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역이야기

1기 · 중국 1차 사역

방무디

중국 1차 사역 (1기)

소속 / 사역기수
중국 1차 사역 (1기)
출신 / 배경
함경북도 온성군 창평리 출신. 북한에서 10년간 군사복무 후 탈북.
주요 사역 지역
옌볜 조선족 자치주, 백두산(중국명 창바이산), 지린성 퉁화시 지안현, 베이징 등
후속 기록
베이징 고아원 사역 제안을 받고 떠난 뒤 소식이 끊겼으며, 훗날 북한 감옥에서 목격되었다는 증언이 전해짐.

1기 · 사역 기록

사역의 발자취

1기 사역 초기부터 함께한 방무디 선생

방무디 선생은 1998년 8월, 내가 북한 사역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함께했던 선생이다. 그는 함경북도 온성군 창평리 사람으로, 북한에서 10년 동안 군사복무를 했다. 제대 후 고향으로 돌아와 결혼했고 딸을 낳았다. 딸이 세 살 되던 해 양식이 없어 아내는 집을 떠났고, 방무디 선생은 딸을 부모님께 맡긴 채 양식을 구하려고 중국으로 탈북했다.

방무디 선생은 딸을 무척 사랑했다. 가족 이야기가 나오거나 가족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그 순한 입을 꾹 다물고 벙어리가 되었다. 마음속 깊은 고통은 때로 표현하지 않을 때 더 잘 느껴진다는 것을 나는 무디 선생을 통해 알게 되었다.

“무디”라는 이름을 받기까지

나는 사역을 시작하면서 북한 형제들의 이름을 성경적인 이름으로 바꾸어 주었다. 북한 형제들이 성경공부를 하다가 체포되어 강제 북송되면 매우 위험했다. 북한 보위부는 성경공부를 하다 잡혀온 사람들을 예외 없이 정치범수용소로 보낸다. 이름을 바꾸는 것은 이들의 안전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었고, 동시에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나는 방무디 선생에게 “무디”라는 이름을 권했다. 19세기 미국의 큰 부흥사 디엘 무디를 설명하자, 방무디 선생은 펄펄 뛰며 반대했다.

“무디? 무디? 무신 말이 그런 말이 있슴까? 그거는 무신 소림까?”

“그게 한마디로 말하자문 미국 놈 이름이 아니오? 아니 사람을 어떻게 보구 그런 말을 함부로 함까? 이제부터 내를 미국 놈 만들려고 그럼까? 안 됨다! 절대 안 됨다!”

“그게 글케 좋다문 당신이나 가지오! 나는 안 되꾸마!”

단기 사역 이후 다시 돌아오게 된 길

처음 북한 형제들을 찾아왔을 때 나는 20일간의 단기선교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떠난다고 하자 북한 형제들은 섭섭해했다. 쉽게 마음을 열지 않고 무뚝뚝하기만 하던 사람들의 반응이라 기분이 좋았다. 매일의 삶이 전쟁터 같은 긴장이었지만 어느새 나는 북한 형제들과 정이 들어 있었다.

나는 그냥 떠나기가 미안해 “주님께서 허락하시면 꼭 다시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대학원 마지막 학기 개강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이유 없이 온몸이 아팠고, 마음의 기쁨과 평안도 사라졌다. 박베드로 선교사님께 하소연하자 선교사님은 “1년 정도 휴학을 하고 북한 선교를 하는 것이 어때요?”라고 권했다. 이상하게도 나는 나도 모르게 “예”라고 대답했고, 곧바로 중국으로 가는 비행기 표를 끊었다.

비행기 표를 사자 아프던 몸과 곤고하던 마음이 거짓말처럼 나았다. 마음에 기쁨이 차올랐다. “그래, 이제부터 북한 선교를 하는 거야.” 왜 그런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나는 행복했고 즐거웠다.

“우린 선생이 좋슴다”

내가 다시 북한 형제들에게 돌아가자 모두가 매우 반가워했다. 오랫동안 사귀어 온 친구들을 만나는 것처럼 친근하고 편안했다. 특히 방무디 형제가 좋아했다. 내가 다시 돌아오게 된 사연을 듣던 그는 갑자기 신이 나서 말했다.

방무디 형제는 “우리가 선교사님 다시 오게 해 달라고 기도했는데, 기도라는 것이 응답되긴 된다”며 신기해했다. 그는 내가 다시 돌아온 것을 외계에서 온 사람을 보듯 만져보고 좋아했다.

내가 “나는 전도사일 뿐이고 목사 안수도 받지 않았고, 선교사로 인정받을 수도 없고, 돈도 없는데 왜 나를 다시 오라고 기도했느냐”고 묻자 무디 형제는 웃으며 대답했다. “우린 선생이 좋슴다. 우리와 같이 살아주니까. 그리고 선생님은 우리처럼 돈이 없잽니까? 그러니까 우리와 똑같이 먹고 똑같이 한자리에서 자니까 좋슴다. 믿을 수가 있잽니까.”

