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역이야기

1기 · 중국 1차 사역

최바울

중국 1차 사역 (1기)

소속 / 사역기수
중국 1차 사역 (1기)
현재 사역
한민족사랑교회 담임목사/ 탈북민·북한선교 사역

1기 · 사역 기록

사역의 발자취

제남 사역장에 온 특수부대 출신 탈북자

처음 지린성 지린시에서 사역을 시작했다가 산둥성 지난시로 이사 올 때, 우리와 함께하던 조선족 강길호 형제와 헤어지게 되었다. 사역장에 통역을 담당할 조선족이 없어졌고, 위급한 상황이 생겨도 대처할 능력이 없는 위험한 상태가 되었다. 중국 조선족 형제를 구하려고 백방으로 알아보았지만, 함께 성경공부를 하면서 우리를 도와줄 마땅한 사람은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우리 사역장의 형편을 알고 있던 주광호 선생이 조선족 전요셉 형제를 데리고 지난에 있는 우리 사역장을 찾아왔다. 그때 최바울 선생도 함께 왔다. 그는 자기 이름을 최철호라고 소개했다. 마흔 정도밖에 안 되어 보였고 머리가 많이 벗겨져 있었다. 최철호 형제도 주광호 선생처럼 북한군 특수부대 출신이었다. 군대 문화가 강한 북한 사회에서 특수부대 출신이라는 것은 대단히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최철호 형제는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자신을 소개했다.

“한국에서 온 선생! 나는 보통 사람들하고 다르오. 나는 군대에 있을 때 특수부대에서 복무했구, 평양에 있는 대학도 다녔소. 우리 북조선에서 일반 사람은 죽을 때까지 평양이라는 데는 문턱두 못 가보는 사람들이 많다는 거 아시오?”

최철호에서 최바울로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요? 여기 사역장에 들어오면 이름부터 바꿔야 합니다. 철호 형제는 뭐라고 바꾸면 좋을까요?” 그는 “이름은 왜 바꿉니까?” 하고 물었다. 나는 이곳에서는 서로 본명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내가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의 이름으로 바꾸자고 하자, 최철호 형제는 배를 내밀며 목청을 돋우어 말했다. “그러면 이왕 이름을 달 바에야 성경에서 제일 높은 사람 걸루 하나 해 주십시오!” 나는 사도 바울 이야기를 해 주었다. “성경에 보면 사도 바울이라는 분이 나와요. 그분도 철호 형제처럼 키도 작고 머리도 좋고 공부도 아주 많이 한 사람이에요. 비슷한 점이 많아요.” 머리가 벗겨졌다는 말은 기분 나빠할까 봐 다르게 표현했다.

최철호 형제는 바울이라는 사람이 머리가 좋다는 말을 듣자 반색했다. “그러문 그걸루 합시다 뭐.” 그는 자기를 인정해 준다고 좋아했다. 이렇게 해서 최철호 형제는 최바울 형제가 되었다. 내가 성경책을 내밀며 이제부터 이 책으로 공부하라고 하자, 그는 성경책의 두께부터 가늠해 보더니 말했다. “한국 선생, 나는 공부 많이 해본 사람이오. 이 정도 책은 아마 한 주일이면 뗄 것 같습니다!” 나는 “6개월을 줄 테니까 한번 해 보십시오”라고 대꾸했다. 그는 두고 보라는 듯 의기양양해서 나갔다.

