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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역이야기

3기 · 중국 1차 사역

임종철

중국 1차 사역 / 이용섭·김누가 선생 사역장 / 3기 북한 선교사 임명

소속 / 사역기수
중국 1차 사역 / 이용섭·김누가 선생 사역장 / 3기 북한 선교사 임명
주요 사역 지역
서안, 화산, 연변, 한국 울산
주요 역할
성경훈련생, 공동체의 연장자, 북한 선교사
최종 기록
2001년 12월 한국 입국 후 울산 정착. 이후 아내와 두 딸을 찾았다는 소식이 전해짐

3기 · 사역 기록

사역의 발자취

흩어진 가족을 그리워하며 눈물로 말씀을 붙든 사람

함경북도 종성군에서 온 마흔한 살의 아바이

임종철 선생은 북한 함경북도 종성군 출신이었다. 사역장에 들어왔을 때 그의 나이는 마흔한 살이었지만, 북한 형제들은 모두 그를 “아바이”라고 불렀다.

실제 나이보다 훨씬 늙어 보였기 때문이다. 얼핏 보면 예순이 넘은 사람처럼 보였다. 그 얼굴에는 가족을 잃고 국경을 떠돌며 견뎌야 했던 시간이 깊게 새겨져 있었다.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넘은 두만강

임종철 선생은 북한에 아내와 열네 살, 여덟 살 된 두 딸을 두고 중국으로 넘어왔다. 가족에게 가져갈 양식을 구한 뒤 다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중국 땅에 들어온 순간부터 공안의 추적을 피해 다녀야 했다. 체포되면 북한으로 송환되어 감옥에 갇히거나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먹을 것을 구하는 일보다 살아남고 몸을 숨기는 일이 더 다급해졌다.

남편을 찾아 중국으로 온 아내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아내도 그를 찾아 두만강을 건넜다. 하지만 아무런 연고도 없이 넓은 중국 땅을 떠도는 남편을 찾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아내는 여러 곳을 헤매다 인신매매 조직에 붙잡혀 중국 어딘가로 팔려 갔다. 임종철 선생은 뒤늦게 이 소식을 들었지만, 아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흩어져 버린 두 딸과 며칠 만에 늙어 버린 사람

부모가 모두 사라진 뒤 북한에 남겨진 두 딸도 고향을 떠나 어디론가 흩어졌다. 임종철 선생은 고향 사람을 통해 아내와 딸들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가족 네 사람이 생사도 알 수 없는 채 서로 흩어졌다는 사실은 그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마흔 살에 불과했던 그는 며칠 만에 예순 살 노인처럼 늙어 버렸다.

이용섭 선생을 만나 사역장으로 들어오다

방향을 잃고 떠돌던 임종철 선생은 학생 모집을 위해 나온 2기생 이용섭 선생을 만났다. 그는 이용섭 선생의 제자가 되어 서안의 사역장으로 들어왔다.

사역장은 가족도 거처도 잃은 그가 다시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며 말씀을 배울 수 있는 곳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아내와 두 딸을 향한 슬픔이 여전히 깊이 남아 있었다.

기도할 때마다 말없이 울었던 사람

임종철 선생은 기도만 시작하면 울었다. 어떤 말을 길게 하거나 큰 소리로 부르짖기보다, 하나님 앞에 앉아 그저 눈물을 흘렸다.

자신의 힘으로 가족을 찾을 수도, 그들의 생사를 확인할 수도 없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매달릴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었다. 그의 기도는 말보다 눈물이 더 많은 기도였다.

고통이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문이 되다

임종철 선생이 겪은 깊은 아픔은 오히려 하나님을 더 빨리 받아들이게 했다. 그는 마음속의 고통과 한을 말씀을 배우는 데 쏟아부었다.

가족을 생각하면 무너졌지만,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시간에는 다시 버틸 힘을 얻었다. 상실의 아픔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말씀은 그 아픔을 품고 살아갈 수 있도록 그를 붙들어 주었다.