무디 형제는 앞으로 불룩하게 나온 내 배와 자기 배가 비슷해서 좋다고 했다. 그는 식성이 좋았고, 대충 먹어도 보통 사람의 배는 먹는 듯했다. 어느 날 점심을 먹던 무디 형제가 “배 싸움”을 해보자고 제안했다. 북한 형제들은 좋은 구경이라며 응원했다. 거실에서 나는 무디 형제와 서로의 배를 부딪치며 장난을 쳤다. 그는 튕겨 나가면서도 “아-압” 소리를 지르며 다시 덤벼들었고, 결국 씨름으로까지 번졌다. 형제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신나게 응원했다.

백두산 기도모임과 천지 앞의 감격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북한선교팀과 함께 백두산 기도모임에 갔을 때였다. 한기총에서 오신 분들은 연세가 많아 지프차를 타고 올라갔고, 우리에게는 걸어서 올라오라고 했다. 무디 선생은 눈을 크게 뜨고 화를 냈지만, 단체로 백두산 티셔츠를 사서 입자 언제 그랬느냐는 듯 좋아서 펄쩍펄쩍 뛰었다.

방무디 선생은 백두산 천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하늘을 다 얻은 사람처럼 기뻐했다. 북한에서는 백두산이 귀족이나 특별한 국가 표창을 받은 사람, 특별히 허가받은 사람만 갈 수 있는 성지 같은 곳이었다. 김일성 초상화에서만 보던 것과 같은 배경 앞에 서게 되자 방무디 선생과 다른 북한 선생들은 크게 흥분했다.

북한 사람들은 김일성과 김정일을 싫어하면서도 그들의 옷차림과 행동은 잘 따라 했다. 방무디 선생도 바로 그 배경과 자세로 사진을 찍고 싶어 했다.

사역장 훈련과 가장 큰 반발

본격적으로 사역을 시작하면서 나는 질서 없고 산만하게 살아가던 북한 형제들의 생활 방식을 끝내기로 했다. 일과를 정하고, 술과 담배를 금지했으며, 아침 일찍 기상시켜 성경 통독을 시작하고 말씀을 암송하게 했다. 하루 두 시간씩 기도모임도 가졌다. 인정이나 사정을 봐주지 않고 모든 일과를 집행했다.

처음에는 좋아 보이던 사람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자 가장 황당해하고 반발한 사람이 방무디 선생이었다. 그는 “북조선에서 군대 생활할 때는 힘들고 배도 고팠지만 그래도 담배는 피우게 했다”며 고함을 질렀다. 그는 하루 종일 성경만 읽게 하고 담배도 못 피우게 하며 술도 못 먹게 하니 사람이 살겠느냐고 반발했다.

방무디 선생은 정말 말을 듣지 않았다. 통독 시간에는 늘 천장만 바라보고 앉아 있었고, 다른 사람들이 잠깐씩 졸 때면 코를 골며 잠들어 버렸다. 그런데 그는 교활하거나 악한 사람이 아니었다. 깊은 산속의 마음 좋은 아저씨처럼 순했고, 신기하게도 거짓말을 잘하지 못했다. 자기 감정을 꾸밈없이 솔직하게 말했고, 그래서 잘 속기도 했다. 식사 때마다 “성경 통독이 아무리 힘들어도 이밥 때문에 참는다”고 말하곤 했다.

“북조선에서 군대 생활할 때는 썩어질 정도로 힘들고 배도 고팠지만 그래도 담배는 피우게 했담 말이여! 그런데 이제는 중국에서 이 도깨비 같은 책만 하루 종일 읽게 하고, 담배도 못 피우게 하고, 술도 못 먹게 하니 사람이 살갔시여?”

미국에 대한 믿음과 순박한 확신

무디 형제는 어느 날 나에게 미국 사람을 보았느냐고 물었다. 내가 보았다고 하자 그는 놀라고 기뻐했다. 그는 북한이 미국과 전쟁하면 단숨에 이길 것이라고 진지하게 말했다. 마치 성스러운 낭독을 하듯 확신에 차 있었다.

무디 선생은 천성적으로 거짓말을 잘 몰랐기에 북한 정부가 선전한 것을 그대로 믿고 있었다. 나는 웃음이 나왔지만 그의 진지한 태도 때문에 “압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형제들을 둘러보며 “거보라, 선교사님도 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아이 같은 마음이 표현하는 순수함이었다.

퉁화시 지안현 고구려 유적지에서

친구인 이상락 목사님이 내가 북한 선교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사역장을 찾아왔다. 우리는 이상락 목사님과 함께 지린성 퉁화시 지안현에 있는 고구려 유적지로 갔다. 형제들은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구경했다. 무디 선생도 몹시 좋아했다.

넓은 잔디밭을 만나자 무디 선생은 체조 선수처럼 몇 번이나 연속 공중회전을 했다. 인민군 10년 복무 동안 열심히 연마한 기술이라고 했다. 이상락 목사님이 경탄하자 그는 우쭐하며 사격 경기를 하자고 했다. 목사님은 정조준해 10발 중 8발을 명중시켰다. 무디 선생은 조준도 별로 하지 않고 한 손으로 대충 쏘아댔지만 10발을 모두 명중시켰다.