특수부대 10년, 평양 엘리트의 무너진 현실

최바울 선생은 북한군과 남한군이 정면으로 대치하고 있는 군사분계선의 특수부대에서 10년 동안 군 복무를 했다. 온갖 특수훈련을 다 받았다. 그가 복무한 북한군 특수부대는 북한에서도 집안 성분이 특별히 좋은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는 군대였다. 제대하면 좋은 대학에도 우선적으로 배치받을 수 있었고 곧바로 간부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는 제대 후 북한군 수산총국에서 청년 조직을 책임진 간부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부러울 것이 없어 보였지만 젊은 시절 최바울 선생의 야망은 컸다. 더 큰 간부가 되기 위해 평양 김책공업종합대학에 입학했고, 대학을 졸업한 뒤 지방의 꽤 높은 직위의 간부로 발령받았다. 발령지로 가기 전 어머니를 만나려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평양에서 멀리 떨어진 함경북도로 가기 위해 열차를 탔는데, 평소 같으면 이틀이면 갈 거리를 전기가 없어 열차가 가다 서다를 반복하면서 보름이나 걸렸다. 고향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그는 비참한 현실을 목격했다. 남의 무릎에 아기를 앉혀 놓고 화장실에 다녀온다며 부모가 도망치는 일부터, 길바닥에 쓰러진 수많은 아이들까지 보았다. 평양을 제외한 북한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풀로 연명한 가족과 돌이킬 수 없는 탈북

힘들게 찾아간 고향에서 최바울 선생이 만난 현실은 큰 충격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풀을 뜯어 먹으며 살고 있었다. 당시 평양을 제외한 지방 도시들은 식량이 없어 대량으로 굶어 죽어가던 시기였다. 최바울 선생도 어쩔 수 없이 풀로 끼니를 연명해야 했다. 10년 동안 특공무술을 배운 튼튼한 몸도 넉 달을 풀로 연명하니 지팡이를 짚고 걸어야 할 정도로 허약해졌다.

결국 그의 어머니는 풀을 뜯다 쓰러졌다. 힘이 없어 쓰러진 어머니를 업지도 못하고 질질 끌어 집에 모셔다 놓은 뒤, 여동생에게 잠깐 다녀올 테니 기다려 달라고 했다. 어머니는 아무래도 그가 올 때까지 견디지 못할 것 같다고 했다. 최바울 선생은 중국으로 간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떠났다. 그의 어머니는 죽으면 죽었지 김일성과 김정일을 배신하지 못한다고 막았기 때문이었다.

최바울 선생은 중국으로 식량을 구하러 나오다가 국경 경비 군인들을 만나 싸움이 붙었다. 몇 사람을 때려눕혀 놓고 탈북했다. 싸우는 과정에서 얼굴을 들켰기 때문에 북한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탈북자가 되었고, 그 후 북한의 식량난 속에서 그의 가족들은 전부 굶어 죽었다. 평양에 사는 큰형님과 탈북한 그만 살아남았다.

하모니카와 피리, 그리고 첫 찬송의 눈물

최바울 선생은 하모니카와 피리를 잘 불었다. 어떤 때에는 모든 일과가 끝나면 새벽 1시에도 피리를 불다가 자곤 했다. 처음 한 달이면 성경을 다 배울 수 있다고 장담했던 대로 성경을 열심히 배웠고 말씀들도 열심히 외웠다. 진칼빈 선생이 그를 많이 도와주었다. 최바울 선생은 기도에 특별히 열정적이었다. 이 때문에 지식적인 것보다는 하나님을 체험하는 쪽으로 빨리 성장했다.

사역장에 온 지 한 달쯤 지난 후 예배 시간에 그가 말했다. “선생님, 제가 오늘 특송을 좀 부르겠습니다.” 사역장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그가 이런 말을 하자 북한 선생들 모두 의아해했다. 그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이렇게 좋은 사역장에 보내 주신 주님의 은혜가 고마워서 아무래도 특송 하나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최바울 선생은 “하늘 가는 밝은 길”을 불렀다. 1절이 끝나고 2절로 넘어가면서 그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저렇게 강하고 거친 사람이 운다는 것이 놀라웠다. 탈북자들은 웬만해서는 울지 않았다. 수많은 죽음의 고비를 넘어온 사람들이라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았다. 그런데 최바울 선생이 울면서 찬송을 불렀고, 다른 북한 선생들도 그의 찬송을 들으며 함께 울었다. 나도 눈물이 났다. 그의 찬송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고, 그 진심 속 은혜는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힘이 있었다.

