영니이다. 

아랫줄 오른쪽에서부터 홍만식, 어머님이신 권사님, 사모와 아들, 조선족 아주머니와 그의 딸 월금씨다.





도강원에서 물놀이 하고있는 익두선생 사역장 형제들과 우리 가족들이다.



익두 선생은 설교를 잘했다. 정말 잘했다. 나의 가족들이 한국으로 들어올 때였다. 권사님이신 어머님과 아내는 어렵고 위험한 북한 선교에 꼭 가족이 다 동참해야만 하는 법이 없다고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아내는 무섭기도 하고 너무 힘든 사역이라는 것을 알기에 어떻게 하던 중국으로 들어오지 않으려고 했다. 아내는 한 달 동안 한끼 금식과 철야 기도를 하면서 이 잔을 옮겨 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결국은 끌려오다시피 중국으로 왔다. 아내는 너무 힘들어서 얼굴이 퉁퉁 부어서 사람을 못 알아 볼 정도로 지친 몸을 이끌고 시어머니 모시고 중학교에 갓 입학한 첫째, 초등학생인 둘째 그리고 일곱 살과 다섯 살인 셋째, 넷째까지 여섯 식구를 데리고 아무 대책도 없이 배를 타고 청도(靑島)로 들어왔다가 다시 정주로 내려와 익두 선생의 사역장에 들렀다. 며칠 동안의 고단한 여행으로 가족들은 몹시 지쳐 있었다. 익두 선생 사역장 형제들은 우리 가족이 온다고 하루 종일 청소를 하고 음식을 장만하고 야단 법석을 부리면서 우리를 환영했다.  
“히야~ 한국 애들은 이렇게 생겼구나야! 어디 함 만져보자야!” 
가족들이 도착하자 북한 형제들은 우리 아이들을 보면서 좋다고 마구 날뛰고 신기해했다. 특히 다섯 살짜리 막내 명현이를 번갈아 가면서 안아본다고 야단들이었다.  낯설고 하나같이 얼굴이 시커먼 북한 아저씨들이 과잉 친절을 보이자 무서운지 아이들은 다른 방으로 도망을 가버렸다. 
“사모님, 한국 사람들은 어케 삼까?”
“한국이 잘 살다는데 정말임까?”
“한국 아덜은 다 저렇기 곱게 생겼슴까?” 
북한 형제들은 며칠 동안 기차를 타고 온 우리 가족들에게 잠 잘 시간도 주지 않고 그동안 한국에 대해 궁금했던 것을 쏟아놓았다. 피곤에 지친 아이들이 쓰러져 잘 때에야 질문을 그쳤다. 한국 사람들도 자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우리 가족들에게 자기들의 침실을 내주었다. 가족들은 며칠 동안 입에 맞지 않는 중국 음식 때문에 변변히 먹지 못해 배가 많이 고팠다. 김성근 형제가 정성스럽게 아침을 만들어서 우리에게 대접하면서 말했다.
“선생님, 제가 오늘 선생님 가족들이 온다구 특식 했슴다. 맛있게 드십시오.”
부엌으로 가니 닭고기가 식탁에 산처럼 쌓여있었다. 그러나 맹물에 그냥 통째로 삶기만 한 거라 솜을 씹는 것 같아 먹을 수가 없었다. 아내가 성근 형제에게 물었다.
“이건 어떻게 먹는 음식이에요?”
“아~! 한국 분들은 닭고기 잡수실 줄 모르는구나. 이거요, 그냥 간장에 뚝뚝 찍어 먹우문 맛있슴다. 함 그렇게 잡숴보세요. 권사님, 사모님, 많이 드세요. 얘들아, 많이들 먹어 응?”
나는 이미 북한 형제들이 만들어 주는 이상한 음식들에 익숙해져 있었지만, 아내와 아이들은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아내가 닭고기에 다시 조미료를 넣고 이리저리 볶아서 주니 형제들은 사모님이 요리사라고 대단해했다. 식사를 마치고 익두 선생의 인도로 사역장 형제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다. 어머니와 아내는 익두 선생의 설교를 들으면서 은혜를 많이 받았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했다.
 “ 우리가족을 이 일을 위하여 부르셨군요 알겠습니다 기쁨으로 감당 하겠습니다” 
아내는 그 때부터 지금 까지 후회 없이 함께 이 일을 잘 감당하고 있다. 그때 익두 선생이 무순 설교를 했는지 늘 궁금하다 한번 만나면 물어봐야겠다. 익두 선생도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익두 선생은 학생들을 잘 가르쳤다. 학생들이 기계적으로 성경을 읽는 것을 막으려고 저녁에는 통독 과정에 마음에 와 닿았던 구절과 이해하기 힘든 구절들을 서로 발표하고 토론하게 하고, 마지막에는 자신이 학생들의 의견을 종합한 다음 결론을 짓고 넘어가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토론식 공부의 효과는 컷다. 학생들은 전 같으면 건성건성 넘어가던 구절도 곰곰이 따져보며 여느 때 보다 더 정확하고 깊이 있게 말씀을 이해하고자 하였다. 익두 선생은 말씀을 얼마나 많이 통독하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학생들이 숲만 보고 나무는 보지 못하는 우를 범치 않게 하기 위해, 성경 한 구절이라도 정말로 잘 이해하고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도록 가르치려고 애를 많이 썼다.

