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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역이야기

2기 · 중국 1차 사역

김권위

중국 2차 사역(2기) / 시안 사역장 총괄

소속 / 사역기수
중국 2차 사역(2기) / 시안 사역장 총괄

2기 · 사역 기록

사역의 발자취

온성군 철도 공무원에서 탈북자가 되다

김권위 형제는 북한 온성군에서 철도 공무원으로 일하던 사람이었다. 북한에서 가난하게 살지는 않았다. 북한과 중국을 오가는 장사꾼들과 거래하며 돈을 벌었고, 북한과 중국의 조직폭력배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각종 밀수 거래에도 관여하며 남부러울 것 없이 살았다.

그러다 몇 사람을 중국으로 탈북하도록 도와준 일이 보위부에 알려졌다. 그는 보위부 감옥에 갇혔다가 잠깐 풀려난 틈을 타 중국으로 탈북했다.

중국에서 조폭 생활을 시작하다

중국으로 나와 보니 앞서 탈북한 친구들은 이미 지역에서 이름난 조폭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김권위 형제는 진칼빈 선생의 형, 박요한 선생의 동생 박다윗, 2기생 정모세 형제와 함께 조폭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중국에서도 위험한 세계의 한복판에 있었다. 생존을 위해 넘어온 중국 땅에서 다시 폭력과 밀수, 도피의 삶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칼빈 선생 생일 모임과 축복송을 피하던 사람

1999년 5월 17일, 칼빈 선생의 생일에 학생 모집을 위해 옌볜으로 파송된 1기생 선생들이 왕칭의 한 산골 마을에 모였다. 김권능 선생도 그곳을 찾아갔고, 칼빈 선생의 형과 탈북자 출신 조폭들도 함께 있었다. 그들 가운데 김권위 형제가 있었다.

그 자리에는 탈북자 출신 선교사들과 탈북자 출신 조폭들이 함께 앉아 있었다. 1기생 선생들은 기도하고 찬송을 불렀고, 한 사람씩 돌아가며 축복송도 불렀다. 조폭들도 자기들을 축복해 주는 노래를 부담 없이 받아들였지만, 김권위 형제만은 유별나게 축복송을 싫어하며 피해 버렸다.

김권능 선생은 그 모습을 보며 저 사람은 도저히 하나님을 믿을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헤어졌다.

왕칭 숲속 마을에서 김권능 선생과 다시 만나다

김권능 선생은 학생 모집을 마치고 산둥성 지난시로 내려가 사역을 하다가 실패한 후, 아버님이 살고 있던 왕칭의 깊은 산속 오두막으로 돌아왔다. 그곳에는 많은 북한 형제들이 김권능 선생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 중에 김권위 형제도 있었다.

옌지의 조폭들은 김권위 형제와 정모세, 박다윗 형제에게 언제나 가장 위험하고 살벌한 일을 시켰다. 상대 조직을 찾아가 칼로 찌르고, 총으로 쏘고 도망가는 일이었다. 이 때문에 그는 늘 공안과 상대 조폭들을 피해 은밀하게 다녀야 했다.

추격과 수배 끝에 사역장으로 들어오다

김권위 형제에게 피해를 입은 상대 조직은 그를 표적으로 삼아 추적했고, 공안도 이들의 활동을 알게 되어 수배령을 내렸다. 어느 날 길을 가던 중 승용차가 옆에 서더니 창문이 내려가고 총구가 자신을 겨냥하는 것을 보고 도망쳤다. 숙소로 가 보니 경찰들이 이미 숙소를 포위하고 있었다.

결국 김권위 형제는 왕칭 깊은 산속에 있는 김권능 선생의 아버님 집에 숨어 지내다가 김권능 선생을 만났다. 김권능 선생이 “성경 공부하러 갈 겁니까?”라고 묻자 그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갈 겁니다. 같이 갑시다.”

청두로 향하던 길, 톈진역 위기를 넘기다

1999년 8월 초, 김권위 형제는 김권능 선생 팀에 소속되어 쓰촨성 청두시로 내려갔다. 김권능 선생은 첫 번째 사역을 시작할 때 열차에서 네 명의 형제가 체포되어 가는 아픔을 겪은 적이 있었기에, 이번에는 26시간 동안 한잠도 자지 못하고 계속 기도하며 갔다.