지난 사역장의 열악함과 정저우의 새 사역장

지난의 사역장은 매우 열악한 조건이었다. 방 두 개밖에 없는 낡은 아파트였고 방음 시설도 전혀 되지 않았다. 찬송하는 소리와 기도하는 소리에 온 아파트가 울렸다. 밤에 잘 때에는 박스 안에 담긴 갈치처럼 누워 자야 했다. 다행히 지난 사역장에 오래 있지는 않았다. 큰 집을 구할 수 있는 사역비가 허락되어 우리는 허난성 정저우시로 이사했다.

정저우에 도착한 우리는 좋은 집을 구할 수 있었다. 방이 세 개에 넓은 거실이 있고 난방 시설까지 있는 고급 아파트였다. 집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던 북한 형제들은 신이 났다. 집을 사역장으로 개조하는 일들을 아이들처럼 서로 자기가 하겠다고 다투면서 했다.

방음 장치는 누가 할 거냐고 묻자 최바울 선생이 큰 소리로 자기가 하겠다고 나섰다. 나는 통독실로 쓸 방에 스티로폼을 사서 도배하라고 시켰다. 그런데 최바울 선생이 사 온 것은 스티로폼이 아니라 가늘고 긴 각목들과 낡은 카펫들이었다. 이상해서 물으니 그는 “스티로폼이라는 건 뭡니까?” 하고 되물었다. 결국 직접 잡화점에 데리고 가서 찾아 보여주었다. 그는 “머리에 터럭이 나서 이런 건 본 적 없습니다!”라고 놀라워했다. 도배를 마친 뒤에는 벽 앞에 서서 아이처럼 좋아했다.

최휘석 목사와의 씨름, 특수부대의 몸

우리가 쓰촨성 청두시로 이사한 후, 나의 동생인 최휘석 목사님이 오셨다. 최휘석 목사님은 대학교 시절 전국 유도 대회에서 두 번이나 우승한 유도 선수였다. 사역장은 넓었고 혈기 왕성한 최 목사님은 북한 사람들과 씨름을 하기 시작했다. 북한 사람들 아무도 그를 당해낼 수 없었다. 모든 북한 선생들이 다 달려들었지만 최바울 선생만은 조용히 앉아 구경했다.

결국 최휘석 목사님이 최바울 선생에게 정식으로 요청했다. “바울 선생, 한 번 붙어 봅시다.” 최바울 선생은 관심이 없다고 손을 내저었지만, 계속된 요청에 마지못해 일어났다. 자신만만하게 붙었던 최휘석 목사님은 첫 판을 시작하자마자 번쩍 들려 방구석으로 날아갔다.

최바울 선생은 유도를 배운 적이 없었지만 여러 가지 특공무술이 몸에 배어 있었다. 약이 오른 최휘석 목사님이 다시 달려들었고, 이번에는 최바울 선생을 공중에서 한 바퀴 돌려 땅으로 꽂아 버렸다. 보통 사람이라면 허리가 부러질 동작이었지만, 최바울 선생은 고양이처럼 가볍게 내려앉았다. 두 사람은 40분 동안 유도인지 씨름인지 알 수 없는 경기를 이어갔고, 결국 기진맥진해서야 끝났다. 승부를 판정할 수는 없었지만 최바울 선생이 싸움꾼이라는 것만은 인정해야 했다.

첫 설교의 날과 돼지고기 회

북한 선생들이 생애 첫 설교를 하는 날이 왔다. 나는 북한 선생들이 2주일 동안 밤잠을 자지 않고 준비한 설교를 발표할 수 있도록 넓은 거실에 강대상을 만들었다. 이날은 청도한인교회 박주안 전도사님과 신대원 동기 김규성 전도사님도 함께해 북한 선생들의 설교를 평가했다. 나까지 세 명으로 된 설교 평가위원회가 만들어졌다.

