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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광선교사
관리자 2018-05-21 16:14:26
← 중국 비밀 미션홈에서 탈북자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있는 최광 선교사

중국에서 추방된 지 6년이 지난 2008년에야 나는 다시 중국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동안 중국은 많이 달라져있었다.
전과는 달리 공항에는 군인들이 경계를 했고, 신발까지 검사대를 통과시켰다. 전철역 출구마다 검문검색을 했다. 옛날 서안 사역 때 도와주셨던 지인들을 다시 만나 북한 선교를 다시 하고 싶다고 말하자 사람들마다 손사래를 쳤고, 어떤 사람은 비웃기까지 했다.

“이제는 불가능해요. 연길에서는 아무 이유도 없이 한국사람 72명을 체포해서 조사했어요. 그리고 이제는 겨울이 되어도 탈북자들이 넘어오지 않아요. 왜 그런지 아세요? 지금 중국이 올림픽을 준비 하는데다가 티베트 독립 운동 사건이 터져서 단속들이 얼마나 심한지 몰라요. 안 돼요. 옛날과는 세상이 많이 달라졌어요. 포기하세요.”

조선족 사역자들도 똑같은 말을 했다. 이제 탈북자 사역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중국의 사회 환경이 많이 변화되었다는 것이다. 정말 그랬다. 내가 추방되어 한국에 있는 동안 중국의 북한 선교 현장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처음 아무 연고도 없이 중국으로 탈북해 오던 1990년대 탈북자들의 생존 환경은 비참했다. 아는 사람도 없었고 중국어도 몰랐다. 생존에 필요한 그 어떤 일도 할 수 없었다. 다행히 한국 선교사들을 만나게 되면 그들이 제공하는 생존 시설에 절대적으로 의지해야만 했다. 대부분의 탈북자들은 원해서가 아니라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교 활동에 흡수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탈북자들의 한국 입국이 선택 가능한 일 중의 하나가 되었다. 2만 명 이상의 탈북자들이 남한으로 입국했고 그 숫자도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었다. 많은 탈북자들은 남한 내에 친척, 가족, 친구 등등의 인맥을 가진 사람들이 되어 갔다. 이 인맥은 곧바로 중국에 있는 탈북자들에게도 경제력을 제공 했다. 거기에다 유럽과 미국, 일본과 같은 선진국에서도 탈북자들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며 받아주기 시작했다.

한국으로 오지 못하고 중국에 다년간 체류하던 탈북자들도 빠르게 중국 사회에 적응해 가고 있었다. 남자들은 생존을 충분히 보장할 만한 일자리를 얻기 시작했고, 여성들도 결혼이나 사회 활동을 통해서 중국 사회에 적응했다. 이제는 탈북자들도 외모만 봐서는 거의 구분이 되지 않았다. 이러한 변화는 중국 내 북한 선교 현장의 상황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탈북자들은 아무도 지하 사역장에 숨어서 기약 없이 성경 공부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거기에다 중국 전역에서 삼엄한 검문검색이 진행되자 공포에 질린 탈북자들은 철저히 지하로 들어가 버렸다. 아무리 중국 전 지역을 돌아다녀도 탈북자들의 그림자도 구경하기 힘들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다시 시작해야 할지 캄캄하기만 했다.

“주님, 북한 출신 북한 선교사는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옛날처럼 저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사역을 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중국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탈북자들을 찾아 다녔다. 북한 사람들과 인연이 있을 만한 사람이 있으면 어디건 찾아가서 물었다. 아무도 몰랐다. 겨울이 오자 여름내 그 많았던 동물들이 땅 속으로 숨어 버린 것처럼 어디에 가도 탈북자들을 만날 수가 없었다. 어떤 때는 탈북자가 분명한데 절대로 자기는 아니라며 꽁꽁 숨어 버리기도 했다. 은밀한 그림자를 찾아다니는 것 같았다. 그림자는 말없이 우리를 지켜보다가 가까이 다가가면 조용히 물러나 사라져 버렸다. 6개월을 찾아 다녔지만 한 명의 탈북자도 만날 수가 없었다.
← 북탈북자들과 함께 열차를 타고 먼 길을 가고 있는 최광 선교사
나는 방법을 바꾸기로 했다. 여태까지는 선교사들이나 조선족 전도사들을 찾아서 북한 사람들의 행방을 물으면서 다녔지만 이제는 옛날에 서안에서 사역할 때 우리를 추격해 왔던 북한 보위부 사람들의 방법을 사용해 보기로 했다. 우선 조선족 마을이나 가장 외진 곳에 있는 탄광 마을로 무작정 찾아가 보기로 했다.

