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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역이야기

1기 · 중국 1차 사역

허익두

중국 1차 사역 (1기)

소속 / 사역기수
중국 1차 사역 (1기)
역할
북한 출신 선교사 훈련생 및 파송 사역자
현재 기록
한국 거주

1기 · 사역 기록

사역의 발자취

재일동포 엘리트 가정의 추방과 상처

허익두 선생의 아버님은 일본 도쿄 와세다대학교 핵물리학 박사였다. 60년대 초 김일성이 “사회주의 조국으로 민족의 대이동”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일본 조총련계 동포들을 북한으로 끌어갈 때, 그 선전에 속아 일가족을 이끌고 북한으로 넘어왔다. 그의 아버님은 김일성의 특별한 초청으로 북한에 들어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연구소에 있던 사람으로부터 간첩으로 모함을 받아 정치범들이 가는 탄광촌으로 추방되었다.

핵물리학 엘리트였던 아버지는 평생을 시멘트 공장의 하급 노동자로 비참하게 살아야 했다. 숙청되어 시골로 내려온 뒤에는 술로 세월을 보냈고, 가정 형편은 계속 어려워졌다. 충격을 받은 익두 선생은 사회에 대한 불만과 원망이 사무쳐 어릴 때부터 자주 악몽에 시달리며 소리를 지르다 잠에서 깨곤 했다.

그러나 익두 선생은 아버님의 천재성을 닮아 총명한 머리를 가졌다. 하나를 가르치면 거의 열을 내다볼 정도였다. 북한에서 숙청된 집안의 자녀였지만 인재성을 인정받아 3년제 고급전문대까지 공부했다.

탈북과 돌가루 공장 생활

1998년에 익두 선생은 고향 친구인 박요한 선생과 그의 동생 박다윗 선생과 함께 중국으로 탈북하였다. 중국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던 익두 선생은 많은 탈북자들이 모여서 일하던 옌지시 이란진 돌가루 공장에서 일을 했다. 공안들의 습격으로 그곳을 떠나게 된 후에는 다시 옌볜 조선족 자치주 왕칭현 동명촌에 있는 돌가루 공장으로 가서 일을 했다.

칼빈 선생의 부탁을 받고 1998년 9월 주광호 선생이 돌가루 공장에서 일하고 있던 허익두 선생을 데리고 왔다. 익두 선생은 곱슬머리였다. 북한 형제들은 이발소에 가면 잘라 주는 대로 덤덤히 앉아 있었지만, 익두 선생은 중국어를 잘했다. 귀동냥으로 배운 중국어로 이래라저래라 설명하며 머리를 잘랐는데, 정성들여 자르고 나온 머리는 항상 김정일 국방위원장 모습이었다. 김정일을 그렇게 싫어하면서도 김정일 스타일을 꼭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노래와 축구, 깊고 날카로운 질문

익두 선생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좋았다. 나는 그에게 김익두 목사님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의 이름을 허익두로 부르기로 했다. 김익두 목사님은 한국에 처음으로 기독교가 들어올 때 큰 부흥사로 활동하셨던 분이다.

익두 선생은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잘 불렀다. 주말에 지린시 쑹화강변에 나가면 많은 중국인들이 모여 노래도 하고 춤도 추면서 놀았는데, 우리도 가끔 그들과 어울렸다. 익두 선생은 중국 노래 “나의 중국 마음”을 불렀다. 그날 중국인들의 기립박수까지 받았다. 신이 난 익두 선생은 그 노래를 나에게도 가르쳐 주어서 한동안 따라 부르기도 했다.

익두 선생은 축구도 잘했다. 북한 형제들이 다 축구를 좋아했지만 익두 선생은 특별히 좋아했고 또 잘 찼다. 축구할 때면 아무리 오래 차도 지칠 줄 몰랐다. 성경공부를 하면서 익두 선생이 하는 질문은 늘 깊었고 날카로웠다. 기도 시간에는 늘 어머니와 동생을 위해 기도했다. 마음이 여렸고 인정도 많았다.