북한 선생들의 설교는 너무 재미있고 즐거웠고 놀라웠다. 내 일생에 이날처럼 즐거운 날은 다시 없을 것 같았다. 우리는 북한 선생들이 처음 설교를 한 이날을 명절처럼 보내기로 했다. 마침 최바울 선생이 식사 당번이었다. 그는 신이 났는지 아침부터 요란하게 광고했다. “이 천하에 바울이가 오늘 점심은 돼지고기 회를 만들어 줄 테니까 아침밥 적게들 드시오!”

점심이 되자 돼지고기 회가 나왔다. 식탁에 올라온 돼지고기는 시장에서 사 온 돼지고기 그대로였다. 그는 돼지고기를 식초에 찍어 먹으라고 친절하게 설명했다. 최바울 선생은 날고기를 식초에 찍어 참 맛있게 먹었다. 살면서 한 번도 보지 못한 돼지고기 육회였다. 나는 웬만해서는 음식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지만 이것만은 먹을 수 없었다. 저녁에는 잉어 두 마리를 사 와서 다시 회를 하겠다고 했지만, 이번에는 잉어를 초장과 식초에 절이다시피 해서 내놓았다. 돼지고기는 날것으로 먹으라면서 물고기는 날것으로 먹을 수 없다고 하니, 그의 음식 세계는 참 이해하기 어려웠다.

지린과 메이허커우, 첫 사역의 시작

1기생 북한 선생들이 옌볜으로 파송되어 나갈 때 최바울 선생은 지린성 지린시로 갔다. 지린시 명성교회 목사님과 집사님들은 최바울 선생이 탈북자이지만 북한선교를 한다고 많은 도움을 주셨다. 최바울 선생은 강석환, 이빌립, 이용섭, 조선족 천상은 형제 등 아홉 명의 형제들을 모집했다. 그리고 지린성 메이허커우시 조선족 교회 옆의 자그마한 사랑방에 임시 사역장을 꾸리고 사역을 시작했다. 나는 최바울 선생의 사역장을 지난으로 내려 보내 그곳에서부터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하게 했다.

최바울 선생은 사역에 대한 의욕이 높았다. 열심히 학생들을 가르치고 섬겼다. 그러나 시작부터 순탄하지 않았다. 김권능 선생 사역장의 박다윗 형제가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고, 엉뚱하게도 최바울 선생 사역장으로 불똥이 튀었다. 다윗 형제는 술을 잔뜩 마시고 최바울 선생 사역장에 택시를 타고 왔다. 택시비를 요구하는 기사에게 돈 대신 주먹을 휘둘렀다. 화가 난 택시 기사가 공안에 고발했고, 공안이 최바울 선생 사역장을 덮쳤다. 최바울 선생 팀 형제들은 온 지 며칠 되지도 않아 노숙하며 지내야 했다.

충칭 사역의 어려움과 창장(장강) 유람

혼이 난 최바울 선생은 사역장을 데리고 기풍 선생이 먼저 가 있던 충칭시로 갔다. 그러나 충칭에서도 사역은 순탄하지 않았다. 나는 옌볜에서 납치되어 간 칼빈 선생과 박요한 선생 문제, 감옥에 갇힌 민선주 선생 문제를 수습하느라 오랫동안 충칭으로 내려오지 못했다. 이 때문에 사역비가 제때 공급되지 않았다. 최바울 선생은 힘들게 지내고 있었고 사역은 안정을 찾지 못했다.

양식이 떨어진 북한 형제들은 논밭에 나가 물고기와 우렁이를 잡아 연명하고 있었다. 미안했다. 나는 위로 겸, 앞으로 하나님의 일을 할 사람들에게 견문을 넓혀주고 싶어 학생들을 데리고 창장 유람을 갔다. 유람을 간다는 말에 최바울 선생 팀 학생들은 아이들처럼 신나고 즐거워했다.