기차를 타고 계서시라고 하는 작은 도시를 찾아갔다. 일행이 있으면 숨어 있는 탈북자들이 불안해 할 것 같아 혼자서 떠났다. 기차는 12시간을 달려 새벽 5시에 도착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4월이었지만 북쪽 지방이기에 한겨울처럼 추웠다. 이른 아침이라 식당도 문을 열지 않아 목욕탕에 들어가 목욕을 하면서 기다렸다.

“주님 그저 정처 없이 발이 가는 대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 부족한 종이 대책 없고 부족한 건 주님이 더 잘 아시죠? 그러니 주님이 이 발을 인도해 주십시오. 저는 그저 걸어 다녀 보겠습니다.”

목욕을 하고 나오니 버스가 다니기 시작했다. 아무 버스나 무작정 올라탔다. 연고가 없으니 탈북자들도 어디론가 도망을 갔다면 이런 식으로 도망을 갔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종점에 내렸다. 작은 시내를 정처 없이 이리저리 걸어 다녔다. 문득 길가에 한글로 대동강 냉면집이라고 쓴 간판이 보였다.

‘이곳에도 조선족이 사는구나.’

거기 들어가서 이 지역에 조선족들이 사는 곳이 어딘지 물었다. 두 곳 정도 알려 주었다. 세상의 제일 끝이라고 생각했던 그곳은 끝이 아니었다. 다시 버스를 타고 영평이라는 곳을 찾아갔다. 조금만 더 가면 세상의 끝이 나와서 아래로 뚝 떨어질 것 같은 외지고 외진 곳이었다. 조선족 교회를 찾아갔다. 금방 수요예배를 마치고 사모님이 마을 사람들 몇몇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전도사님은 목단강에 있는 한족 지도자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러 가고 없었다. 사모님이 이 교회에 북한 사람 한 명이 출석하고 있다고 했다.

‘찾았다! 드디어 찾았다!’

오랫동안 캄캄한 숲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작은 불빛을 만난 것 같았다. 희미한 안개 속을 향해 던진 돌이 정통으로 과녁을 맞혔다는 기쁨으로 심장이 마구 뛰었다.

‘그래 맞구나. 탈북자들도 역시 이런 방법으로 도망을 다니고 있었구나! 내가 탈북자의 심정이 되어 보니 그들이 가는 길이 보이기 시작하는구나.’

그 사모님으로부터 밀산이라고 하는 곳에 탈북자들을 많이 돌보는 목사님에 대해서 소개받았다. 다시 오겠다고 약속하고 2시간을 버스를 타고 달려갔다. 도대체 이 중국이라는 나라는 어디가 끝인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나무와 짐승들만 사는 깊고 깊은 산속에 조선족들이 사는 동네가 몇 개 있었고 조선족 교회도 몇 개 있었다. 목사님을 만나 북한 사람들을 찾았으나, 다 떠나고 한 명도 없다고 했다. 다른 동네로 갔다. 이미 저녁이라 그곳 교회는 문을 닫고 사람이 없었다. 교회 옆에 사시는 할머니 집사님께 북한 사람들이 이곳에 얼마나 있냐고 물었다.

“북한 사람들? 여기 없어 글쎄 몇 년 전까지는 많이 있었어. 교회서두 많이 돌봐 줬지. 그러다가 공안에 벌금 많이 했어. 그 후에는 탈북자들 못 도와줘. 그냥 밥이나 먹이구 돌려보냈어. 공안들이 자꾸만 오니까 그 사람들두 불안해서 여기서 살지 못해 어떻게 그 사람들이 여기 있어?”

할머니 집사님은 다른 지역으로 떠나려고 하는 나를 만류했다.

“가지마. 가 봐야 쓸데없어. 어디 가나 마찬가지야.”

허전한 마음으로 돌아서는데 눈물이 났다. 이 세상의 끝자락도 탈북자들에게는 허락되지 않는가? 여기에서까지 쫓겨 가야 한다면 그들은 과연 어디로 갔을까? 아무리 상상해도 더 이상 탈북자들이 갈 만한 곳이 짐작되지 않았다. 밤차를 타고 다시 영평으로 돌아가 전도사님을 만났다. 영평 조선족 교회에서 하룻밤을 쉬면서 전도사님에게 나의 절절한 마음을 쏟아놓았다. 오랫동안 내 이야기를 듣던 전도사님은 깊은 곳에 숨겨 놓은 보물을 꺼내듯이 말했다

“내일 아침에 북한 자매 4명을 소개해 드릴게요.”
“형제분들은 없나요?”
“북한 형제들이 여기서 어떻게 살아요? 그나마 자매들은 공안들이 어느 정도 눈을 감아 주니까 사는 거지, 형제들은 불가능해요.”