신약 성경 100독을 넘어섰을 때는 기계처럼 돌아가던 일과를 바꾸었다. 조선족 안 선생을 통해 하루에 40분씩 중국어 공부도 시키고, 기도 시간에도 통성기도와 묵상 기도, 큐티를 자유롭게 선택해서 하도록 하였다. 지도자 양성 단계로 들어가면서부터는 본격적으로 설교를 하는 훈련을 시작했다. 설교가 끝나고 예배가 다 끝난 후에는 30분 동안 설교에 대해서 질문하면서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설교자가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자기 것으로 소화시켜 말씀을 전했는지 질의응답 시간에 다 밝혀졌다. 처음에는 대충대충 넘어가려던 북한형제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익두 선생의 열정적인 노력에 의해 익두선생팀 북한 형제들도 모든 지도자 양성 과정을 마치고 북한 선교사로 임명 받았다. 그들을 파송하는 날 이현수 선생이 비장한 각오로 씩씩하게 말했다. 
“선교사님, 잘 하겠슴다. 맡겨만 주십시오.”


김의환 총장님이 익두선생 사역장에 왔을 때 찍은 사진이다. 총장님이 이때 어린 사무엘형제를 가방 안에 넣어서 한국으로 데려가고 싶다고 몇 번씩이나 말했다. 그게 가능했다면 정말 그러게 할 태세였다. 





김의환 총장님이 가방에 넣어 가고 싶다고 했던 사무엘 형제이다. 당시 사무엘 형제는 15살이었다. 하지만 나이에 비해 너무 어려보였다. 


익두 선생의 사역장에는 유칼빈 선생, 김예진 선생, 이현수 선생들 파송되어 연변으로 올라갔다. 사무엘 형제는 15이었고 홍충신 형제도 18세라 너무 어려 파송에서 제외 되었다. 홍만식 선생은 그때까지 담배를 끊지 못해 좀더 훈련 받고 파송하기로 본인과 합의 했다.  파송 예배가 끝나고 칼빈 선생이 나를 찾아왔다.
“저… 선교사님 할 말이 있는데요…”
그는 민망한 듯 구부정한 자세로 서서 말했다. 나는 편히 앉으라고 손짓하면서 말했다.
“뭐예요? 괜찮아요, 얘기하세요.”
“선교사님, 저 솔직히 중국 들어올 때 저의 어머니가 많이 앓고 있었슴다. 집에 식량도 없구 약도 없어 제가 중국으로 나왔슴다. 그런데 이렇게 일 년 동안 공부하다보니 집에 계시는 어머니가 어떻게 되었는지 몹시 걱정스럽슴다. 저 이제 파송되면 학생 모집보다는 먼저 북한에 있는 집에 갔다 와야 할 것 같슴다.”
칼빈 선생은 몹시 미안해했다. 모두가 생명 바쳐서 북한 선교를 한다고 결심하고 있는데 자기만 집안 문제로 걱정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선교사님, 저두 알구 있슴다. 예수님이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않다구 하신 말씀을 알구 있슴다. 하지만 저는 정말 어머니 생각이 나서 못 견디겠슴다. 허락해 주십시오. 갔다가 곧장 되돌아오겠슴다. 되돌아 와서 학생들을 모집해서 다른 선생들 못지않게 잘해 보겠슴다.” 
 “그렇게 하세요. 괜찮아요. 우리 잠깐 기도합시다.”