만식 형제는 배 앞머리에 서서 다른 사람들이 깜짝 놀랄 만큼 큰 소리로 만세를 외쳤다. “이제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오늘 이렇게 김정일이두 타보지 못한 장강 유람선을 타보았으니 말임다.” 창장 유람 후 최바울 선생도 다시 의욕을 찾았고 형제들도 안정을 얻어 열심히 성경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청두 두장옌 유람과 북한 형제들의 기쁨

쓰촨성 청두시에서 사역할 때 최바울 선생 사역장 형제들과 우리 가족들은 두장옌으로 유람을 갔다. 우리 가족들과 함께 유람을 갔을 때 최바울 선생과 북한 형제들은 매우 좋아했다. 그때 최바울 선생과 다윗 형제, 빌립 형제들이 우리 가족들 앞에서 북한 사람들 특유의 곱사등이 춤을 추었다. 그 춤이 특이하고 재미있어 사진으로 남겼다.

최바울 선생은 두장옌을 유람하면서 말을 타고 찍는 사진에도 욕심을 부렸다. 최바울 선생 사역장 형제들에게만은 허락했다. 그들은 그 한 장의 사진을 무척 소중하게 여겼다.

나태효 목사님의 첫 북한 형제 만남

처남인 나태효 목사님이 우리 사역장을 보고 싶다고 미국에서 중국으로 오셨다. 목사님은 30년 전 태권도 공인 8단 유단자로 미국에 건너가 태권도 사범을 하며 미국 시민이 되었고, 이후 목회자로 부르심을 받아 목사로 시무하고 계셨다. 나는 한국에 있었기 때문에 북한 선생을 공항에 내보내 주겠다고 했다. 목사님은 북한 사람들을 만나본 적이 전혀 없었지만 자신 있어 했다.

그러나 공항에서 최바울 선생을 만나 반갑게 악수하는 순간 목사님은 허물어져 버렸다. 그는 어려서부터 싸움꾼이었기에 손을 잡는 순간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단박에 알아보았다. 그 순간 태권도 8단이라는 자존심은 깨졌다. 최바울 선생을 따라 사역장으로 들어가면서 목사님은 겁에 질렸다.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포로처럼 끌려가는 사람 같았다.

최바울 선생의 사역장은 어두컴컴한 지하 통로를 한참 허리를 숙이고 기다시피 들어가야 했다. 네 번씩 공안의 습격을 받고 화가 난 최바울 선생이 아예 땅굴 같은 곳에 사역장을 잡은 것이다. 희미한 불빛이 보이는 음산한 지하방에 들어가자, 이 구석 저 구석에서 시커먼 얼굴을 한 북한 형제들이 다가와 거친 목소리로 인사했다. “나는 함북에서 온 이만식이라 하오. 댁은 뉘기요?”

미국에서 온 목사님과 계란 한 통

나태효 목사님은 북한 형제들의 우악스럽고 살벌한 억양을 처음 들었다. 겨우 자기소개를 마치자, 갑자기 북한 형제 중 한 사람이 큰 소리로 외쳤다. “미 제국주의 침략자를 타도하자!” 그 형제는 미국에서부터 자신들을 만나러 온 목사님이 반가워 북한에서 부르던 구호를 농담 삼아 한 것뿐이었지만, 북한 사람을 처음 만난 목사님에게는 모든 것이 무섭게 느껴졌다.

그날 저녁 목사님은 최바울 선생과 한 방에서 자면서 자신이 미국에서 태권도 사범을 하던 사람이고 태권도 8단 소유자라고 말했다. 최바울 선생은 별 관심 없다는 듯 대꾸했다. “그런 거 어디다 써요? 북한에서는 독침, 칼침으로 하지 그런 거로 안 합니다.” 목사님은 그날 밤 잠들 수 없었다.

