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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교 선생

최순교 선생은 북한에서 10년을 군사 복무한 사람이다. 제대 후 고향으로 돌아와 결혼을 했다. 딸을 낳았지만 먹을 것이 없었다. 아무리 먹을 것을 구하러 다녀도 구할 수가 없었다. 가난을 견딜 수 없어 아내는 집을 나갔다.  그 후 딸은 굶어 죽었고 함께 살던 아버지도 굶어서 돌아가셨다.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순교 선생은 미쳐버렸다. 중국에 가면 먹을 것이 있다는 말만 듣고 무작정 중국으로 왔다.  

중국에 왔지만 갈 곳이 없어 권능 선생이 아버님이 있는 숲속 마을을 찾아왔다. 마침 권능 선생이 1차 사역을 하다 지쳐 쉬고 싶어 숲속 마을로 돌아왔다.  쉬러 왔지만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많은 북한 형제들을 보고 권능 선생은 순교 선생을 비롯해서 9명의 북한 형제들을 이끌고 다시 제남으로 내려 왔다.

제남시 산동 대학교 공원에서 처음으로 최순교 선생을 만났다. 다른 사람들은 다 나를 보고 인사도 하고 앉았던 사람들도 일어나면서 예를 갖추었지만 최순교 선생은 오히려 배를 내밀고 다리를 들어 앞 의자에 걸쳐 놓으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일부러 폼을 잡는 것인지 원래 사람이 거만한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웃으면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처음 만나네요 반갑습니다. “ 
순교선생은 나의 인사를 무시해버렸다. 권능 선생과 옆에 있던 형제들이 눈치를 주자 순교선생이 말했다. 
“내가 인민군 출신인데 어떻게 안기부에게 굽실거릴 수 있겟는가?”
웃음이 나왔지만 참으면서 뒤돌아서자 자기들끼리 말했다. 
“그럼 너 여기 왜 왔니?”
“안기부라도 어쩌겠나 일 년 정도는 공부해 봐야지” 
권능 선생 팀을 성도로 보내고 나중에 다시 찾아가 보았을 때에도 최순교 선생은 여전히 뻣뻣했다. 다른 북한 형제들은 두 번째 만나서인지 반갑다고 악수도 하고 자리도 권했지만 최순교 선생은 방안에서 나오지도 않았고 인사도 하지 않았다. 원래 그런 사람이려니 하고 관심을 두지 않았다.  훗날 나의 가족들을 데리고 성도에 살면서부터 권능 선생 사역장을 자주 방문하게 되었다.

  

 

권능 선생팀 북한 형제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제일 뒷줄 왼쪽으로 세 번째에 서서 웃고 있는 사람이
 최순교 선생이다.


어느날  최순교 선생이 나를 불렀다. 할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죄송합니다. 선교사님 이때까지 안기부인줄로만 알고 함부로 막 했는데 미안합니다. 이제부터는 잘 해보겠습니다.” 
은혜를 받은 것인지 분위기 파악을 한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 후부터는 나를 잘 대해주었다. 찾아가면 인사도 잘 했고 권능 선생님의 말도 잘 듣는다고 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것을 깨달은 최순교 선생은 그때부터 다른 형제들과는 전혀 다른 열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특별히 기도를 많이 했다. 다른 형제들은 억지로 시켜도 잘 하지 않았지만 순교 선생은 늘 짬만 있으면 기도했고 기도를 즐거워했다. 이 때문에 제일 먼저 영안이 열렸고 은사를 경험하기 시작했다. 권능 선생이 배가 아퍼 일어나지도 못하고 식사도 하지 못했다. 그러자 순교 선생이 대뜸 권능 선생의 방에 찾아와서 안수 기도를 해주었다. 하나님을 배우기 시작한지 한 두달 밖에 되지 않은 사람이 자기 선생님에게 안수 기도를 한답시고 손을 배에 대고 뭐라고 고함을 지르면서 냅다 기도를 했다. 사람이 참 단순하고 순수했다. 그런데 권능 선생의 아픈 배가 낳았다. 다들 신기하게 생각했다. 그때부터 최순교 선생의 영적 은사는 북한 형제들에게 조금씩 인정받기 시작했다.