중국 공안들도 북한 자매들을 잡아가는 일을 꺼려했다. 일단 한족 남편들이 있는 데다 자매들이 낳은 아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잡아가는 순간도 몹시 처절했다. 아이들이 실신하고 남편들이 길길이 날뛴다. 그러다 보니 북한 자매들은 애써 찾으려 하지 않았다. 자매들이라도 만날 수 있다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다음날 4명의 북한 자매들을 만났다. 최경옥, 김영옥, 박순실, 조순덕 씨였다. 모두가 다 장애인이거나 가난한 한족 남편들과 살고 있었고 아이들이 있었다. 자매들은 가정과 아이들이 있기에 사역장으로 데리고 가서 성경 공부를 할 수가 없었다. 자매들이 사는 데를 가 보니 사는 형편이 너무나도 열악했다. 보지 않았다면 몰라도 한 번 본 이상 도와주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처절했다.

나는 자매들과 함께 말씀을 나누고 예배를 드렸다. 자매들에게 성경 말씀을 암송하게 했다. 성경 암송을 한 것만큼 그에 상응하는 보상으로 돈을 주었다. 자매들은 돈을 벌 수 있는 길이 생겼다고 좋아했다.

또 다시 정처 없이 떠났다. 지금까지 나는 탈북자들을 도와주는 신분으로 탈북자들을 찾아 다녔기에 나의 눈에는 탈북자들이 보이지 않았다. 탈북자들을 만났다고 해도, 내가 만난 것은 그들의 외면적인 가난함과 무지함과 절박함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는 도와주는 신분이 아니라 탈북자들처럼 도망 다니는 마음으로 이 길을 떠났다.

갈 곳도, 있을 곳도 없는 사람들, 아무런 보호도 연고도 없는 사람들. 그래서 안전한 곳, 공안들과 북한 보위부가 결코 올 수 없는 곳을 찾아야 하는 사람들. 말도 통하지 않고 모든 것이 낯선 남의 나라. 거기다가 어떤 식으로라도 돈을 벌어서 북한에서 굶어 죽어 가고 있는 가족들에게 보내야만 하는 절박한 마음. 첩첩산중, 깊은 산속을 헤치고 또 헤치면서 길이 없는 곳에서 살 길을 찾아야만 하는 탈북자들의 마음을 나는 이 길을 걸으면서 느낄 수 있었다. 탈북자와 하나가 된다는 것은 탈북자와 같은 처지, 같은 마음이 되는 것이었다. 주님이 왜 나에게 이런 길을 가게 하시는지 이 도망의 길을 걸으면서 비로소 깨달았다. 눈앞에 탈북자들이 그렇게 많을 때는 만나지 못했던 진짜 탈북자들의 마음을 이 길에서 만났다.

‘내가 탈북자들을 만났구나. 내 눈에 이제야 탈북자가 보이는구나.’

내 속에 탈북자의 마음이 들어오자 하염없이 눈물만 나왔다. 이 눈물 속에서 나는 탈북자들의 마음속에서 그들과 함께 울고 계시는 주님의 마음을 만졌다.

‘오, 주님, 오랫동안 찾던 것을 만났는데 왜 이렇게 슬픕니까? 왜 이렇게 고통스럽나요?’

서안에서 사역할 때 권능 선생이 떠나보내는 탈북자들 때문에 왜 그렇게 마음 아파했는지 나는 이 길에서 느끼고 이해하게 되었다. 이 길은 나에게 탈북자들이라고 하는 늘 내 옆에 있었던 전혀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여정이었다. 이 길은 나에게 탈북자들의 마음뿐만 아니라 탈북자들이 있는 비밀의 장소들을 열어 주었다. 드디어 미로 같은 세계의 문이 열렸다. 이때부터 나는 탈북자들을 쉽게 만날 수가 있었다. 탈북자의 심정으로 도망가는 곳곳에서 나는 탈북자들을 만났다. 이렇게 두 번째 사역이 시작되었다.
← 북탈북자들과 함께 2차 북한 탈북자 통독 사역을 시작한 후 북한 형제 자매들과 함께 사진을 찍은 최광 선교사
     
     6. 석자실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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