이후 최휘석 목사님이 성막 강의를 위해 오면서 나태효 목사님도 기를 펴고 예배 때 설교도 하고 학생들과 이야기도 나누게 되었다. 북한 형제들은 미국에서 왔다고 하니 신기해하며 미국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다. 나 목사님은 이들에게 미국에 대해 설명하느라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목사님은 형제들이 먹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고, 북한 형제들은 한목소리로 “계란!”을 외쳤다. 목사님은 10kg들이 통에 계란을 가득 사 왔다. 저녁 시간이 되자 최바울 선생은 몽땅 삶았다고 했다. 그날 저녁 식사는 삶은 계란과 간장이 전부였다. 북한 형제들은 계란 껍질을 까서 간장에 찍어 먹었고, 계란 한 통을 순식간에 해치웠다. 다음 날 최바울 선생은 “미국 선교사님, 계란 정말 잘 먹었슴다. 한 번만 더 사 주시면 안 되겠슴까?”라고 말했다. 목사님은 계란 대신 각 사람에게 소형 녹음기를 하나씩 사 주셨다.

계속된 공안의 추적과 3분 전 탈출

최바울 선생의 사역은 조금 유별 났다. 처음부터 중국 공안들에게 쫓겨 다니더니 사역 내내 계속 쫓겨 다녔다. 다른 사역장들은 잘 숨어 안정되게 사역했지만, 어찌 된 일인지 최바울 선생은 한 달 이상 쫓기지 않고 사역한 적이 없었다. 지난에 있을 때는 다윗 형제가 공안을 몰고 와서 정저우로 도망왔고, 정저우에서도 한 달에 한 번씩 공안이 찾아왔다. 다행히 그때마다 잘 도망가서 붙잡히지는 않았지만, 계속 사역장을 옮겨야 했다.

구창안 목사님이 최바울 선생 사역장에서 교회사 강의를 하고 계실 때였다. 북한 형제들에게 강의하던 목사님에게 갑자기 이상한 감동이 오기 시작했다. “학생들을 데리고 빨리 나가라!” 마음속에서 분명한 음성이 계속 들렸다. 처음 사역 현장에 들어온 목사님은 그 느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지만,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몸을 덮쳤고 자기 의지와 상관없는 말이 입에서 나왔다. “다들 밖으로 나갑시다.”

순간 북한 형제들의 눈빛이 홱 돌아갔다. 최바울 선생 팀은 늘 쫓겨 다니며 살았기에 위험한 상황이 왔다는 것을 직감했다. 모두 급히 일어나 사역장을 뛰쳐나가 뿔뿔이 도망쳤다. 목사님도 뒤를 따라 허겁지겁 도망쳐 나왔다. 형제들이 사역장을 나간 지 3분 후 공안들이 들이닥쳤다. 공안들은 이 집에 많은 청년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미리 알고 떼를 지어 온 것이었다. 또 이사해야 했다.

유치장에서 울린 하모니카 찬송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어느 날 공안들이 예고도 없이 최바울 선생 사역장에 들이닥쳤다. 이웃 주민의 신고를 받고 온 것이다. 공안들은 사역장 형제들에게 신분증을 제시하라고 요구했다. 북한 형제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신분증도 내놓지 않은 채 눈만 깜빡거리며 앉아 있었다. 공안들은 이들을 모두 공안국으로 연행했다.

유치장에 갇힌 최바울 선생 팀 북한 형제들은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아이고 바울 선생님, 우리 이젠 다 죽었슴다!” 형제들은 절망했고, 사역장의 책임자인 최바울 선생만 바라보았다. 최바울 선생도 막막했지만, 자기가 낙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명랑하게 웃고 떠들었다. 문득 사도 바울은 감옥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옥문을 깨고 나왔는데, 비록 자신은 가짜 바울이지만 진짜 바울처럼 하나님을 찬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주머니에 애용하던 하모니카가 들어 있었다. 그는 하모니카를 꺼내 “천부여 의지 없어서”를 불었다. 조용한 유치장 안에 하모니카 소리가 울렸다. 북한 형제들도 조용히 따라 부르며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다. 감방의 중국인들도 하모니카 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밖에서 당직을 서던 공안도 찬송가 곡조가 싫지 않은지 말리지 않고 손가락장단을 치며 들었다.

