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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역이야기

2기 · 중국 1차 사역

최순교

중국 1차 사역(2기) / 3기 사역장 책임자, 북한 출신 선교사

소속 / 사역기수
중국 1차 사역(2기) / 3기 사역장 책임자, 북한 출신 선교사

2기 · 사역 기록

사역의 발자취

굶주림과 상실 속에서 중국으로 넘어온 사람

최순교 선생은 북한에서 10년을 군사 복무한 사람이었다. 제대 후 고향으로 돌아와 결혼했고 딸을 낳았지만, 극심한 가난과 식량난 속에서 먹을 것을 구할 수 없었다. 아내는 가난을 견디지 못해 집을 나갔고, 딸은 굶어 죽었으며 함께 살던 아버지도 굶어서 세상을 떠났다.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최순교 선생은 마음이 무너졌다. 중국에 가면 먹을 것이 있다는 말만 듣고 무작정 중국으로 넘어왔다. 그의 첫 출발은 사명감이 아니라 생존이었다.

숲속 마을에서 김권능 선생을 만나다

중국에 왔지만 갈 곳이 없었던 최순교 선생은 김권능 선생의 아버님이 머물던 숲속 마을을 찾아왔다. 마침 김권능 선생은 1차 사역을 하다 지쳐 쉬고 싶어 숲속 마을로 돌아와 있었다.

그러나 그곳에는 김권능 선생을 기다리는 많은 북한 형제들이 있었다. 김권능 선생은 쉬러 왔지만, 최순교 선생을 비롯한 9명의 북한 형제들을 이끌고 다시 산둥성 지난시로 내려왔다. 그렇게 최순교 선생은 김권능 선생의 사역장에 들어오게 되었다.

산둥대학교 공원에서의 첫 만남

나는 지난시 산둥대학교 공원에서 처음으로 최순교 선생을 만났다. 다른 형제들은 나를 보고 인사하고 예를 갖추었지만, 최순교 선생은 오히려 다리를 앞 의자에 걸쳐 놓고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안녕하세요. 처음 만나네요. 반갑습니다.”라고 인사를 건넸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김권능 선생과 곁에 있던 형제들이 눈치를 주자 그는 “내가 인민군 출신인데 어떻게 안기부에게 굽실거릴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나중에 다시 찾아갔을 때에도 그는 여전히 뻣뻣했다. 다른 북한 형제들은 반갑게 맞아 주었지만, 최순교 선생은 방에서 나오지도 않았고 인사도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저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오해가 풀리고 마음이 열리다

어느 날 최순교 선생이 나를 불렀다. 그는 할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죄송합니다. 선교사님. 이때까지 안기부인 줄로만 알고 함부로 막 했는데 미안합니다. 이제부터는 잘해보겠습니다.”

그가 은혜를 받은 것인지, 상황을 이해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 후부터 그는 나를 잘 대해 주었고, 찾아가면 인사도 잘했다. 김권능 선생의 말도 잘 듣기 시작했다. 거칠고 경계심 많던 마음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기도의 사람으로 변화되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것을 깨달은 최순교 선생은 다른 형제들과는 전혀 다른 열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특별히 기도를 많이 했다. 다른 형제들은 억지로 시켜도 잘 하지 않았지만, 최순교 선생은 틈만 있으면 기도했고 기도를 즐거워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영적인 은사를 경험하기 시작했다. 김권능 선생이 배가 아파 일어나지도 못하고 식사도 하지 못했을 때, 최순교 선생은 김권능 선생의 방에 들어가 안수기도를 했다. 하나님을 배운 지 한두 달밖에 되지 않은 사람이 자기 선생에게 손을 얹고 고함치듯 기도한 것이다. 그런데 김권능 선생의 아픈 배가 나았다.

그때부터 최순교 선생의 영적 은사는 북한 형제들에게 조금씩 인정받기 시작했다.

은사와 방언, 통변의 은사

최순교 선생은 자신이 은사를 받았다고 말했다. “선생님, 저 은사를 받았습니다. 내가 기도하면 아픈 사람이 낫습니다.” 당시 나는 사역을 말씀 중심으로 진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은사를 내세우는 것을 조심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최순교 선생은 계속 환상을 보았고 예언을 했으며, 스스로 기도하다가 방언도 받았다. 북한 형제들은 처음에는 이상하게 여겼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방언기도를 했다.

그에게 가장 강력하게 나타난 은사는 통변의 은사였다. 설교 자체는 지적으로 깊거나 세련된 편이 아니었고 찬송도 뛰어나지 않았지만, 설교 후 찬양을 부르기 시작하면 사람들의 마음이 무너지고 회개와 자복의 역사가 일어났다. 단순하고 순수한 믿음이 강한 영적 힘으로 나타났다.