무테안경과 기타, 고집 센 청년

익두 선생은 눈이 많이 좋지 않아 늘 안경을 끼고 다녔고, 안경에 대해서 신경을 많이 썼다. 사역장이 지난시로 이사 갈 때였다. 열차 시간을 기다리며 대합실에 앉아 있었는데, 여기저기 구경하던 익두 선생이 뛰어와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떠들기 시작했다. 역전 안경점에서 200위안짜리 무테안경을 150위안으로 할인해서 판다며 그걸 사 달라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다른 북한 선생들에게는 똑같이 50위안짜리 안경을 해주었기에 익두 선생 한 사람에게만 비싼 안경을 사 줄 수는 없었다. 사정을 설명하고 다음 기회에 보자고 했더니, 그는 150위안을 채울 때까지 금식하겠다고 생떼를 부리기 시작했다. 열차 시간이 다 되어 오는데도 고집을 꺾지 않아 결국 내가 지고 말았다. 150위안을 주자 익두 선생은 안경점으로 달려갔고, 열차가 떠나기 직전에야 헐떡거리며 돌아왔다. 나는 마음을 졸였지만, 그는 멋진 안경이 생겼다고 좋아했다.

정저우에서 살 때는 공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기타를 파는 상가를 발견했다. 예상대로 또다시 떼를 부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그 기타를 사 줄 때까지 금식하겠다고 난리를 부렸다. 한 번 져준 것에 재미가 든 것 같았다. 나는 냉정하게 거절했고, 며칠이 지난 후 그가 충분히 단념하는 것을 보고서야 사주었다.

한밤중 찬양 사건과 회복의 시작

모든 북한 형제들이 나를 힘들게 하고 속을 썩였지만, 익두 선생도 참으로 나를 많이 힘들게 했다. 깊은 밤, 누군가 시끄럽게 찬양을 부르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익두 선생이 통독실에서 귀에 헤드폰을 끼고 찬양을 따라 부르고 있었다. 헤드폰 때문에 자기 목소리가 얼마나 큰지 모르고 있었다.

“익두 선생, 다른 사람들 다 자고 있는데 혼자서 이러고 있으면 어쩝니까? 조용히 하세요.”

찬양에 심취해 있던 익두 선생은 놀라 나를 바라보더니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덤벼들 듯이 일어나며 소리를 질렀다. “선생님은 왜 나만 가지고 자꾸 이러십니까! 왜! 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멍하니 서 있던 내 눈에서 갑자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사역을 시작하고 처음 6개월 동안 힘든 일이 많았다.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수십 번 짐을 쌌다 풀었다 했지만, 이때가 제일 힘들었다. 내 방으로 돌아와 울며 기도했다. “하나님, 너무 힘듭니다. 왜 하필 접니까? 왜 하필 이 자립니까? 이번에는 정말 한국으로 가겠습니다.” 가방을 꺼내 짐을 다 싸고 마지막 인사를 드렸을 때, 하나님의 조용한 음성이 마음에 다가왔다. “그 짐 가방 내려놓아라. 네 자리가 여긴데 어딜 가느냐? 한국에 네가 갈 곳이 없다.”

그때 익두 선생이 내 방에 찾아와 용서를 빌었다. 나는 그에게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이미 다 주었고, 이제 더 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말하라고 호소했다. 내 생명까지도 줄 수 있다고 했다. 익두 선생은 울면서 처음 이 사역장에 올 때 공부하려고 온 것이 아니었다고 고백했다. 며칠 동안 살피다가 기회를 봐서 한국 놈은 죽이고 돈을 빼앗아 가려고 계획했었다는 것이다. 그는 자기의 결점과 장점을 솔직하게 고백했고, 잘 도와달라고 했다.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날 이후부터 익두 선생은 많이 달라져갔다.

한국 가족과 사역장의 만남

김규성 목사님의 사모님이 아들 종윤이를 데리고 우리 사역장을 찾아왔다. 그동안 우리 사역장에는 될 수 있는 한 한국 사람들을 데리고 오지 않았다. 한국 사람이 한 사람 왔다 가면 언제나 부작용이 심했기 때문이다. 귀한 사역 현장을 보고 “나도 헌금 좀 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가면, 북한 형제들은 한국 사람들이 돈 많은 재벌들처럼 돈을 보내준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김의환 목사님과 박베드로 목사님 이외에는 정말 순수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 가진 것 없이 가난한 분들이 아니면 데리고 오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북한 선생들은 나와 오래 함께 지내면서도 한국 사람들을 별로 만나지 못했고, 특별히 한국 아이와 한국 여성은 처음 만났다. 김규성 목사님의 가족들은 사역 초기부터 함께 섬겨주던 분들이라 가족처럼 특별히 반가워했다.

