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대학교를 졸업한 북한의 엘리트
주성하 기자는 북한에서 김일성대학교를 졸업했다. 김일성대학교 졸업생 가운데 처음으로 탈북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북한 사회의 중심 교육기관에서 공부한 사람이 체제를 떠났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탈북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4기 · 중국 1차 사역
중국 1차 사역 / 4기 사역장 합류 예정
4기 · 사역 기록
서안에 도착한 날 체포되었지만, 다시 길을 찾아 북한을 증언하는 사람이 되다
주성하 기자는 북한에서 김일성대학교를 졸업했다. 김일성대학교 졸업생 가운데 처음으로 탈북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북한 사회의 중심 교육기관에서 공부한 사람이 체제를 떠났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탈북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재중 탈북 생활을 하던 주성하 기자는 이용섭 선생을 만났다. 이용섭 선생은 그를 성경통독과 선교훈련이 진행되던 서안 사역장으로 데려왔다.
주 기자가 서안에 도착한 날은 2001년 6월 11일이었다. 그러나 그날은 서안의 사역장 전체가 중국 당국의 단속을 받던 시기와 겹쳤다.
주성하 기자는 사역장에 들어온 당일 중국 공안에 체포되었다. 성경을 배우거나 공동체 생활을 시작할 시간조차 없었다.
오랫동안 훈련받은 다른 선생들과 달리 그는 사역장과 관련된 구체적인 활동이나 역할을 맡기 전 체포되었다.
중국에서 체포된 주성하 기자는 다른 탈북민들과 함께 북한으로 북송되었다.
사역장에 머문 기간이 하루에 불과했기 때문에 북한 당국은 그를 장기간 기독교 활동을 한 정치사범으로 분류하지 않고 생계형 탈북자로 처리했다.
정치범수용소로 보내지지는 않았지만 북송 이후의 생활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는 조사와 구금, 강제적인 처벌 과정에서 많은 고생을 겪었다.
긴 고통의 시간을 견딘 끝에 그는 석방되었다. 서안에 하루 머문 짧은 시간이 그의 삶을 완전히 뒤흔든 사건이 되었다.
석방된 주성하 기자는 다시 북한을 탈출했다. 한 번 북송되어 고통을 겪은 뒤에도 북한을 떠나야 한다는 결정을 포기하지 않았다.
재탈북 후 중국에서 생활하던 그는 약 1년 뒤 한국에 입국했다.
한국에 정착한 주성하 기자는 자신의 북한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언론인의 길을 걸었다. 이후 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하며 북한 사회와 탈북민 문제를 알리는 일을 해 왔다.
김일성대학교에서 배운 경험과 북한 체제 안에서 살아온 기억은 북한을 분석하고 증언하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한국에 처음 왔을 당시 주성하 기자에게는 신앙이 없었다. 그는 서안에 도착한 날 체포되어 북송되고 큰 고통을 겪은 일 때문에 서안 사역을 진행했던 선교사님을 많이 원망했다.
그에게 서안 사역장은 말씀을 배우기 시작한 장소라기보다 체포와 북송의 출발점으로 기억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흐른 뒤 주성하 기자는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신앙이 생기면서 서안에서 겪었던 사건과 자신의 삶을 이전과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원망과 상처에만 머물지 않고, 자신이 살아남아 한국에 오게 된 과정과 앞으로 감당해야 할 역할을 생각하게 되었다.
주성하 기자는 황금종교회를 찾아와 서안에서 겪었던 사건을 간증했다.
사역장에 들어간 지 하루 만에 체포되어 북송되었던 경험, 다시 탈북해 한국으로 오기까지의 과정, 그리고 신앙을 받아들이며 변화된 마음을 성도들과 나누었다.
그는 간증과 함께 북한을 향한 자신의 비전을 나누었다. 언론인으로서 북한의 현실을 알리고, 북한 주민과 탈북민의 삶을 한국 사회와 세계에 전하는 일을 자신의 역할로 받아들였다.
성경훈련을 충분히 받거나 북한 선교사로 임명되지는 못했지만, 그는 자신의 전문성과 경험을 통해 북한을 증언하는 또 다른 형태의 사역을 이어 가게 되었다.
주성하 기자가 서안 사역장에 머문 시간은 단 하루였다. 그러나 그 하루는 체포와 북송, 재탈북과 한국 입국, 언론 활동과 신앙의 회복으로 이어지는 긴 이야기의 출발점이 되었다.
처음에는 원망으로 기억했던 사건을 훗날 간증으로 다시 꺼내 놓았다는 점에서, 그의 이야기는 상처가 새로운 사명과 증언으로 변화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