최순교 선생은 자기가 은사 받은 것을 알고서 나에게 자랑을 했다. 어린 아이가 배를 내밀고 아빠에게 자랑하듯이 나에게 와서 엄지 손가락을 흔들면서 말했다.
“선생님 저 은사를 받았습니다. 내가 기도하면 아픈 사람 낳습니다.” 
당시 나는 은사를 무시했다. 사역을 말씀 중심으로만 진행하였기 때문이다. 은사를 내세우기 시작하면 신앙의 기초가 미약한 북한 형제들이 자극적이고 신비적인 것들만 좇다가 말씀을 놓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최순교 선생의 은사를 칭찬하지도 않았고 장려하지도 않았다.  
그 후에도 최순교 선생은 계속 환상을 보았고 예언을 했다.  방언도 스스로 기도하다가 받았다. 방언 기도를 알지 못하는 북한 형제들은 기도시간이 되면 이상한 소리를 내는 최순교 선생이 점점 이상해진다고 구박하기 시작했다. 북한 형제들이 그러건 말건 최순교 선생은 개의치 않고 방언기도를 했고 즐거워했다.

말씀 암송도 방언으로 하기 시작했다. 보통 몇 백 구절 되는 말씀을 한 번 반복을 하는데 1시간 반 정도 걸려야 한다. 최순교 선생은 자기는 20 분이면 한 번 외울 수 있다고 우기기 시작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방언으로 말씀을 외운다고 했다. 시켜보니 실제로 방언으로 말씀을 외우고 있었다. 이런 은사가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김의환 총장님으로부터 세례를 받는 최순교 선생







 

 김의환 총장님과 함께 사진을 찍은 최순교 선생




 

 북한 선교사로 세워진 후 설교하고 있는 순교 선생



탈북자들 중에서도 특별히 기도를 많이 했던 최순교  선생은 이 기간 여러 가지 은사를 받았지만 가장 강력  한 은사는 통변의 은사였다. 최순교 선생은 성경 말씀을  지적으로 깊이 파고 들어가지 않았다. 가창력도 좋지 않아  찬송가를 잘 부르는 사람은 아니었다. 순교선생이  설교할 때면 대부분 북한 형제들이 지루해 하고  졸았다. 그러나 설교가 끝나고 순교선생이 찬양을   부르기 시작하면 모든 사람들이 다 뒤집어 지고 눈물을   흘리고 콧물까지 흘리면서 자복하고 회개하는 영적인 일들이 일어났다. 정말 탁월하고 강력한 은사였다. 단순한 믿음이 가장 파워가 있다. 어린 아이처럼 단순하고 순수했던 최순교 선생의 믿음의 기도는 정말 많은 은사를 발휘했다.


연변으로 파송 된 후 최순교 선생은 제일 먼저 학생들을 모집해서 서안으로 내려왔다. 최순교 선생은 신소광 최효선 고봉희 박에녹 신제록 김기철 김우열 박예진 철남이 김현남 노천성 형제들을 모집해 왔다.

 최순교 선생은 3기 사역의 문을 열었다. 사역에 대한 순교 선생은 열정은 대단했고 자신감도 넘쳤다. 본인이 경험한 신비체험도 많았고 여러 가지 은사들도 가지고 있기에 북한 형제들이 쉽게 은혜를 받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모든 사역은 일사천리로 진행될 것 같았다. 열심히 가르쳤고 북한형제들에게 열심히 통독을 시켰다.  두 석달 동안 통독을 기세 좋게 쭉 진행했다. 

