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성군을 대표하던 축구선수
최효선 선생은 북한 함경북도 온성군을 대표하는 축구선수였다. 평양까지 올라가 경기를 했다고 자주 자랑할 만큼 운동에 대한 자부심이 컸다.
축구선수 생활에서 몸에 밴 강한 승부욕과 급한 성격 때문에 공동체 안에서는 자주 충돌했다. 그는 말보다 행동이 앞섰고, 뜻대로 되지 않으면 주먹부터 들 정도로 공격적이었다. 이 때문에 최순교 선생은 그를 훈련시키는 과정에서 큰 어려움을 겪었다.
3기 · 중국 1차 사역
중국 1차 사역 / 최순교 선생 사역장
3기 · 사역 기록
거친 축구선수에서 말씀과 찬양의 사람으로 변화된 북한 선교사
최효선 선생은 북한 함경북도 온성군을 대표하는 축구선수였다. 평양까지 올라가 경기를 했다고 자주 자랑할 만큼 운동에 대한 자부심이 컸다.
축구선수 생활에서 몸에 밴 강한 승부욕과 급한 성격 때문에 공동체 안에서는 자주 충돌했다. 그는 말보다 행동이 앞섰고, 뜻대로 되지 않으면 주먹부터 들 정도로 공격적이었다. 이 때문에 최순교 선생은 그를 훈련시키는 과정에서 큰 어려움을 겪었다.
처음 최순교 선생을 만났을 때 최효선 선생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당신이 우리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소? 당신을 따라가면 안전은 담보되오?”
최순교 선생은 솔직하게 답했다. “나는 아무것도 담보할 수 없습니다. 다만 잠잘 곳과 양식, 그리고 성경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나머지는 하나님만이 해결해 주실 수 있습니다.” 최효선 선생은 “하나님?”이라고 되물은 뒤 더 말하지 않았지만, 그 대답에 어떤 진실함을 느꼈는지 순교 선생을 따라왔다.
천진으로 내려오던 길에 최효선 선생은 술을 사 달라고 요구했다. 거절당하자 형제들과 돈을 모아 술을 사 마셨다. 서안에 사역장을 꾸린 뒤에는 또다시 술을 요구했고, 순교 선생이 안 된다고 하자 때려죽이겠다며 달려들었다. 신소광 선생이 막아 큰 싸움은 피했지만, 공동체는 늘 긴장 속에 있었다.
그는 최순교 선생을 끝까지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형님”이라고 불렀다. 사사건건 지시를 거부하고 대들었다. 북한에서 익숙했던 힘의 질서가 아닌 말씀과 순종의 질서를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어느 날 최효선 선생은 갑자기 배를 움켜쥐고 바닥을 뒹굴었다. 동네 병원과 큰 병원 모두 급성 맹장염으로 진단하며 즉시 수술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사역장에는 수술비가 없었다.
최순교 선생은 형제들에게 지금 배우고 있는 하나님께 친구를 살려 달라고 함께 기도하자고 말했다. 아직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없던 북한 형제들도 상황이 다급해지자 효선 선생을 붙잡고 울부짖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우리 친구를 살려 주십시오. 살려 주시면 이제부터 선생님 말씀을 잘 듣겠습니다.”
며칠 동안 이어진 공동체의 기도 속에서 최효선 선생의 상태는 조금씩 좋아졌다. 일주일 뒤에는 죽을 먹었고, 곧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왔다.
이후 큰 병원에서 다시 CT 검사를 받았을 때 의사가 과거에 맹장 수술을 한 적이 있는지 물었고, 맹장이 보이지 않는다는 설명을 했다고 전해진다. 수술을 받지 않았던 최효선 선생은 이 일을 두려움과 놀라움으로 받아들였다.
그 후 최효선 선생이 다시 주먹을 들고 최순교 선생에게 대들 때마다 이전과 같은 복통이 나타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는 아픔이 우연이라고 고집했지만, 순교 선생이 손을 얹고 기도하면 통증이 가라앉는 일을 몇 차례 경험했다.