종윤이는 초등학생이었지만 축구를 좋아하고 제법 잘했다. 사역장에 머무는 동안 선생님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축구를 좋아하는 종윤이에게 마라도나처럼 공을 몰고 돌진하는 익두 선생은 환상 그 자체였다. 종윤이는 늘 익두 선생의 꽁무니를 쫓아다녔다. 익두 선생도 마음이 여리고 자상한 편이라 종윤이를 무척 좋아했다.

칼빈 선생과 말씀 암송 노트

처음 익두 선생은 칼빈 선생을 싫어했다. 특별히 혼자 신앙적인 냄새를 풍긴다고, 혼자 잘난 척한다고 싫어했고 자주 티격태격 싸우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익두 선생도 주님을 영접하고 나서는 누구보다 칼빈 선생을 이해했고 좋아했다. 서로 주님의 은혜를 나누고, 말씀을 토론하고, 앞으로의 사역과 사명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때 익두 선생은 늘 손에 말씀 암송 노트를 들고 다녔다. 사진을 찍을 때에도 말씀 암송 노트를 들고 찍었다. 1기 사역을 하면서 익두 선생은 가장 나를 힘들게 했던 선생이었다. 순간순간 폭발하는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 본인도 많이 힘들어했다. 하루에도 여러 번 신경질을 부리는 그를 위해서 누구보다 많이 기도했다.

익두 선생을 통해 다듬어진 나

어느 날은 너무 힘들어서 저 사람은 좀 내보내 달라고 마음먹고 기도했다. 하나님은 내가 쓸 것이니 너는 걱정하지 말라는 음성을 주셨다. 하나님이 어떻게 저 혈기 많고 괴팍한 사람을 쓰실지 궁금했다.

익두 선생을 바라보면서 늘 그의 혈기와 괴팍한 성격이 나를 힘들게 한다고 생각했다. 익두 선생만 없으면 이 사역은 더 이상 아무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어느 날 기도하던 중 은혜를 받고 충격을 받았다. 여태껏 나를 괴롭힌 것은 익두 선생이 아니라 나 자신의 탐욕과 내 안의 혈기라는 것을 발견했다. 표출할 수 없는 내 안의 혈기를 익두 선생에게서 만날 때마다 나는 고통스러웠던 것이다.

그것이 익두 선생을 통해 조금씩 다듬어지고 있었다. 주님이 익두 선생을 두고 “내가 쓴다”고 하셨던 말씀의 의미를 그때야 깨달았다. 내가 익두 선생을 다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익두 선생을 통해 나를 다듬고 있었다. 이 깨달음은 그를 향한 나의 마음을 바꾸었다. 부담스럽기만 하던 그가 고마웠고 감사했다. 그를 향한 내 마음이 변하니, 그때부터 익두 선생도 변화되기 시작했다. 그의 괴팍함과 혈기는 대부분 영적인 어두움 때문이었다. 성경을 배우면서 영적으로 회복되기 시작하자 익두 선생은 많은 부분 회복되었다.

소림사에서 성경책을 끼고 선 사람

1기생 북한 선생들이 지도자로 세워지고 첫 설교를 마친 뒤, 우리는 덩펑시 숭산 소림사로 유람을 갔다. 그때 모든 선생들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늘 조금씩 유별난 익두 선생은 성경책을 끼고 서서 사진을 찍으면서 말했다.

“선생님 나는 앞으로 목사 될 사람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하고 다르지 않습니까? 영상에서 보니까 목사님들이 사진 찍을 때는 항상 이렇게 성경책을 끼고 사진을 찍던데 나도 성경책을 끼고 찍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는 소림사까지 성경을 들고 왔다. 마음이 찡했다. “하나님 들으셨나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내 마음속에는 평양의 초대교회 목사님들이 떠올랐다. 소림사를 다녀와서부터 다른 선생들도 지도자의 품격을 갖추기 시작했고, 익두 선생이 가장 많이 변화되기 시작했다.