 사람의 생각과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사역이다. 한 사람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을 얻게 한다는 것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이 세상 어두움의 영과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오전 통독 시간이 끝나고 순교 선생과 학생들은 부엌으로 나가 밥상에 둘러 앉았다.  식사기도 당번이 식사기도를 끝냈다. 다른 때 같으면 기도가 끝나기 무섭게 밥술을 뜨던 학생들이 오늘은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였다. 순교 선생은 아무 생각 없이 혼자 밥을 먹다 이상해서 물었다. 
“어째서 밥들 안 먹소? 밥이 맛없슴까?” 
 기다리고 있던 효선 형제가 소리를 꽥 질렀다. 
“아 이거, X할! 순교 선생! 술 좀 마십시다! 사람이 이거 살겠슴까?” 
효선 형제가 그의 멱살을 와락 움켜잡더니 악쓰듯 소리치기 시작했다.
“야 인마! 야! 술 내놔 술! 우린 술이 마시고 싶단 말이야. 이 개새끼야!”
너무 갑작스레 일어난 일이라 순교 선생은  멍한 눈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최순교 선생은 군사 복무 10년을 한 군인출신이다. 싸움이라면 순교 선생도 만만하지  않았다. 순교 선생은 효선 형제의 멱살을 맞잡고 소리쳤다.
“안 돼! 안 돼! 술 마시면서 공부할 거면 다 걷어치워! 걷어치우란 말이야! 그래 인마, 나를 죽여라. 그리고 술 마셔라, 마셔!” 
그의 얼굴은 뻘겋게 달아오르고, 이마에는 지렁이 같은 실핏줄이 꿈틀거렸다.  효선 형제는 후다닥 침실로 뛰어 들어가 와락와락 짐을 싸 들고 나와 소리쳤다 
“그래, 인마. 나, 간다! 술두 못 먹게 하지, 담배두 못 피게 하지, 그리구 뭐 귀신 딱지 같은 소리만 맨날 외우라지. 하나님은 무슨 개뼈다귀 같은 하나님이야? 하나님이 있으면 어디 내 눈 앞에 내놔봐. 나, 간다, 가! 야! 너들도 가자! 새끼들아! 뭐 말라빠진 형제구 나발이야?” 
어떤 형제들은 사정하듯 말했다. 
“순교 선생, 최광 선교사 몰래 한 번만 마시면 되는 걸 가지고, 뭘 그렇게까지 원칙을 지키려고 그러오?”
“순교 선생, 한 번만 사주오. 그러면 우리도 말 잘 듣고 공부할거요.” 
“안 돼요.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돈은 술이나 사먹으라는 돈이 아니란 말이요.”
그러자 소광 형제가 못마땅한 듯 한마디 했다.
“돈이면 다 같은 돈이지, 술 사 먹는 돈은 따로 있슴까?”
다른 형제들도 짐을 싸들고 나오면서 그에게 고함을 쳤다. 
“우리도 간다 가! 더는 못 살겠단 말이야! 사람이 이렇게 어떻게 살아! 참아도 유분수지 엉? 마! 니는 죽은 사람 살리는 구라 같은 이야기만 맨날 읽어대라 우린 간다!” 
순교 선생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원칙과 사역 중에 어떤 것을 선택해야할 지 알 수 없어 갈등했다. 
"좋다. 다들 짐들을 놔라! 그리구 술 사줄 테니 마셔라!" 
갑자기 사역 장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우~와! 순교 선생 만세!” 
“드디어 술을 먹게 됐다. 만세! 우리가 이겼다~아!” 
학생들은 다시 방 안으로 우르르 몰려 들어갔다. 순교 선생은 직접 술과 안주를 사가지고 와서 학생들에게 주었다. 
“순교 선생두 한 잔 하시지 뭘? 순교 선생이 안 마신다구 달라질 거 뭐가 있겠소?”
거나해진 학생들이 이구동성으로 권했지만 순교선생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참고 참았던 울분이 눈물이 되어 후드득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했다. 주님께 죄송한 마음과 학생들에게 당한 수치심과 억울함 때문에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앉은 자리에서 기도하다가 울고, 울다가도 기도하며 넋이 나간 사람처럼 그 자리에 바위처럼 굳어져 앉아 있었다. 

며칠 후, 나는 순교 선생 사역장에서 술 파티를 했다는 것을 알고 찾아갔다.
“순교 선생, 뭐 하는 거예요? 지금 사역하는 거예요, 장난하는 거예요?” 
화가 나서 마구 몰아세웠지만 순교 선생은 잠자코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전부 다 통독실로 모이라고 하세요.” 
모두 통독실에 모이자 나는 학생들에게 선포했다.
“이 시간부터 순교 선생은 사역 팀장이 아니에요. 그리고 당신들 모두 연변(延邊)으로 돌아가세요.”
효선 형제가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아니, 선교사님, 왜 그럼까? 우리가 술 좀 마셨기로서니 이렇게까지 할 거야 없지 않슴까? 술 마신 것이 그렇게 까지 큰 죕니까?” 
“나는 술 마시는 사람들하고 함께 일하지 않아요. 그리고 이 사역비는 하나님의 공부를 하는 데 쓰라는 돈이지, 술 마시고 노는 데 쓰라는 돈이 아니에요. 다들 짐 싸서 돌아가세요.”
 학생들은 당황하기 시작하였다. 
“선교사님, 우리가 정말 잘못했슴다. 술이 너무 마시고 싶어 그랬지만 이렇게 큰 잘못인지는 몰랐슴다. 그렇지만 처벌하려면 우리만 해주십시오. 순교 선생님은 아무 잘못 없슴다. 우리가 하도 마시자구 해서 그랬지, 순교 선생님은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슴다. 그리구 우리는 갈 데두 없는 사람들인데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다시는 안 마시겠슴다.” 
모두 웅성웅성 하면서 나에게 잘못을 빌었다. 나는 딱 한 번만 더 기회를 주기로 하고, 그리고 다시 술을 마시면 정말로 돌려보낸다고 오금을 박았다.