무디 선생은 “남조선 사람들은 군대 복무를 3년밖에 안 하지만 우리는 10년이나 한다”며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어수룩해 보이면서도 재미있고 순박한 무디 형제를 다른 형제들도 좋아했다.

말을 바꾸는 훈련

북한 형제들의 언어는 매우 거칠었다. 식사가 끝나고 냉면이 조금 남으면 “우리 다 함께 냉면을 타도하자”라고 말할 정도였다. 상대를 비하하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전투적이고 공격적인 언어가 일상화되어 있었고,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나는 이들의 말버릇을 바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저녁 통독이 끝난 후 형제들에게 서로 경어를 사용하고, 부를 때에는 “형제님”이라고 부르라고 지시했다. 서로 존댓말을 쓰지 않으면 식사 당번을 시키겠다고 했다.

가장 힘들어한 사람이 방무디 형제였다. 사역장에서 나이가 제일 많았기 때문에 그는 나이 어린 형제들에게 존댓말을 써야 했다. 특히 가장 어린 권능 형제를 향해 “권능 형제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견디기 힘들어했다. 그는 얼굴이 빨개져 도망치기도 하고, 어린아이처럼 울면서 “못해요, 안 해요”라고 버텼다.

나는 인정사정 봐주지 않았다. 그가 소중했기 때문에 반드시 변화시켜야 했다. 두 달 정도 말을 고치느라 애를 먹었지만, 힘들게라도 말 문화를 바꾸어 놓았더니 모두가 좋아했다. 천성적으로 착한 마음을 가진 무디 형제가 아름답고 고상한 언어를 사용하자 정말 사람이 멋있어졌다. 말을 통해 가장 극적으로 이미지가 변한 사람이 무디 형제였다.

“아, 우리 북조선에는 이케 말하는 법이 없시여. 아들보다 좀 큰 새끼 보고 ‘형제님’ 하고, 또 아들 같은 시키가 ‘형제님’ 함까? 못함다. 이것만은 썩어져두 못함다!”

“선교사님! 난 못해여! 못해여! 안 해! 안 해! 아이고 하나님, 저 선교사님 좀 말려 주십쇼.”

“돈은 하나님이 주십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자 무디 형제도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숲에서만 살던 곰에게 공부를 시키는 것처럼 힘들었지만, 은혜를 체험하고 나니 이방 저방으로 뛰어다니며 형제들을 선동했다. “모두 다 항일유격대식으로 공부합시다!”라고 외쳤다. 정직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으면 정말 단순하고 깊게 믿는 것 같았다.

한국에서 선병문 목사님이 사역장에 오셔서 북한 선생들과 함께 점심을 드시며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목사님이 무디 선생에게 “돈은 누가 주나?”라고 물었다. 무디 선생은 덤덤하게 “하나님이 주십니다”라고 대답했다. 목사님이 여러 번 다시 물어도 대답은 같았다. 목사님이 내게도 “최 선교사 돈은 어떻게 하나, 하나님이 주시나?”라고 묻자 나도 “예,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우리는 걱정하지 않았지만 목사님이 오히려 더 많이 걱정하면서 돌아가셨다.

연변 파송과 베이징 고아원 사역 제안

학생 모집을 위해 옌볜 조선족 자치주로 파송된 방무디 선생은 옌지시 서시장에 있는 전화방 아저씨 집에서 살며 활동했다. 사역장에 오기 전부터 잘 알고 지내던 분이었다. 무디 선생이 그 아저씨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했는지, 전화방 아저씨는 그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처럼 따르고 순종하기 시작했다. 무디 선생의 사역과 활동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전 재산인 전화방의 모든 것을 허락 없이 사용해도 좋다고 할 정도였다.

전화방 아저씨는 무디 선생에게 베이징에서 고아원 사역을 하는 한국 장로님 한 분을 소개해 주었다. 장로님은 무디 선생이 성경 100독을 했고 지금 북한 선교를 위해 활동한다는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함께 일하자고 제안했다. 조건은 북한에 있는 딸을 데려다 주고, 중국 신분증을 만들어 주며, 아름다운 여인을 찾아 배필로 만들어 주겠다는 것이었다. 무디 선생은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예배 인도만 해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무디 선생에게는 정말 거절하기 힘든 조건이었다. 그는 내게 많이 미안해하면서 베이징으로 갔다. 나는 떠나가는 그에게 어디를 가든 잊지 않겠다고 했다. 그가 하루빨리 아내와 딸을 만나 행복하기를 주님께 기도했다.

마지막으로 들려온 소식

그 후 나는 무디 선생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몇 년이 지난 뒤, 북한으로 체포되어 갔다가 돌아온 우리 형제들로부터 무디 선생을 북한 감옥에서 만났다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정말 많이 울었다.

방무디 선생은 거칠고 서툴렀지만 마음이 순한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무디”라는 이름조차 미국 사람 이름이라며 거부했지만, 결국 하나님 안에서 변화되기 시작했다. 그는 거친 말투를 고치고, 성경을 배우고, 단순하고 정직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 되어 갔다. 그의 마지막 소식은 아프고 무거웠지만, 나는 그가 우리와 함께했던 시간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분명히 만났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