칼빈 선생 손을 붙잡고 그가 국경을 넘어 집에 무사히 갔다 올 수 있게 해달라고 주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파송되어 어머니가 걱정되어 북한으로 나갔다가 소식이 
     끊어진 유칼빈 형제이다. 














익두선생 팀이  파송되기 전 김의환 목사님께서 세례를 주고 성찬식을 해주셨다.

 





한 달 후 익두 선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선교사님…” 
익두 선생은 힘들게 말했다.  
“익두 선생, 왜 그러세요?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죠?” 
제발 또 어느 선생이 체포되었다는 얘기는 아니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다. 
“선교사님… 김예진 선생과 이현수 선생에게서 갑자기 소식이 끊어졌슴다.” 
“아니 왜? 어떻게 된 일인데요?”
“저도 모르겠슴다. 두 선생이 함께 학생을 모집하러 왕청 쪽으로 떠난 후 다시 소식이 없슴다.” 
“소식이 끊긴지 얼마나 됐어요?”
“한 주일 정도 됐슴다.”
한 주일 동안이나 소식이 없었다면 십중팔구 체포된 것이 분명했다. 나는 눈앞이 캄캄해왔다.
“북한으로 들어간 칼빈 선생은 어떻게 되었어요?”
“칼빈 선생두 이젠 다시 되돌아 올 시간이 넘었는데 소식이 없슴다.” 
전화기 저쪽에서 익두 선생은 나지막한 소리로 울고 있었다. 1년 간 동고동락하면서 키운 학생 3명을 잃어버린 그의 마음이 충분히 느껴졌다. 익두 선생은 그래도 계속 연변에 남아 칼빈 선생을 기다려 보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 후 익두 선생은 다시 연락이 오지 않았다. 믿고 파송 한 형제들이 돌아오지 않자 사역을 포기한 것 같았다.  권위 선생님 팀을 연변으로 파송 시키면서 익두 선생을 만나서 서안으로 내려 보내라고 부탁했다. 익두 선생이 내려오면 그에게도 몇 개의 사역장을 맡겨 큰 사역자로 키우고 싶었다. 하지만 권위 선생은 돌아오면서 익두 선생팀에서 파송되어 나갔던 김예진 선생만 데리고 왔다. 익두 선생은 서안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익두 선생은 그때 잃은 자신감을 한국으로 와서도 쉽게 회복하지 못했다. 지금도 여러 가지 생업에 몰두 하고 있다.  몇 년 전에 익두 선생을 만나 커피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제 세상일을 그만큼 했으면 다시 하나님의 일을 해보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익두 선생은 자기가 한국 와서 10년 동안 해놓은 일은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 둘 키워 놓은 것뿐이라고 지나간 세월을 눈물을 흘리면서 한탄했다. 
“선생님 다시 하나님의 일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제 다시 한다면 정말 진실하게 제대로 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다시 저를 불러주시기를 정말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

익두 선생의 마음 깊은 곳에는 아직도 중국에서 북한 형제들을 가르치던 사역자의 정신이 조금도 녹슬지 않고 살아 있었다. 나는 지금도 익두 선생이 다시 돌아와 하나님의 일군으로 준비를 한다면 모든 것을 다 바쳐 이끌어주고 도와주려고 생각하고 있다. 주님의 일을 하게 되면 정말 큰 사람이 될 텐데 허무한 시절을 보내는 것이 정말 아까운 사람이다.  

허익두 제자들

김성근

김예진

홍만식

김사무엘

유칼빈

이현수

홍충민

안학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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