이 후에도  북한 형제들은  계속해서 말썽을 부렸다. 순교 선생의 깊은 기도와 열정에  주님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임하기 시작했다. 효선형제에게는 평소에도  장차가 꼬이는 병이 있었다. 신기하게도 이 병이 순교 선생과 다투고 나면 도졌다. 효선 형제가 배를 앉고  대굴 대굴 굴러다니면 순교 선생이 한 참을 내려다보다가 숨이 넘어 갈 것 같으면 붙잡고 기도해주었다. 그러면 언제 그랬냐 싶게 금방 나았다. 효선 형제는 몇 번 당하고나 주님의 손과 순교 선생의 은사를 경험하고 나자 다시는 대들지 못하고 고분고분해졌다.  
 노천성 형제는 갈 곳이 없어 사역장에 들어왔지만  통독과 훈련이 너무 힘들었다.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한 명의 학생이라도 붙잡고 싶은 순교 선생은 여기서 계속공부 하자고 가긴 어딜 가냐고  노천성 형제를 보내주지 않고 끈질기게 설득하기 시작했다. 사역 장에 있고 싶지도 않고 갈곳도 없는 노천성 형제가 갈등에 지쳤는지 결국 희한한 제안을 했다. 
“좋습니다. 선생님 그러면 한번 점보러 갑시다. 점쟁이가 여기 있으라고 하면 있을께요”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무당과 점쟁이들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순교 선생이다. 성도라면 절대로 가지 말아야 할 곳이  점보는 곳이다. 그러나 순교 선생은 대뜸 승낙했다. 제까짓 점쟁이도 하나님 손안에 있을 것이고 노천성 형제가 이곳에서 성경 공부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하나님이 어떤 방법이로든 도와주신다고 생각한 것이다. 정말 단순한 믿음이었다. 이 때문에 순교 선생의 믿음에는 힘이 있었고 응답이 빨랐다.

순교 선생은 노천성 형제를 점쟁이에게 데리고 갔다. 역시 순교선생의 믿음대로 점쟁이는 노천성 형제가 이곳에 있는 것이 좋겠다는 점패를 내 주었다. 노천성 형제는 다시 눌러 앉아 성경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 후 2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돌아가고 말았다. 훗날  노천성 형제는 한국에 들어와 부산시 수영로 교회 집사가 되었다. 그때 순교선생에게서 성경을 배운 것이 재산이 되어서 교회로 나가게 되었고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잘 한다 내가 수영로 교회로 갈 때 마다 그곳 여전도사님이 칭찬을 했다. 아름다운 신앙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아 어머니도 한국으로 데려오고 한국에서 결혼도 하고 애기도 낳고 잘 살고 있다. 순교 선생이 기도하면서 심은 씨앗이 아름다운 열매를 맺었다. 

나를 만날 때마다 순교 선생은 자주 말했다 
“선생님 주님은 학생들을 맡겨 주실 때면 그들을 감당할 수 있는 권세도 함께 주십니다. 
그리고 정말 사역을 이끌어 가는 방법은 기도 밖에 없습니다.“ 
최순교 선생은 기도의 힘과 능력을 아는 사람이었다. 누구보다 더 많이 기도했다. 사역을 완전히 기도로 이끌어 갔다.

많은 기도를 하면서 사역을 이끌었기에 순교 선생의 사역은 변화가 빨랐고 사역이 가장 성공적으로 순조롭게 이루어져 갔다. 순교 선생의 사역장 형제들은 매우 거칠었지만 그 중에서도  최효선 형제가 제일 거칠 었다. 북한에서 프로축구 선수로 살다가 온 형제라 급하고 공격적이었다. 하지만 내장이 꼬이는 일로 몇 번 혼이 난 후부터는 고분고분해졌다. 빨리 안정되었고 자리를 잡았다. 이 때문에  다른 3기 사역장들에서 말 듣지 않는 북한 형제들로 인해  한 참 전쟁을 치를 때 순교 선생 사역장은 우리 식구들과 자주 공원에 놀러 가고 여행을 갔다. 제일 드세고 거칠던 녀석들이 고분 고분 말을 잘 들으니 정말 사랑스러웠다.


 순교 선생 사역장 형제들과 우리 가족이   서안 동물원에 놀러 가서 찍은 사진이다.   제일 아랫줄 오른쪽에 최순교 선생이고  그 옆에 앉은 사람이 제일 말썽부리던 효선 형제이다.




순교 선생 사역장과 우리 가족들이 서안 놀이 공원에 가서 찍은 사진이다 →


나는 가족들과 순교 선생 사역장 형제들과 자주 놀러 갔다. 다른 사역장 형제들이 알면 아마 난리가 났을 것이다. 그래서 공개적으로가기도 하고 조용히 갔던 적도 몇 번 있었다.