소록도 북성교회에 가족을 위한 기도를 부탁하다

임종철 선생은 소록도 북성교회 성도들의 중보기도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큰 희망을 품었다. 그들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하신다는 말을 믿고, 남효선 장로님과 성도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편지에는 중국으로 오게 된 과정과 흩어진 가족의 사정이 담겼다. 그는 아내와 두 딸이 굶주림과 추위 속에서도 생명을 보존하고,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간절히 부탁했다. 편지 전문은 문서 뒤의 부록에 별도로 수록했다.

김누가 선생 아래에서 겸손히 말씀을 배우다

이용섭 선생이 전문 학생 모집 사역을 위해 연변으로 파송된 뒤, 임종철 선생은 김누가 선생의 사역장에서 공부했다.

그는 자신보다 훨씬 어린 김누가 선생의 말을 철저히 따르며 성경을 배웠다. 나이와 경험을 앞세우지 않았고, 말씀을 배우는 일에서는 누구보다 겸손했다.

살벌한 공동체를 평온하게 만든 아바이

사역장에는 성격이 거칠고 갈등이 잦은 북한 형제들이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도 임종철 선생의 말은 귀담아들었다.

그는 형제들을 몰아붙이거나 권위를 내세우지 않았다. 부드럽고 차분하게 사람들을 대했고, 자신의 아픔을 다른 사람에게 쏟아내지 않았다. 그의 존재는 사역장의 분위기를 평온하게 만드는 힘이 되었다.

성경 100독과 화산의 임명예배

임종철 선생은 사역장에서 성경을 100번 이상 통독했다. 말씀과 공동체 훈련을 통해 예수님을 영접했고, 북한 선교사로 세워지는 모든 과정을 마쳤다.

그는 3기 북한 선생들과 함께 화산에 올라 북한 선교사 임명예배를 드렸다. 가족을 찾기 위해 중국을 떠돌던 사람이 이제는 북한과 동포에게 복음을 전할 사명자로 세워진 것이다.

서안에서 체포되어 북한으로 끌려가다

임종철 선생은 실제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서안에서 중국 공안에게 체포되었다. 다른 북한 형제들과 함께 북한으로 송환되었다.

다행히 학생 신분으로 훈련만 받았고 별도의 사역을 시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치범수용소로 보내지지는 않았다. 그는 몇 달 동안 북한 감옥에 갇혀 지냈다.

감옥에서 나온 뒤 다시 중국으로

몇 달 뒤 감옥에서 석방된 임종철 선생은 다시 북한을 탈출해 중국으로 넘어왔다. 그리고 흩어진 사역자들을 수습하던 사람들을 찾아왔다.

한 번의 탈북과 북송, 감옥 생활을 겪고도 그는 다시 자유와 신앙 공동체를 찾아 국경을 넘었다. 가족을 만나고 싶다는 간절함과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그를 다시 움직이게 했다.

2001년 겨울, 한국으로 들어오다

2001년 12월 겨울, 김성근 선생이 한국으로 입국할 때 임종철 선생도 함께 들어왔다. 오랜 도피와 감옥 생활을 끝내고 정착할 수 있는 땅에 도착한 것이다.

한국에 온 그는 최광 선교사를 찾아와 생활 형편을 둘러보았다. 많은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떠나면서 200만 원을 건넸다.

200만 원에 담긴 감사의 마음

그 돈은 한국에 막 정착한 탈북민에게 결코 가벼운 금액이 아니었다. 임종철 선생은 자신이 받은 사랑과 도움을 잊지 않았고, 가장 필요한 사람에게 자신의 것을 나누었다.

