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군인 출신의 정직하고 신실한 사람
김예진 선생은 북한에서 직업군인으로 살다가 탈북했다. 북한군 상사로 부소대장까지 지냈다.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정직하고 신실했으며, 다른 탈북민들 가운데서도 눈에 띌 만큼 절도와 책임감이 분명한 사람이었다.
상관에게 철저히 복종하고 부하들에게 명령하며 살아온 군 생활은 그의 몸과 습관에 깊이 배어 있었다. 한번 옳다고 판단한 일은 반드시 밀어붙였고, 자신에게 맡겨진 책임을 소홀히 하는 법이 없었다.
3기 · 중국 1차 사역
중국 1차 사역 / 정용철 선생 사역장 → 최순교 선생 사역장 (2000~2001년)
3기 · 사역 기록
군인의 절도와 집념으로 말씀을 붙들었지만, 인간의 의지와 은혜 사이에서 흔들린 북한 출신 선교사
김예진 선생은 북한에서 직업군인으로 살다가 탈북했다. 북한군 상사로 부소대장까지 지냈다.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정직하고 신실했으며, 다른 탈북민들 가운데서도 눈에 띌 만큼 절도와 책임감이 분명한 사람이었다.
상관에게 철저히 복종하고 부하들에게 명령하며 살아온 군 생활은 그의 몸과 습관에 깊이 배어 있었다. 한번 옳다고 판단한 일은 반드시 밀어붙였고, 자신에게 맡겨진 책임을 소홀히 하는 법이 없었다.
예진 선생은 처음에 정용철 선생의 사역장에서 공부했다. 그러나 산만하고 무절제하게 생활하는 형제들의 모습을 참지 못했다. 그는 잘못된 행동을 볼 때마다 끊임없이 지적하고 바로잡으려 했다.
형제들은 연장자이자 팀장인 정용철 선생의 훈계는 받아들였지만, 같은 훈련생인 예진 선생에게 지시받는 것은 못마땅해했다. “북한에서 부소대장이지 여기서도 부소대장이가? 여기가 군대가?”라는 반발이 이어졌고, 결국 화가 난 예진 선생은 사역장을 떠났다.
나는 예진 선생을 최순교 선생에게 부탁했다. 최순교 선생은 자신이 맡아 보겠다고 했다. 예진 선생은 새 사역장에서도 군인 시절의 강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동시에 지도자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책임자를 돕는 데 탁월했다.
최순교 선생이 한 가지를 지시하면 예진 선생은 두세 가지를 미리 알아서 처리했다. 그는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사람이었고, 공동체 안에서 필요한 일을 피하지 않았다.
예진 선생은 성경을 매우 많이 읽었다. 밥을 먹고 잠을 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늘 성경을 읽거나 말씀을 암송했다. 토요일에 운동하러 나가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고 걸으며 암송했다.
그의 성실함과 자기 통제력은 다른 형제들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군 생활을 통해 익힌 규율과 집중력이 말씀 훈련에 그대로 나타났다. 무엇인가 하기로 결심하면 반드시 끝까지 해내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예진 선생에게는 한 가지 큰 어려움이 있었다. 머리로 이해되지 않는 말씀은 받아들이지 못했다. 모든 것이 명백하고 논리적으로 맞아떨어져야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명령과 복종이 분명한 군대의 체계 속에서 오래 살아온 그에게 성경의 신비와 은혜는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말씀을 더 열심히 배우면 배울수록 인간의 지성만으로 풀리지 않는 부분이 더 많이 보였고, 그는 점점 더 큰 벽 앞에 서게 되었다.
예진 선생은 그 벽을 자신의 의지로 뚫어 보려고 했다. 처음에는 3일 금식을 하며 “성경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부르짖었다. 금식이 끝난 뒤 다시 성경을 펼쳤지만 여전히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자 다시 금식했고, 또다시 금식했다. 이번에는 7일 금식에 들어갔다. 금식 후에도 변화가 없으면 또 금식을 시작했다. 은혜로 열리는 진리를 인정하기보다 자신의 노력과 결단으로 반드시 깨닫겠다는 집념이 앞섰다.
예진 선생은 몇 번이나 금식했는지 기억하기 어려울 만큼 반복해서 몸을 몰아붙였다. 결국 병이 찾아왔고 시력을 잃을 위기에 처했다. 눈이 아파 성경을 읽을 수 없게 되어서야 그는 금식을 멈추었다.
나는 예진 선생을 데리고 여러 병원을 다니며 치료를 받게 하고 약을 먹였지만 쉽게 낫지 않았다. 그의 열심은 누구보다 강했지만, 그 열심이 은혜와 분별 안에 머물지 못할 때 몸과 마음을 상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그럼에도 예진 선생은 최순교 선생 사역장에서 성경을 100번 이상 통독했고, 말씀을 1,000절 이상 암송했다. 모든 훈련 과정을 모범적으로 마쳤으며 북한 선교사로 임명받았다.
북한 선교사로 세워진 날 그는 최순교 선생 팀의 형제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고, 우리 가족도 그의 임명을 축하했다. 정직함과 성실함, 말씀을 향한 집념만큼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었다.
최순교 선생 팀이 파송될 때 예진 선생도 함께 연변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눈병 때문에 학생을 모집하거나 사역장을 시작하지 못했고, 연길의 병원으로 통원 치료를 다녔다.
그 후 서안의 모든 사역장이 중국 공안에 적발될 때 예진 선생도 체포되어 북한으로 북송되었다. 그는 북한에 끌려갔다가 다시 중국으로 돌아왔다. 말씀 훈련을 마치고도 건강 문제와 체포로 인해 실제 사역을 시작하지 못한 것은 큰 아쉬움으로 남았다.
나는 예진 선생을 서안의 다른 형제들과 함께 한국으로 인도했다. 한국에서 안정적인 생활을 시작하고 치료를 계속하면서 그의 눈은 완전히 회복되었다.
시력을 되찾자 성경을 향한 집념도 다시 살아났다. 그는 성경을 더 정확히 알고 싶다는 마음으로 여러 곳을 찾아다니며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말씀을 공동체와 은혜 안에서 분별하기보다, 자신이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체계를 찾는 데 몰두했다.
예진 선생은 결국 여호와의 증인에 들어갔다. 자신이 비로소 진리를 만났다고 확신한 그는 흥분한 마음으로 우리를 찾아왔고, 서안에서 함께 공부했던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자신이 새롭게 믿게 된 내용을 전했다.
함께 훈련받았던 북한 형제들과 우리는 그가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며 여러 번 기도했다. 그러나 기록상 그는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누구보다 성경을 많이 읽고 암송했던 사람이기에 그 선택은 더욱 안타까웠다.
김예진 선생은 중국 사역 역사에서 가장 성실하고 절도 있었던 훈련생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직업군인으로서의 책임감, 지도자를 돕는 능력, 성경 100독과 1,000절 이상의 암송, 반복 금식을 감행한 집념은 누구도 쉽게 따라 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삶은 동시에 지식과 인간의 의지만으로는 진리를 온전히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말씀은 이해력과 노력만으로 소유하는 지식이 아니라, 성령의 은혜 안에서 믿고 순종하며 공동체 속에서 분별해야 할 생명이다.
예진 선생을 통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믿음 자체가 얼마나 큰 은혜인지 다시 배우게 된다. 그의 성실함과 열심을 기억하는 동시에, 그가 다시 복음의 진리 안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기록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