 
단기선교로 우리 사역장을 방문한 울산교회 
 고등부 학생들
 



     
 고현철 목사님이 지도하는 울산교회  고등부 학생들이 단기 선교차로 우리 사역 장을 찾아 왔다. 다른 사역장 들은 선생과 학생들이 한참 전쟁중이라 한국의 고등학생들에게 보여줄 만한 사역장은 순교 선생 사역장 밖에 없었다. 결국 순교 선생 학생들이 혜택을입고 한국의 고등학교 여학생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북한 형제들이 남한의 여학생들 처음 보니까 다들 난리 났다. 이놈들이 그때 환상이 들려버렸다. 사진을 찍고  그 한국 여자애들 사진을 한 장 씩 쥐고 가슴에 품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남자의 애정이 싹트고 사랑이 시작되었다. 나중에 한국에 와서 하나원 졸업하고 전부 울산으로 집을 받겠다고 난리 부렸다. 조봉희 형제는 울산에 집을 받았고 신소강 형제는 밀양이 울산과 가깝다고 밀양에  집을 받았다. 

“한국의 여학생팀을 유치했다.!” 우리 사역장에서는 전설 같은 소식이었다. 한국이 월드컵이나 올림픽을 유치했다는 소식보다 더 큰 소식이었다.  이 소식의 파급력이 얼마나 크다는 것을 알기에 다른 사역장에는 절대 비밀로 했다. 성근 선생이 이 자료를 정리하면서 처음으로 알았다고 했다. 이 일로 인해  순교 선생은 자기 학생들에게 엄청나게 인기가 좋아졌고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때 이국제 집사님이 애들을 데리고 함께 왔다가 감동을 많이 받았다. 훗날 2008년에 다시 중국에 들어가서 사역을 하다 보니 이 집사님이 그때 받은 감동을 그대로 간직하고 신학교로 가서 신학을 하고 북한 선교사가 되어 있었다. 이국제 집사님 도움으로 북한 형제들을 한국으로 데려오는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때 함께 왔던  고현철 목사님도 많은 은혜를 받았다. 그 후부터 고현철 목사님은 오래 동안 우리 사역장에 헌금을 보내 주었다.순교 선생의 설교에 많은 은혜를 받았다고 했다.  순교선생은 우리가 복음을 위해서 부름을 받았다. 우리가 북한을 위해서 복음을 전해야 하지 않느냐 하는 내용의 설교를 했다.  북한 사람이 그런 메시지를 전한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때부터 계속 두고 두고 외웠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당회장 정근두 목사님께 이야기 하고 순교선생 사역장 형제들이 한국에 왔다고 하자 고현철 목사님이 이들은 자기 집까지 초청해서 식사도 했다.

3기 사역장들 중에서 제일 잘하다 보니 세례도 제일 먼저 받았다.  김의환 목사님이 왔을 때 세례식을 했다.

  김의환 총장님으로 부터 세례를 받고 있는 최순교 선생 
  사역장이다. 

김의환 총장님이 세례주러 와서 말씀했다. 
“최선교사 일년 밖에 배우지 않은 탈북자가 어떻게 탈북자에게 성경을 가르칠 수가 있지? 아무래도 이해가 안돼”  
김의환 총장님은 단단히 작정을 하고 순교 선생 사역장으로 갔다. 설교하시던 목사님이 기철 형제가 암송을 많이 했다는 말을 듣고는 그 자리에서 시켜보셨다.  기철형제가 줄줄 나오자 성령에 대해서 해보라고 했다. 역시 줄줄이 나오기 시작했다. 다시 교회에 대해서 말해보라고 했다. 역시 줄줄이 나오기 시작했다. 입만 하 벌리고 기철 형제를 지켜보던 총장님이 말씀했다.
“그래 내 이제 알겠다. 정말 가르치긴 가르친다. 정말 희한한 녀석들이다”

제일 열심히 사역을 했기에 최순교 선생 사역장 형제들이 제일 먼저 모든 훈련 과정들을 이수하였다. 나는 순교 선생 사역장 형제들을 데리고 중국의 5대 명산 중의 하나인 화산으로 올라가서 이들을 북한 선교사로 임명하는 예배를 드렸다.



  화산으로 올라 가  기념 예배를 드리고 화산 정봉에서 기도모임을 하면서 찍은 사진이다. 그때 정말 멋있었다 .
화산도 장관이었고 
 기도의 열기도 뜨거웠다.





화산 정봉의 기도모임 후  찍은 순교 선생 사역장 형제들이다.




순교 선생은 욕심이 좀 많았다. 청도 한인교회 집사님들이 오자 그 집사님들 앞에서 북한 선교사 임명 예배를 한 번 더 해달라고 했다. 집사님들과 함께 황화로 유람을 가서 다시 임명 예배를 드렸다.  