옌볜 파송과 정저우 사역 시작

옌볜으로 파송된 후 익두 선생은 사역장에 오기 전에 살던 옌지시 이란진으로 갔다. 그곳 사슴농장 김 집사님의 집에서 은거하면서 학생들을 모집했다. 익두 선생은 김성근, 권능 선생의 동생 김사무엘, 홍만식, 홍충신, 조선족 안 형제까지 다섯 명의 형제를 모집하고 허난성 정저우시로 내려가 사역을 시작했다.

익두 선생은 학생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특별했다. 자기 학생들을 북한선교의 최고의 일꾼들로 다듬어내겠다는 의지와 결심이 대단했다. 사역 시작부터 학생들에게 은혜를 끼치기 위해 설교 준비에 전력을 다했다. 새벽 2, 3시가 되어야 잠자리에 드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는 사역 첫 시작부터 사역장 전체 3일 금식을 시작했다. 금식을 통해 학생들에게 담배와 술을 끊게 하고, 사역장의 일과에 순종하게 했다. 익두 선생은 아파트 옥탑방에 사역장을 잡았다. 무더운 중국의 남방인데다 옥탑방에 내리쬐는 한낮의 태양 열기는 사람이 실신해 쓰러질 정도였다. 그런 곳에서도 학생들을 다그쳐 하루 8시간 통독을 했고, 하루 두 번 2시간씩 기도훈련을 했다.

리더가 된 뒤에 알게 된 마음

옌지에 머물면서 1기생 선생님들의 뒤 수습을 끝내고 뒤늦게 익두 선생의 사역장에 갔다. 말 안 듣는 학생들을 다그치며 외롭게 사역하던 익두 선생은 내가 오자 반가운 나머지 눈물을 흘렸다. 학생 때는 몰랐는데 사역장의 리더가 되니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인다고 했다. 그는 그동안 힘들었던 일들을 하소연했다.

재미있는 것은 김성근 형제가 익두 선생이 내 속을 썩이던 모양을 그대로 익두 선생의 속을 썩이고 있었다는 것이다. 익두 선생은 말했다. “아이구 선생님. 나 성근 이 저놈 때문에 미칠 것 같슴다. 글쎄 내가 학생 때 선생님에게 했던 짓을 옆에서 본 것처럼 흉내내구 있지 않구 뭠까? 혼내구 싶어두 내 생각이 나서 그러지두 못하겠구 정말 속상함다. 그때 선생님두 지금 내처럼 속상했슴까? 아이고 속 터져라 속 터져…”

주님은 어떤 사람이든 그 사람이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신다. 세상에서도 심은 대로 거두는 원리는 동일하지만, 특히 선교사들에게는 무서울 정도로 정확했다. 익두 선생뿐 아니라 다른 선생들도 자기가 했던 그대로 학생들에게 당하는 것을 보았다.

두장옌 유람과 가족의 동참

익두 선생의 헌신과 열정으로 인해 학생들은 하루하루 달라져갔다. 꾸준한 통독, 익두 선생이 심혈을 기울여 전하는 설교 말씀, 그리고 기도를 통해 그들에게 조금씩 신앙이 싹터 갔다. 변화되어 가는 형제들을 바라보며 익두 선생은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만 보람도 느끼면서 사역에 정을 붙이기 시작했다.

내 가족들이 한국에서 중국으로 들어올 때였다. 권사님이신 어머님과 아내는 어렵고 위험한 북한선교에 꼭 가족이 다 동참해야만 하는 법이 없다고 반대했다. 아내는 무섭고 너무 힘든 사역이라는 것을 알기에 어떻게 하든 중국으로 들어오지 않으려고 했다. 한 달 동안 한 끼 금식과 철야기도를 하면서 이 잔을 옮겨 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결국 끌려오다시피 중국으로 왔다.

가족들은 배를 타고 칭다오로 들어왔다가 다시 정저우로 내려와 익두 선생의 사역장에 들렀다. 며칠 동안의 고단한 여행으로 몹시 지쳐 있었지만, 익두 선생 사역장 형제들은 우리 가족이 온다고 하루 종일 청소를 하고 음식을 장만하며 우리를 환영했다. 북한 형제들은 아이들을 보며 신기해했고, 특히 다섯 살 막내 명현이를 서로 안아 보겠다고 야단이었다. 아이들은 낯설고 얼굴이 시커먼 북한 아저씨들의 과잉 친절이 무서워 다른 방으로 도망갔다.