이 일을 겪으며 그는 처음으로 하나님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반항만 하던 사람이 성경을 펼쳐 읽기 시작했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배우려는 태도로 바뀌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뒤 최효선 선생은 찬양을 즐겨 불렀다. 그가 노래를 시작하면 다른 형제들은 자연스럽게 목소리를 낮추고 그의 찬양을 들었다. 듣는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이고 눈물이 흘렀다.
북한 형제들은 찬양의 은사라는 개념을 알지 못해 “축구선수가 언제부터 노래를 그렇게 잘했느냐. 왜 네가 노래하면 마음이 들뜨고 눈물이 나는 것이냐”고 물었다. 그가 즐겨 부르던 찬양은 “세상에서 방황할 때 나 주님을 몰랐네”로 시작하는 곡이었다.
어느 날 최효선 선생은 최순교 선생에게 “선생님을 능가하는 리더가 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순교 선생은 “나를 능가하면 내가 엎고 다닐 테니 마음껏 나래를 펼쳐 보라”고 격려했다.
반항과 술에 매여 있던 사람 안에 처음으로 사명과 성장에 대한 열망이 생겨난 순간이었다. 그는 자신이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더 큰 리더가 되겠다는 목표를 품었다.
최효선 선생은 이후 누구보다 열심히 성경을 배웠다. 성경을 100번 이상 통독했고, 공동체 생활과 설교, 사역장 운영 등 북한 선교사가 되기 위한 훈련을 모두 마쳤다.
마침내 그는 최순교 선생 팀의 다른 형제들과 함께 북한 선교사로 임명받았다. 선교사로 세워진 뒤에는 “왜 나도 1기 선생들과 함께 더 일찍 오지 못했는지 속상하다. 이제부터 공부도 북한 선교도 정말 열심히 하겠다”고 고백했다.
최효선 선생은 조봉희 선생과 함께 연변으로 파송되던 열차 안에서 중국 공안에게 체포되었다. 선교사로 임명받아 새로운 사역을 시작하려던 길에서 다시 북한으로 강제 송환된 것이다.
그는 북한의 감옥에서 조사를 받은 뒤 석방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고향으로 돌아간 그에게는 또 다른 아픔이 기다리고 있었다.
고향에 돌아온 최효선 선생은 동생도 중국에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동생은 북한에도 복음을 전하겠다며 쪽복음을 몸에 품고 국경을 넘다가 경비대에 체포되었다.
보위부가 동생의 두 다리를 꺾고 추운 겨울날 마당에 앉혀 주민들에게 보였으며, 막내 동생이 보위부에 불려갔다가 심하게 맞아 얼굴을 알아보기 어려운 형을 발견했다. 이 소식은 최효선 선생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최효선 선생은 이후 다시 중국으로 탈북했고, 나는 그를 한국으로 인도했다. 체포와 북송, 가족의 비극을 겪은 뒤 한국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는 지금도 동생이 하나님의 일을 하다 순교했다고 말하며, 자신이 북한 선교사로 부름받은 일도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다고 고백한다. 이 진술은 최효선 선생이 가족의 고통을 자신의 사명과 연결해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최효선 선생의 어머니도 한국에 온 뒤 나를 세 차례 찾아와 감사의 뜻을 전했다. 북한에 있을 때 아들은 부모의 말도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거친 사람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말씀훈련을 거쳐 성품이 달라지고 착한 사람이 된 모습을 보며, 이제 자신의 유일한 소망은 아들이 목사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 사람의 변화는 당사자만의 변화가 아니라 가족에게까지 소망을 주는 사건이었다.
최효선 선생의 이야기는 힘과 승부욕으로 살아온 한 사람이 공동체와 말씀, 기도를 통해 변화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 준다. 처음에는 술을 요구하고 지도자에게 주먹을 들었지만, 위기 속에서 공동체의 기도를 경험한 뒤 성경을 읽고 찬양하며 북한 선교사로 세워졌다.
그의 삶에는 북송과 가족의 고통이라는 깊은 상처도 남아 있다. 그럼에도 자신과 동생의 삶을 하나님의 부르심 안에서 해석하며 새로운 길을 걸었다. 이 기록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통제나 힘이 아니라, 오래 참고 품는 공동체와 말씀의 은혜라는 사실을 증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