 

청도한인교회 교유들과 황화 유람을 가서 찍은 사진이다. →





그때 정말 추웠다 식당에 들어가면  식당이 추웠고 여관에 들어가도 난방이 되지 않았다.  청도 한인 교회 교우들이 고역을 치렀다. 그 추운 방에서 순교선생팀 전원이 설교를 했다. 한 선생을 시키고 다른 선생을 안 시키면 당장 삐지고 난리가 난다. 그러다보니 그날 하루 동안 13번 예배를 드렸다  집사님들이 진짜 죽다 살았다 그런데도 다들 좋아했다. 그 후 6개월 후에 청도 한인교회 찾아 가니 두고 두고 외웠다. 그때 정말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훗날 두 번째 사역때  전화를 하니 연락을 하지 않는게 더 고맙다고 했다.


청도한인교회 교인들과 예배를 드리고  있는 순교 선생팀 북한 형제들이다. 정말 추운날 이었지만 집안에서도 예배 드리고 밖에서도 예배드리고 시도 때도 없이 예배를 드렸다.


청도 한인교회 집사님들이 돌아가자 이번에는 우리 가족들과 함께 또 예배를 드리자고 했다. 그래서 가족들을 데리고 가서 다시 예배를 드리고 꽃다발도 안겨주고 갈비도 사주었다.그리고 우리 가족들과 함께 개인별로 일일이 사진도 다 찍어 주었다.   

 


  

북한 선교사들로 세워진 최순교 선생팀 형제들과 우리가족들이 함께 찍은 사진이다. 꽃다발에 얼마나 욕심을 내는지 하나씩 해주고 사진을 찍었다. 참 다들 매번 열심히 좋아했다.

 

 


북한선교사 임명예배를 드린 후 순교선생팀 형제들이 나를 만날 때마다 말했다.
  “선교사님, 저희들을 파송시켜 주십쇼. 저희들은 예수님을 위해 목숨이라도 내놓겠습니다.”  
  이들은 파송해도 될 만큼 이미 충분히 준비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들을 파송한다면 또 다시 이들 중 어떤 사람은 체포될 것만 같아 망설이고 있었다. 단 한 명도 체포되지 않고 무사히 돌아올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한 후에 이들을 파송시키려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계속 강하게 요구했다. 
“선교사님
, 우린 이미 하나님 꺼지 우리 꺼가 아님다. 그렇게 목숨이 아까워서 갈 데도 못 가고 이러고 있다면 어떻게 북한 선교 함까? 이제껏 우리는 일하기 위해서 훈련을 받았지, 이렇게 계속 공부만 하자고 훈련 받은 거 아님다. 선교사님 빨리 보내 주시오! 한 명도 안 잡히고 다시 올 수 있슴다.” 
나는 이들의 단호한 태도를 보며 이들을 파송시키기로 마음먹고 파송 예배를 드렸다
. 그리고 간곡하게 부탁을 했다.
“지금 북한 보위부와 중국 공안국은 우리 사역장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고
, 우리 사역장을 찾아내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어요. 부디 안전에 각별히 유의하고 또 유의하세요. 학생들을 모집할 때 특히 조심하세요. 절대로 완전히 신원 파악이 안 된 학생의 요구대로 움직이면 안 됩니다. 1기 때 칼빈 선생과 요한 선생도 그러다가 납치되어 갔어요. 그러니 부디 조심 또 조심하세요. 한 걸음 걸어도 주님, 두 걸음 걸어도 주님, 모든 것을 주님을 의지하고 꼭 주님께 기도하고 일을 진행하세요.”
“선교사님
, 일없슴다. 너무 걱정 마십쇼. 주님이 있지 않슴까? 성경에서 무서워하는 건 믿음이 아니라구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슴다. 우린 무서워하지 않슴다.”
 이제 헤어지면 다시는 못 볼 수도 있었다. 북한 형제들은 무릎을 꿇고 서로 손을 잡고 울면서 기도했다.