식사 후 익두 선생의 인도로 사역장 형제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다. 어머니와 아내는 익두 선생의 설교를 들으면서 은혜를 많이 받았다. 그리고 고백했다. “우리 가족을 이 일을 위하여 부르셨군요. 알겠습니다. 기쁨으로 감당하겠습니다.” 아내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후회 없이 함께 이 일을 잘 감당하고 있다. 그때 익두 선생이 무슨 설교를 했는지 늘 궁금하다.

토론식 성경공부와 지도자 훈련

익두 선생은 학생들을 잘 가르쳤다. 학생들이 기계적으로 성경을 읽는 것을 막으려고 저녁에는 통독 과정에서 마음에 와 닿았던 구절과 이해하기 힘든 구절들을 서로 발표하고 토론하게 했다. 마지막에는 자신이 학생들의 의견을 종합한 다음 결론을 짓고 넘어갔다.

토론식 공부의 효과는 컸다. 학생들은 전 같으면 건성건성 넘어가던 구절도 곰곰이 따져보며 더 정확하고 깊이 있게 말씀을 이해하고자 했다. 익두 선생은 말씀을 얼마나 많이 통독하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학생들이 숲만 보고 나무는 보지 못하는 우를 범치 않게 하려고 했다. 성경 한 구절이라도 정말로 잘 이해하고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도록 가르치려고 애를 많이 썼다.

신약성경 100독을 넘어섰을 때는 기계처럼 돌아가던 일과를 바꾸었다. 조선족 안 선생을 통해 하루 40분씩 중국어 공부도 시키고, 기도 시간에도 통성기도와 묵상기도, 큐티를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했다. 지도자 양성 단계로 들어가면서부터는 본격적으로 설교 훈련을 시작했다. 설교가 끝나고 예배가 다 끝난 후에는 30분 동안 설교에 대해 질문하고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익두 선생의 열정적인 노력에 의해 익두 선생 팀 북한 형제들도 모든 지도자 양성 과정을 마치고 북한선교사로 임명받았다. 그들을 파송하는 날 이현수 선생이 비장한 각오로 말했다. “선교사님, 잘 하겠슴다. 맡겨만 주십시오.”

파송과 이어진 아픔

김의환 총장님이 익두 선생 사역장에 오셨을 때, 어린 사무엘 형제를 가방 안에 넣어서 한국으로 데려가고 싶다고 몇 번씩이나 말씀하셨다. 그게 가능했다면 정말 그렇게 할 태세였다. 당시 사무엘 형제는 15살이었지만 나이에 비해 너무 어려 보였다.

익두 선생의 사역장에서는 유칼빈 선생, 김예진 선생, 이현수 선생이 파송되어 옌볜으로 올라갔다. 사무엘 형제는 15세였고 홍충신 형제도 18세라 너무 어려 파송에서 제외되었다. 홍만식 선생은 그때까지 담배를 끊지 못해 조금 더 훈련받고 파송하기로 했다.

파송예배가 끝나고 칼빈 선생이 찾아와 말했다. 중국에 들어올 때 어머니가 많이 앓고 있었고 집에는 식량도 약도 없어 자신이 중국으로 나왔는데, 일 년 동안 공부하다 보니 집에 계신 어머니가 어떻게 되었는지 몹시 걱정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파송되면 학생 모집보다 먼저 북한 집에 갔다 와야 할 것 같다고 했다. 나는 그의 손을 붙잡고 국경을 넘어 집에 무사히 다녀올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한 달 후 익두 선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김예진 선생과 이현수 선생이 학생을 모집하러 왕칭 쪽으로 떠난 후 소식이 끊어졌다고 했다. 북한으로 들어간 칼빈 선생도 돌아올 시간이 지났는데 소식이 없었다. 전화기 저쪽에서 익두 선생은 나지막한 소리로 울고 있었다. 1년간 동고동락하며 키운 학생 세 명을 잃어버린 그의 마음이 충분히 느껴졌다. 그 후 익두 선생은 다시 연락이 오지 않았다. 믿고 파송한 형제들이 돌아오지 않자 사역을 포기한 것 같았다.