톈진역에서 사고가 터졌다. 역전 공안이 많은 사람들 중 김권위 형제를 지목해 차표를 보자고 했다. 김권위 형제는 중국어를 몰라 멍하니 서 있었다. 공안은 그를 연행하려 했고, 김권능 선생은 함께 잡혀갈 각오로 나섰다.

김권능 선생은 김권위 형제를 한국 유학생이라고 둘러댔다. 마침 김권위 형제는 가난한 탈북자처럼 보이지 않는 옷차림이었고, 김권능 선생의 가방에는 캐나다에서 온 영어 표기의 약들이 있었다. 공안은 특별한 혐의를 찾지 못하고 두 사람을 보내 주었다. 그렇게 김권위 형제는 위기를 넘겼다.

은혜 이후 성경에 몰입하다

성경 공부를 시작한 김권위 형제는 이 공부를 계속해야 할지 갈등했다. 앞으로 살아가는 데 성경 공부가 어떤 유익이 되는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은혜를 받은 후부터는 갈등하지 않고 열심히 공부했다.

그는 성경 공부에 깊은 애정을 가졌다. 다른 형제들은 성경을 많이 읽는 데 집중했지만, 김권위 형제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도표를 그리고, 주제별 말씀을 뽑아 메모하면서 성경을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그가 중국에서 공부하던 책은 훗날 김의환 목사님도 감탄하며 사인해 주실 만큼 정리되어 있었다. 그 책은 김권위 선생의 보물이 되었고, 한국까지 가져와 간직하다가 열방빛선교회에 기증했다.

거칠지만 예의를 알던 사람

김권위 형제는 옌볜에서 조폭으로 살다가 사역장에 들어왔지만, 사람이 무조건 살벌하고 거칠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힘없고 연약한 사람들 앞에서는 온화했고, 나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는 예의를 갖추었다.

그러나 거칠고 무례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사정을 봐 주지 않았다. 그는 특별히 장만식 아바이를 좋아하고 잘 따랐다. 두장옌에 갔을 때 장만식 아바이와 장난치며 찍은 사진도 남아 있다.

마약은 끊었지만 담배 앞에서 멈춰 선 파송

김권위 형제는 조폭 생활을 하며 마약을 많이 했다. 양팔 정맥을 따라 주사 바늘 자국이 긴 띠처럼 남아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은혜를 받은 후 마약을 끊었다. 성경 공부, 기도, 설교, 전도 등 사역에 필요한 훈련도 잘 이겨냈다. 다만 담배는 끝까지 끊지 못했다.

김권능 선생 팀이 파송되는 날, 김권위·김누가·강규홍 선생은 나를 찾아왔다. 그들은 아직 담배를 끊지 못했고 성경적 지식도 더 준비해야 한다며 파송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 나는 세 사람을 김권위 선생 책임 아래 산시성 시안시로 보내 보충 사역을 진행하게 했다.

시안 보충 사역장의 리더가 되다

그 후 바울 선생 팀과 허익두 선생 팀에서 훈련을 마무리하지 못한 선생들도 김권위 선생의 보충 사역장으로 보냈다. 이때부터 김권위 선생은 성실하게 리더십을 발휘하며 사역을 이끌기 시작했다.

그는 홍만식, 김누가, 강규홍 선생들을 책임지고 파송되어 옌볜으로 올라갔다. 떠나기 전 나는 체포되지 말라고 거듭 당부했다. 김권위 선생은 이미 그 문제로 기도와 금식을 많이 했고, 한 사람도 체포되지 않고 돌아오겠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한 명도 체포되지 않고 학생들을 데려오다

여러 팀들이 파송되어 나가면 대부분 전부 혹은 일부가 체포되곤 했다. 그러나 2기생 선생들 중 가장 마지막에 파송된 김권위 선생 팀은 달랐다. 그는 옌볜에서 조폭 생활을 하며 은밀하게 숨어 다녔고, 공안들의 행동 방식도 잘 알고 있었다.

그 결과 김권위 선생 팀은 단 한 명도 체포되지 않고 성공적으로 학생들을 모집해 데리고 내려왔다. 먼저 파송되었다가 연락이 끊겼던 김예진 선생까지 찾아서 함께 데려왔다.