 2001년 3월 13일,  이들은 연변(延邊)으로 떠나갔다. 열차에서 최효선 선생과 조봉희 선생이 체포되어 북한으로 끌려갔다. 나머지 신소광, 김기철, 김예진, 신재록, 박에녹, 이우열 선생들은 무사히 연변(延邊)까지 도착했다.  순교 선생은 연길(延吉)에 도착해서 조선족인 이우열 선생의 누나 집을 근거지로 삼아 활동하며 제자 선생들을 지휘했다. 나는 불안했다. 이미 많은 북한 선생들을 잃었기에 또 다시 이들을 잃고 싶지 않아  이들을 뒤따라 연변으로 올라갔다.  순교 선생과 북한 형제들은 내가 자기들의 숙소에 나타나지 펄쩍 뛰면서 난리를 부렸다. 
“ 선생님 서안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잡혀도 우리가 잡혀야지 선생님이 잡히면 안됩니다. 빨리 여기서 가세요 다시는 오지 마세요” 
나는 쫓기다 싶이 그들의 숙소를 떠났다. 
북한 형제들의 걱정은 괜한 것이 아니었다. 며칠 후 공안들이 야밤에 순교 선생  숙소로 들이닥쳤다. 순교 선생과 신소광 선생 그리고 조선족 선생이 체포되어 손에 수갑을 차고 끌려 갔다.  파출소로 끌려가면서 순교 선생이 말했다. 
“소광 선생
, 이제 우리는 건져 줄 사람도 없구, 공안에 잡혔다구 해서 돈 내고 빼줄 사람도 없어. 우리 이대로 모든 것을 안고 북한까지 가게 될 거 같아.”
소광 선생도  담담하게 말했다.  
“그런 거 같슴다. 그래두  하나님의 무슨 계획이 있는 거 아니겠슴까?”
“그래 소광 선생
, 무슨 하나님의 계획이 있겠지… 우리 한번 푸욱 믿구 가는 데까지 가봅시다 뭐!”
순교 선생은 오히려 즐겁게 말했다. 여느 때 같으면 멀리서 공안 차만 보아도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이상하게도 이제는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속으로부터 알 수 없는 평안이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공안들은 내가 있는 곳을 대라고 순교 선생과 소광 선생을 고문하기 시작했다. 공안들의 목적은 처음부터 나를 잡는 것이었다. 두 선생은 내가 있는 숙소의 위치와 핸드폰 번호도 다 알고 있었지만,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 다음날 두 선생은 흥안(興安) 간수소로 넘겨졌다. 다시 고문이 시작되었다. 이들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우리가 성경 공부를 한 것은 사실이구, 선교사님도 연길에 나왔지만 우리는 모름다! 선교사님은 전도하시느라 한 곳에 있지 않구 항상 여러 곳으로 옮겨 다님다. 우리로서는 어디 있는지 알 수도 없구, 설사 안다 해도 말할 수 없슴다.”
“이 새끼들아 말하라면 말하지 무슨 말들이 많아
!”
공안들은 전기 곤봉까지 들고 나왔다. 몇 차례 전기 충격에 몸이 비틀어진 순교 선생이   고함을 질렀다.
“야
! 니네들두 사람 아니냐? 그러문 니네두 스승이 있지 않았나? 한번 바꿔 놓구 생각해봐라 니네라문 이렇게 막 때린다구 스승을 팔아먹겠니? 우린 어차피 북한에 나가문 죽는다. 우리는 이래두 저래두 어차피 죽는다. 아무래두 죽는 거 우리 선생만은 살린다!”
 공안은 순교선생의 뺨을 휘갈기면서 더 이상 취조 하지 않았다. 40일 후 두 선생은  북한으로 이송되었다. 북한으로 떠나는 날 소광 선생은 순교 선생과 감옥에서 다시 만났다.   머리를 빡빡 깎이고 죄수복을 입고 두 선생은 눈물을 흘렸다.   
“순교 선생님
!”
“소광 선생
!” 
“우리 가는 것 같습니다.”
“그래
, 가는 것 같아.”
간수들이 두 선생을 용정
(龍井) 변방대로 이송하면서 말했다. 
“너희들 크게 죄 지은 것도 없는데
, 갔다가 또 오라. 잡히지 말라.”
두 선생은 용정 변방대 감방에 있다가 이 틀 후  북한 함경북도 회령시 보위부 집결소로 이송되었다.

다행히 김기철 선생과 박에녹  조선족 신재록 선생들은 체포되지 않았다. 학생모집 하러 나갔다 화를 면한 것이다. 세 명의 선생들이 무사히 북한 형제들을 모집해 서안으로 내려오자 많은 북한 선생들이 서안역으로 마중나가 이들을 축하하고 격려해 주었다. 이 선생들에 의해 4기 사역이 시작되었다. 

소광 선생과 순교 선생은  30명의 탈북자들과 함께 북한으로 이송되었다. 중국 군인들은 삼합(三合)에서 함경북도 회령 세관으로 연결되는 국경 교두로 이들을 북한 보위부 군인들에게 인계했다. 북한 보위부 군인들이 살벌하게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야
! 야 ! 이 간나 새끼들아 한 줄로 맞추어 서라!”
“빨랑빨랑 안 움직여
! 죽구 싶어!”
 군인들은 조금이라도 굼뜬 사람들은 사정없이 때렸다. 총탁으로 내리치고 군홧발로 짓뭉갰다. 겁에 질린 사람들이 급히 한 줄로 서자 군인들이 다시 소리를 질렀다.
“차례로 자기 이름들 하구 살던 주소들을 대라
! 여긴 중국이 아니다! 허튼 이름들을 대지 말고 진짜 이름과 주소만 대라. 거짓말 하면 죄가 더 가중된다!”
이들 속에는 노인들과 여자들
, 아이들도 있었다. 보위부 군인들은 이름을 다 받아 적은 후 다시 소리쳤다.
“주머니 안에 있는 것들은 모조리 꺼내서 앞으로 던져라
!”
“신발 끈과 허리끈도 모조리 풀어서 앞으로 던져라
!”
신발 끈과 허리끈이 없으면 뛸 수가 없으니 도망치지 못하게 하려는 조치인 것이다