주소 대신 복음을 쓰다

잠시 후 공안 간부들이 도착하여 북한 형제들을 모두 불러내 물었다. “너들은 뭐하는 사람들이야?” 형제들은 “우리는 동북 지방에서 온 조선족들이오!”라고 대답했다. 공안들은 종이 한 장을 내밀며 집 주소를 다 쓰라고 했다.

최바울 선생이 제일 먼저 볼펜을 잡았다. 중국 글을 쓸 줄도 몰랐고 집 주소도 없었다. 내키는 대로 조선글로 이렇게 썼다. “주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그러면 당신과 당신의 집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다음 형제도 이어서 썼다. “하나님은 공안 선생님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독생자를 보내 주셨습니다.” 또 다른 형제도 “공안 선생님이 예수님을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라고 썼다.

공안은 종잇장을 들고 이리저리 보다가 중국 글로 다시 쓰라고 소리쳤다. 새 종이가 나오자 최바울 선생부터 아까 썼던 말씀들을 다시 반복해 써 넣었다. 결국 공안들은 이 사람들이 범죄자 같지는 않았는지 새벽 세 시쯤 모두 집으로 돌려보냈고, 공안 한 명을 감시자로 동행시켰다. 사역장에 도착한 형제들은 조선족 형제에게 공안에게 계속 말을 시키게 하고 화장실 쪽문을 뜯어 도망갈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갑자기 공안에게 전화가 왔다. 집에 급한 일이 생겼다며 30분 후 돌아올 테니 기다리라고 하고 나갔다. 하나님께서 그 위험한 상황에서 이들을 빠져나오게 하신 것이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서 찬송하고 기도할 때 옥문을 열어 주신 하나님께서 공안의 손에 잡혀 북송될 이들을 풀어 주셨다.

사역 포기와 눈물의 이별

공안에 노출된 사역장을 버리고 이번에는 청두시 반대편으로 이사를 갔다. 그러나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그 동네에 호구조사가 시작되었다. 북한 형제들이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사한 지 며칠 지나지도 않아 사역장을 버리고 다른 동네로 갔다. 그곳에서도 기다렸다는 듯 곧장 호구조사가 시작되었다.

결국 최바울 선생은 사역에 대한 자신감을 완전히 상실했고 사역을 포기했다. 북한 형제들도 성경공부에 의욕을 잃었다. 최바울 선생이 포기하자 김영윤, 이빌립, 이용섭, 박다윗 선생을 제외하고 나머지 북한 형제들도 떠났다. 최바울 선생도 떠났다. 자기에게 사역은 아니라고 머리를 떨구고 떠나갔다.

떠나면서 그는 울었다. “선교사님, 잊지 않겠슴다. 그래두 선교사님 때문에 제가 예수님을 알게 됐구, 오늘 이만큼이라도 사람 되지 않았슴까? 꼭 잊지 않겠슴다. 다시 만나지 못해두 잊지 않겠슴다.” 안타까웠다. 북한에서부터 유능한 엘리트였지만 하나님의 일은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치유 사역과 현재의 목회

사역장을 떠난 최바울 선생은 훗날 하나님으로부터 강력한 치유의 은사를 받았다. 암, 꼽추, 앉은뱅이를 고치는 은사를 받았고, 그 후부터 말씀을 전하는 사역보다는 병자들을 고치면서 그들에게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시작했다. 한국에 와서도 치유 사역을 중심으로 북한선교 사역을 시작했다.

최바울 선생이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 한민족사랑교회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북한 특수부대 출신으로, 평양 엘리트의 삶을 살았고, 식량난 속에서 가족을 잃고 탈북자가 되었던 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무너지고 찬송으로 회복되었다. 사역의 실패와 공안의 추적, 눈물의 이별을 지나 그는 또 다른 방식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