3기 사역의 문을 열다

옌볜 조선족 자치주로 파송된 후 최순교 선생은 제일 먼저 학생들을 모집해 산시성 시안시로 내려왔다. 그는 신소광, 최효선, 고봉희, 박에녹, 신재록, 김기철, 김우열, 박예진, 철남, 김현남, 노천성 형제 등을 모집해 왔다.

최순교 선생은 3기 사역의 문을 열었다. 사역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고 자신감도 있었다. 자신이 경험한 신비 체험과 여러 은사 때문에 북한 형제들이 쉽게 은혜를 받고 예수님을 영접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열심히 가르쳤고, 북한 형제들에게 통독을 힘 있게 시켰다.

술 사건과 원칙 앞에서 무너진 눈물

사역은 사람의 생각처럼 순조롭게만 흘러가지 않았다. 어느 날 통독 후 식사 시간에 학생들이 밥을 먹지 않고 앉아 있었다. 최효선 형제가 소리를 지르며 술을 달라고 요구했고, 다른 형제들도 짐을 싸 들고 나왔다. 술과 담배를 못하게 하고, 성경만 읽게 하는 생활을 견디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최순교 선생은 원칙과 학생들을 붙잡는 일 사이에서 갈등했다. 결국 그는 학생들에게 술을 사주었다. 그러나 자신은 마시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 울었다. 주님께 죄송한 마음, 학생들에게 당한 수치심과 억울함 때문에 하염없이 울며 기도했다.

며칠 후 나는 이 일을 알고 사역장을 찾아갔다. 학생들에게 짐을 싸서 옌볜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그러자 학생들은 순교 선생은 잘못이 없고 자신들이 잘못했다며 용서를 구했다. 나는 한 번만 더 기회를 주기로 했다.

다시 세워진 사역장과 치유의 기도

그 후에도 학생들은 계속 말썽을 부렸다. 그러나 최순교 선생의 깊은 기도와 열정 속에 주님의 손길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최효선 형제에게는 평소 장이 꼬이는 병이 있었는데, 최순교 선생과 다투고 나면 그 병이 도졌다. 그러면 최순교 선생이 붙잡고 기도해 주었고, 곧 나았다.

이 일을 몇 번 겪은 후 최효선 형제는 더 이상 대들지 못하고 고분고분해졌다. 노천성 형제도 사역장을 떠나고 싶어 했지만, 최순교 선생은 끈질기게 붙잡고 권면했다. 그는 사역을 기도로 이끌어 가는 사람이었다.

최순교 선생은 자주 말했다. “선생님, 주님은 학생들을 맡겨 주실 때 그들을 감당할 수 있는 권세도 함께 주십니다. 그리고 정말 사역을 이끌어 가는 방법은 기도밖에 없습니다.”

단기선교팀 방문과 북한선교 설교

최순교 선생의 사역장은 3기 사역장들 가운데 가장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래서 울산교회 고등부 학생들이 단기선교로 우리 사역장을 방문했을 때, 한국 학생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사역장은 최순교 선생 사역장뿐이었다.

북한 형제들은 남한의 고등학생들을 처음 보고 큰 충격과 기쁨을 느꼈다. 이 일은 사역장 안에서 전설 같은 사건이 되었다. 함께 온 이국제 집사님과 고현철 목사님도 큰 은혜를 받았다.

최순교 선생은 “우리가 복음을 위해 부름 받았고, 북한을 위해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설교했다. 북한 사람이 그런 메시지를 전한다는 것은 참석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후 고현철 목사님은 오랫동안 사역장을 위해 헌금을 보내 주었다.

세례와 화산 임명예배

3기 사역장들 중에서 최순교 선생 사역장이 가장 먼저 모든 훈련 과정을 이수했다. 김의환 목사님이 오셨을 때 세례식을 했다. 총장님은 처음에는 1년밖에 배우지 않은 탈북자가 어떻게 다른 탈북자에게 성경을 가르칠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러나 기철 형제에게 성령과 교회에 대해 암송한 말씀을 말해 보게 하자, 형제는 막힘없이 대답했다. 총장님은 “그래, 이제 알겠다. 정말 가르치긴 가르친다. 정말 희한한 녀석들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최순교 선생 사역장 형제들을 데리고 중국의 5대 명산 중 하나인 화산에 올라가 북한 선교사 임명예배를 드렸다. 화산 정상에서 기도모임을 하며 이들을 북한 선교사로 세웠다.

청도한인교회 교인들과 다시 드린 임명예배

최순교 선생은 욕심이 있었다. 청도한인교회 집사님들이 오자 그들 앞에서도 북한 선교사 임명예배를 한 번 더 드려 달라고 했다. 우리는 집사님들과 함께 황허로 유람을 가서 다시 임명예배를 드렸다.