잠시 후 의사들이 들어와서 줄줄 흘러내리는 바지 허리춤을 붙잡고 한 줄로 서있는 사람들에게 주사를 놓았다. 에이즈나 전염병들을 예방하는 주사였다. 주사를 맞을 동안 앞뒤로 총을 든 군인들이 지켜서 있었다. 주사를 다 맞자 군인들은 이들을 보위부 감옥까지 행진시켰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행진하고 있는 탈북자들을 구경했다.
“야, 이 새끼들아! 대가리들 까라!”
군인들이 계속해서 소리를 질렀다. 회령 보위부 감옥에 도착하자 군인들은 모든 사람들을 의자에 앉혔다. 갑자기 한 무리의 보위부 군인들이 뛰어나와 잡혀온 탈북자들을 총탁으로 때리고 군화발로 사정없이 밟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아우성치며 쓰러지고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야
, 이 새끼들 소리쳐! 한 번 더 소리쳐봐라!”
군인들은 아파서 소리치는 사람들의 입에 군홧발을 밀어 넣으면서 기력이 떨어질 때까지 때렸다.  
“한 줄로 서
!”
“모두 옷들을 벗어라
!”
공포에 질린 사람들은 부끄러운 것도 모르고 서둘러 옷을 모조리 벗었다. 조금이라도 굼뜨면 다시 사정없이 총탁이 날아오고 군홧발이 날아왔다. 
보위부 군인들이 탈북자들이 벗어놓은 옷들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옷 솔기까지 세밀히 수색해서는 돈이나 귀중품이 나오면 회수했다. 옷 수색이 끝나자 다시 보위부 군인들이 소리를 질렀다.
“하나 둘 크게 소리치면서 다 같이 뽐푸 운동 시작한다
! 시작!”
사람들은 구령에 맞추어서 앉았다 일어섰다 하는 기합을 받았다. 이 운동을 두 시간 정도 시키면 남자들이 항문 속이나, 여인들의 질 속에 숨겨 넣었던 돈이 흘러나온다. 이렇게 기합 받다가 돈이 나오면 그 사람은 거의 반 주검이 될 정도로 다시 맞았다. 그래도  사람들은 돈을 내놓지 않았다. 가지고 있는 돈마저도 빼앗기면 보위부 감옥에서 무사히 나갔다 해도 굶어죽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기합이 끝나고 한 명씩 취조가 시작되었다.
순교 선생은 산 속에서 나무 끌어내리는 일을 하다가 왔다고 우겨 간신히 살아남았다. 

순교 선생은 북한에서 몇 달 간 감옥 살이를 하다가 다시 중국으로 탈북했다. 순교 선생이 중국으로 왔을 때에는 우리 사역장 전원이 서안에서 체포되어 북한으로 끌려 나갔고 나는 한국으로 추방된 후였다.  중국으로 돌아온 순교 선생은 영양실조에 걸려 온 몸이 풍선옷을 입은 사람처럼 부풀어 있었다. 이때 영양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면 붓기가 빠지면서 탈진해서 죽게 된다. 나는 서둘러 중국 감옥에서 나온 조선족 선생들을 중심으로 연변에 사역장을 만들고 순교 선생을 피신시키고 몸을 보신하게 했다. 그 후 나는 순교 선생을 한국으로 데려왔다. 

  한국에 온 후 순교 선생은 대구신학대학교에서 신학을 시작했다. 순교선생의 은사는 곧 알려 졌다. 채풀 시간 순교 선생의 설교를 듣던 신학생들이 통곡하면서 울고 주님을 찬양하는 사건이 터졌다. 그때부터 순교 선생은 알려지기 시작했고 한국 교회 여기저기로 다니면서 강의하기 시작했다.


 최순교 선생은 내가 설립한 열방빛 선교회에 소속되어 활동했다. 그때 함께 활동했던 김성근 민선주 배철범 이빌립 선생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뒷줄 가운데 있는 사람이 최순교 선생이다 현재 최순교 선생은  총신대학교 3학년까지 공부하였고 캐나다로 유학을 떠나 하나님께 귀히 쓰임 받는 선교사가 되기 위해 영어 공부에 매진하고 있다.

  

최순교 제자들

김기철

신소광

신재록

김예진

박에녹

조봉희

최효선

이우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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