한국에서의 현재와 다시 기다리는 부르심

익두 선생은 그때 잃은 자신감을 한국에 와서도 쉽게 회복하지 못했다. 지금도 여러 가지 생업에 몰두하고 있다. 몇 년 전에 익두 선생을 만나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제 세상일을 그만큼 했으면 다시 하나님의 일을 해보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익두 선생은 자기가 한국에 와서 10년 동안 해놓은 일은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 둘 키워 놓은 것뿐이라고 지나간 세월을 눈물로 한탄했다.

그는 말했다. “선생님 다시 하나님의 일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제 다시 한다면 정말 진실하게 제대로 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다시 저를 불러주시기를 정말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익두 선생의 마음 깊은 곳에는 아직도 중국에서 북한 형제들을 가르치던 사역자의 정신이 조금도 녹슬지 않고 살아 있었다. 나는 지금도 익두 선생이 다시 돌아와 하나님의 일꾼으로 준비를 한다면 모든 것을 다 바쳐 이끌어주고 도와주려고 생각하고 있다. 주님의 일을 하게 되면 정말 큰 사람이 될 텐데, 허무한 시절을 보내는 것이 정말 아까운 사람이다.

육성 그대로

남긴 글 · 편지

허익두 선생이 석은미 사모님께 보낸 편지

사모님께 드립니다. 안녕하십니까. 헤어진 지 한 달 밖에 안됐는데 많은 세월이 흐른 것 같군요 한 달이라면 어제 그제로 생각 되겠는데 오히려 수많은 날과 달이 흘러 지나간 것처럼 생각이 됩니다. 이상하지요? 왜 그런지...저희는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 사랑과 보호하심 속에서 무고히 잘 지내고 있습니다. 사모님도 건강히 잘 지내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종화 종윤이도...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안부를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번에는 왜 그런지 겨를이 없어서 편지쓸 시간이 없어서 (잠잘 시간은 있는데 말입니다.) 로인 분들께서 인사말 드리지 못합니다. 사모님 대신해서 잘 전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복음의 위대한 빛으로 조국반도가 하나로 되는 그 날 까지 긍지감을 않고 민족 앞에 떳떳이 설 수 있도록, 몸은 비록 쇠잔하여 가도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다고 한 사도바울의 외침과 같이 끊임없는 기도와 간구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빛내어 주시기를 바란다고 말입니다. 뿌리가 억세고 튼튼해야 그 가지도 건강해지고 무성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그래서 순교선생님의 오늘까지의 성장이 무심히 보게 되지 않습니다.종화 종윤이도 이런 훌륭한 뿌리 분들- 1세의 분들의 영향과 지도 밑에서 훌륭히 잘 육성되리라 보아집니다. 하나님 바라시는 풍성한 열매가 선생님대에 열리게 되겠는지 아니면 종화 종윤이의 때에 맺히게 되겠는지 오직 주님만이 아시고 계획하실 일이라 생각됩니다. 사모님과 할아버지 할머니 분들이 주님 이미 뿌려놓으신 말씀의 씨를 잘 가꾸고 물을 주고 해서 또 한 세대의 주님을 위해 헌신하는 귀한 복음의 귀한 일군이 장성케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합니다. 참 사모님 가르쳐주신 "주안에 있는 나에게 " 부를 때마다 은혜와 사랑 충만한 그 나날들이 떠오릅니다. 보고도 싶구요, 원래 이 말이 제일 첫 머리에 나와야 하는건데... 요즘은 권능선생 (우리는 며칠전부터 선생님이라 부르기로 했습니다 정말 황송하기 그지없습니다.) 저의 지도밑에 이 찬송이 안 빠지는 날이 없습니다. 참 은혜스럽기도 합니다. 사모님도 물론 같은 심정이겠지요. 여기까지 쓰니 할 말이 없어졌습니다. 물론 종이 여백도 얼마 안 남았고요 오래 만에 귀가한 남편 되시고 아버지 되시고 아들 되시는 분께 온 가족이 합심하여 기쁘고 즐겁고 하나님께 영광 되는 행복한 순간이 차례지기를 부탁드리며 이만 펜 놓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 함께 찍었던 사진 중에서 몇장 꼭 철저히 보내주십시오 기도제목 종윤이 편지에 적었는데 해주시기 바랍니다. 믿습니다.99년 3월 1일 정주에서 익두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