그때 날씨가 몹시 추웠고 식당도 여관도 난방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최순교 선생 팀 전원이 설교를 했다. 한 사람만 시키고 다른 사람을 안 시키면 삐지기 때문에, 결국 하루 동안 열세 번의 예배를 드렸다. 청도한인교회 교인들은 힘들었지만 큰 은혜를 받았고, 그때의 일을 두고두고 기억했다.

이후 우리 가족들과도 다시 예배를 드리고, 꽃다발을 안겨 주며 한 사람씩 사진을 찍어 주었다. 이들은 북한 선교사로 세워진 것을 정말 기뻐했다.

연변 파송과 체포

북한 선교사 임명예배를 드린 후 최순교 선생 팀 형제들은 나를 만날 때마다 파송해 달라고 요청했다. “저희들은 예수님을 위해 목숨이라도 내놓겠습니다.” 나는 또 누군가가 체포될 것 같아 망설였지만, 이들은 자신들이 이미 주님의 것이라고 말하며 강하게 요구했다.

2001년 3월 13일, 이들은 옌볜으로 떠났다. 열차에서 최효선 선생과 조봉희 선생이 체포되어 북한으로 끌려갔다. 나머지 신소광, 김기철, 김예진, 신재록, 박에녹, 이우열 선생은 무사히 옌볜까지 도착했다.

최순교 선생은 옌지에 도착해 조선족 이우열 선생의 누나 집을 근거지로 삼아 활동하며 제자 선생들을 지휘했다. 그러나 며칠 후 공안들이 야밤에 숙소로 들이닥쳤고, 최순교 선생과 신소광 선생, 조선족 선생이 체포되어 수갑을 차고 끌려갔다.

공안의 고문과 북송

공안의 목적은 처음부터 나를 잡는 것이었다. 최순교 선생과 신소광 선생은 내가 머물던 숙소와 연락처를 알고 있었지만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 공안들은 전기 곤봉까지 들고 나와 고문했다.

전기 충격에 몸이 비틀어진 최순교 선생은 고함을 질렀다. “니네들도 사람 아니냐? 너희도 스승이 있지 않았나? 우리는 어차피 북한에 나가면 죽는다. 아무래도 죽는 거 우리 선생만은 살린다!”

공안은 더 이상 취조하지 않았다. 40일 후 두 선생은 북한으로 이송되었다. 용정 변방대 감방을 거쳐 함경북도 회령시 보위부 집결소로 넘겨졌다.

회령 보위부 감옥의 참상

최순교 선생과 신소광 선생은 30명의 탈북자들과 함께 북한으로 이송되었다. 중국 군인들은 국경 교두에서 이들을 북한 보위부 군인들에게 넘겼고, 보위부 군인들은 소리를 지르며 사람들을 한 줄로 세웠다.

탈북자들은 이름과 주소를 대야 했고, 주머니 안의 물건과 신발끈, 허리끈까지 모두 내놓아야 했다. 이후 주사를 맞고 보위부 감옥까지 행진했다. 감옥에 도착하자 보위부 군인들은 잡혀온 사람들을 총탁과 군홧발로 때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옷을 벗고 수색을 당했으며, 기합과 취조를 받았다. 최순교 선생은 산속에서 나무 끌어내리는 일을 하다가 왔다고 말해 간신히 살아남았다.

다시 탈북하여 중국으로 돌아오다

최순교 선생은 북한에서 몇 달간 감옥살이를 하다가 다시 중국으로 탈북했다. 그가 중국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우리 사역장 전원이 산시성 시안시에서 체포되어 북한으로 끌려갔고, 나는 한국으로 추방된 뒤였다.

중국으로 돌아온 최순교 선생은 영양실조로 온몸이 부풀어 있었다. 이때 영양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면 붓기가 빠지면서 탈진해 죽을 수 있었다. 나는 서둘러 중국 감옥에서 나온 조선족 선생들을 중심으로 옌볜에 사역장을 만들고, 최순교 선생을 피신시켜 몸을 회복하게 했다.

한국 입국과 이후의 사역

그 후 나는 최순교 선생을 한국으로 데려왔다. 한국에 온 후 그는 대구신학대학교에서 신학을 시작했다. 채플 시간에 최순교 선생의 설교를 듣던 신학생들이 통곡하며 울고 주님을 찬양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때부터 그는 한국 교회 여러 곳을 다니며 강의하기 시작했다.

최순교 선생은 열방빛선교회에 소속되어 활동했다. 당시 함께 활동했던 김성근, 민선주, 배철범, 이빌립 선생과 함께 찍은 사진도 남아 있다. 이후 최순교 선생은 총신대학교 3학년까지 공부했고, 캐나다로 유학을 떠나 하나님께 쓰임 받는 선교사가 되기 위해 영어 공부에 매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