잃었던 김예진 선생을 다시 찾다

허익두 선생과 함께 파송되었던 김예진 선생은 이현수 선생과 함께 왕칭으로 학생들을 찾으러 갔다가 중국 공안에게 체포되어 곧장 북한으로 호송되었다. 그는 사역에 관한 이야기를 진술하지 않았고 노동단련대에 보내졌다.

김예진 선생의 고향 온성은 중국과 북한의 국경 지대였다. 그는 단련대에서 도망쳐 다시 중국으로 넘어왔다. 그러나 허익두 선생은 이미 떠나버려 사역장과 연락할 길이 없었다. 결국 깊은 산속에서 북한 사람들과 살다가 학생 모집을 하던 김권위 선생 팀을 만나게 되었다.

북한에 체포되었던 김예진 선생을 김권위 선생이 찾아 데리고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으시는 주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9개 사역장으로 확장된 사역과 관리 체계

김권위 선생까지 학생 모집에 성공하자 사역장 수는 9개로 늘어났다. 나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규모가 되었다. 나는 정용철, 최순교, 이용섭, 강석환, 이빌립 선생 사역장은 김권능 선생이 관리하게 하고, 박다윗, 홍만식, 강규홍, 김예진 선생 사역장은 김권위 선생이 관리하게 했다.

그 후 김권능 선생이 사역장을 떠난 뒤에는 김권위 선생이 모든 사역장을 총괄하게 되었다.

총팀장 김권위, 질서와 두려움 사이

김권위 선생은 모든 면에서 성실하게 사역을 감당했다. 그러나 옛날 조폭으로 살던 습성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해 어려움도 있었다. 사역장을 돌다가 잘못하는 일이 보이면 거칠게 욕을 했고, 힘이 세다고 잘난 척하거나 팀장의 말을 듣지 않는 형제가 있으면 달려가 다시는 머리도 못 들게 혼을 냈다.

덕분에 사역장들은 질서 있게 잘 돌아갔지만, 어떤 때에는 마치 조폭 집단 같아 보일 만큼 불안하기도 했다. 그는 강한 리더십으로 사역장을 붙잡았지만, 동시에 많은 형제들이 두려워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조폭 친구들이 북한 선교사가 되다

김권위, 정모세, 박다윗 선생은 함께 옌지에서 조폭 생활을 하다가 우리 사역장에 들어와 북한 선교사가 된 사람들이었다. 세 사람은 각별한 우정을 나누었다.

이들의 변화는 놀라운 일이었다. 폭력과 도피의 세계에서 살던 사람들이 말씀을 배우고, 훈련을 받고, 북한선교를 위해 세워지는 길로 들어온 것이다.

2001년 한국행과 서안 형제 구출 사역

우리 사역장에서 총팀장으로 활동하던 김권위 선생은 2001년 4월 한국으로 떠났다. 당시 한국으로 가던 많은 탈북자들이 도중에 중국 공안에게 체포되어 북한으로 끌려가던 때였기 때문에 한국행은 매우 위험했다. 실패하면 북한 정치범수용소로 직행할 수 있는 길이었다.

그러나 김권위 선생은 용기 있게 떠났고, 한국 입국에 성공했다. 이후 그는 우리 사역장들이 산시성 시안시에서 전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서안 형제들을 구출해 한국으로 데려오는 일을 자기 일처럼 헌신적으로 도왔다.

여권 사건과 교도소 수감

김권위 선생은 한 사람이라도 더 무사히 한국으로 데려오고 싶어 자기 여권까지 중국에 있는 우리 선생들에게 보내 주었다. 그 덕분에 북한 선생들이 무사히 한국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러나 김권위 선생은 여권을 다른 사람이 사용하게 한 죄로 형을 받고 몇 달 동안 교도소에 수감되어야 했다. 그는 당시 대구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었지만, 신학생이 감옥에 다녀온 일이 문제가 되어 신학을 포기해야 했다.

철도대학과 지하철 기관사의 삶

신학을 포기한 후 김권위 선생은 철도대학에서 공부했다. 북한 온성군에서 철도 공무원으로 일했던 사람이, 중국에서 조폭 생활과 사역장을 거쳐, 한국에서 다시 철도와 관련된 길로 돌아온 것이다.

그는 지금 서울 지하철에서 기관사로 일하며 신앙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의 삶은 폭력의 세계에서 말씀의 세계로, 도피자의 자리에서 누군가를 살리는 자리로 옮겨진 한 사람의 변화의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