많은 북한 형제들이 한국으로 인도되었지만, 이렇게 따뜻한 마음으로 응답한 일은 처음이었다. 말이 적었던 그의 감사와 신뢰가 200만 원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울산 정착과 가족을 찾았다는 소식

임종철 선생은 울산에서 새로운 정착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그가 아내와 딸들을 찾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중국에서 편지를 쓰며 간절히 부탁했던 가족의 만남이 마침내 이루어졌다는 소식이었다. 오랫동안 그의 눈물과 기도 속에 있던 가족이 다시 연결되었다는 이야기는 큰 기쁨이 되었다.

역사적 평가 - 눈물로 공동체를 품은 사람

임종철 선생의 이야기는 가족을 잃은 슬픔이 한 사람을 무너뜨리는 데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을 붙들고 다른 사람을 품는 힘으로 변화된 과정이다.

그는 기도할 때마다 울었지만 자기 아픔을 앞세워 공동체를 어렵게 하지 않았다. 어린 지도자에게 겸손히 배우고, 거친 형제들 사이에서 평화를 이루었으며, 받은 사랑을 자신의 것으로 갚았다. 그의 삶은 깊은 상실 속에서도 믿음과 감사, 섬김을 잃지 않은 한 사람의 증언으로 남아 있다.

육성 그대로

남긴 글 · 편지

소록도 북성교회 남효선 장로님께 보낸 편지

작성 당시의 표현과 표기를 최대한 보존하였다.

소록도 북성교회 남효선 장로님에게 드립니다.

우리들에게 힘을 주시고 용기를 주시는 솔록도 북성교회 남효선 장로님과 성도님들에게 진심으로 되는 인사를 보냅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북한 땅에서 살다가 버러지보다 못한 인생을 유지해 보려고 중국 땅에 와서 살 길을 찾아 다녔건만 찾을 길이 없어 눈물을 먹으면서 돌아다니다가 따사로운 품속에 안겨 왕 같은 권세를 가지고 자기 자신을 단련하며 나아가고 있습니다. 저의 지난 기간 인생살이를 간단히 적으려고 합니다.

암흑의 세상 북한 땅을 박차고 중국 땅에 와서 살아 보려고 애를 썼건만 진정한 품이 없는 것으로 해서 8살짜리 딸애를 그 누구에게 주지 않으면 안 되었고 찢어지는 가슴을 달랠 길 없고 한탄할 곳도 없어 숨어 살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후에 안 소식이지만 저의 처도 중국 어느 지방에 내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가만히 두만강을 도강해 왔건만 일이 안 되는 일이라 그 누구에게 잡혀 중국 사람에게 팔려 갔다고 합니다. 저의 딸(14살) 홀몸에 북한 땅에 남아 있는데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는 처지입니다. 그 어린 것이 먹을 것도 없고 부모도 없이 어떻게 살아가겠습니까--- 이 생각 저 생각 할 때면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습니다. 아버지로서 아버지 구실도 못하고 또 할 방도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가족 네 식구는 생사 운명도 모르고 갈라졌습니다.

저의 아버지도 앞으로 조국이 통일되면 고향에 가 보자고 하였지만 꿈도 허물어지고 말았습니다. 아버지 고향은 경기도 서울시 영등포구 대방동에서 살았습니다.

소록도 교회 남효선 장로님과 성도님들이 우리들을 위해 기도해 주신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남효선 장로님과 성도님들에게 부탁하려고 합니다. 우리 북한 사역을 위해 힘써 나가고 계시는 귀하신 라 선생님께 힘과 용기를 북돋아 주시는 기도를 해 주십시오.

또한 저의 아내와 두 딸을 위해서 기도하여 주십시오. 그들이 배고픈 고생 없이 추위에 견딜 수 있게 생명을 연장시켜 달라고, 우리들의 만남을 하루 속히 이루어 달라고 기도해 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소록도 북성교회 남효선 장로님과 성도님들의 병이 하루 빨리 완치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면서 귀하신 몸 건강과 맡은 바 병 치료에서 크신 기적이 일어나리라고 굳게 믿고 사업과 생활에서 부흥이 일어나기를 진심으로 믿으면서 안녕히 계십시오.

2001년 1월 22일림종철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