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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역이야기

3기 · 중국 1차 사역

이우열

중국 1차 사역 / 최순교 선생 사역장 (2000~2001년)

소속 / 사역기수
중국 1차 사역 / 최순교 선생 사역장 (2000~2001년)
주요 사역 지역
서안, 연변
주요 역할
조선족 통역, 사역장 중재자, 성경훈련생, 북한 선교사로 임명
최종 기록
연변 파송 후 누나 집이 숙소로 사용되는 과정에서 체포 사건 발생. 이후 사역 공동체와 연락 두절

3기 · 사역 기록

사역의 발자취

열여덟 살의 통역자, 살벌한 공동체 사이에서 평화를 지킨 조선족 선교사

열여덟 살의 조선족 통역자

이우열 선생은 최순교 선생이 연변으로 파송된 뒤 사역장의 통역을 맡기기 위해 특별히 데려온 조선족 청년이었다. 사역장에 들어왔을 때 그의 나이는 열여덟 살이었다.

나이는 어렸지만 말수가 적고 행동이 신중했다. 혈기가 강하고 갈등이 잦은 북한 형제들과 함께 지내는 일이 쉽지 않을 것으로 보여, 최순교 선생은 그를 자신의 방에서 함께 생활하도록 배려했다.

최순교 선생과 한방에서 생활하다

이우열 선생은 최순교 선생의 가까운 곳에서 사역장의 일상을 지켜보며 생활했다. 그는 통역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리더가 무엇을 고민하고 공동체를 어떻게 품는지를 가까이에서 배우는 사람이 되었다.

최순교 선생 또한 어린 그를 단순한 보조자가 아니라 함께 훈련받아야 할 한 사람으로 대했다. 함께 먹고 자며 말씀을 읽는 생활 속에서 두 사람 사이에는 깊은 신뢰가 쌓였다.

북한 형제들 사이의 중보자

사역장 안에서 이우열 선생은 늘 최순교 선생과 북한 형제들 사이를 이어 주는 역할을 했다. 말과 문화, 감정의 차이로 갈등이 생길 때면 조용히 양쪽의 말을 듣고 분위기가 더 거칠어지지 않도록 애썼다.

북한 형제들과 나이 차이가 컸지만, 형제들은 그의 진중함을 인정했고 그를 존중하며 사랑했다. 강한 사람들 사이에서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관계를 이어 주는 그의 태도는 공동체에 꼭 필요한 힘이었다.

통역자를 넘어 같은 훈련생이 되다

이우열 선생은 통역 업무만 맡지 않았다. 북한 형제들과 똑같이 성경통독과 기도, 공동체 생활, 설교와 사역 훈련에 참여했다.

어린 나이에도 모든 과정을 성실하게 감당했고, 맡겨진 훈련을 훌륭하게 마쳤다. 조선족 청년이었던 그는 북한 형제들과 한 공동체 안에서 같은 말씀을 배우고 같은 사명을 품어 갔다.

북한 선교사로 함께 임명되다

최순교 선생 팀 전원이 북한 선교사로 임명받을 때 이우열 선생도 함께 세워졌다. 그의 역할은 단순한 언어 통역을 넘어, 북한 형제들과 함께 복음을 위해 살아갈 동역자가 되는 것이었다.

열여덟 살에 시작한 사역장 생활은 그를 사람과 사람을 잇는 통역자이자, 북한 복음화를 위해 준비된 젊은 선교사로 성장시켰다.

연변 파송과 누나 집의 제안

팀이 연변으로 파송된 뒤 이우열 선생은 누나의 집에서 생활했다. 마침 그의 생일이 되어 최순교 선생 팀 형제들은 누나 집을 방문해 생일을 축하하고 누나와 매부를 만났다.

매부는 북한 형제들에게 자신의 집에서 숙식하며 학생들을 모집하라고 제안했다. 숙식비도 받지 않겠다고 하자, 재정이 넉넉하지 않았던 형제들은 돈을 절약하고 활동하기에도 좋은 조건이라며 반겼다.

위험을 느낀 최순교 선생과 이우열 선생

그러나 최순교 선생은 그 집을 비밀 숙소로 사용하는 일에 반대했다. 기도하는 가운데 설명하기 어려운 불안과 위험을 느꼈기 때문이다.

처남인 이우열 선생도 자신의 누나 집이 사역의 비밀 숙소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가족이 위험에 노출될 수 있고, 사역의 안전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수의 의견에 밀린 결정

북한 형제들은 숙식비를 아낄 수 있다는 현실적인 이유를 들어 계속 그 집을 사용하자고 주장했다. 돈이 부족한 상황에서 무료 숙소를 포기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결국 최순교 선생과 이우열 선생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의견에 따라 누나 집이 숙소로 정해졌다. 그러나 편리함을 택한 결정은 오래지 않아 사역 전체를 뒤흔드는 위기로 이어졌다.

매부의 배신과 체포 사건

평소 일하기를 싫어하고 술에 의존하던 매부는, 이들의 뒤에 한국의 큰 선교사가 연결되어 있다고 짐작했다. 그는 공안원인 친구와 공모해 북한 형제들을 체포하게 했고, 최종적으로는 한국 선교사를 붙잡아 돈을 뜯어내려 했다.

이 일로 최순교 선생과 신소광 선생이 체포되었다. 두 사람은 중국 감옥에서 심한 취조와 고문을 겪었고, 결국 북한으로 강제 송환되었다.

신소광 선생의 경고로 피한 체포

체포 직전 신소광 선생은 위험을 감지하고 한국 선교사가 그 집에 머물지 못하도록 강하게 만류했다. 서안에 남아 있는 수많은 북한 형제들과 전체 사역을 생각하면 책임자가 위험한 숙소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판단이었다.

그 경고 덕분에 한국 선교사는 현장에서 체포되지 않았다. 그러나 최순교 선생과 신소광 선생은 대신 붙잡혀 고통을 감당해야 했다.

가족의 집이 비극의 장소가 되다

이우열 선생에게 누나 집은 가족의 공간이었지만, 동시에 동역자들이 체포된 장소가 되었다. 자신이 반대했던 일이 현실이 되었고, 매부의 행동으로 인해 스승과 형제들이 고문과 북송을 겪게 되었다.

열여덟 살의 청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무거운 사건이었다. 그는 가족과 사역 공동체 사이에서 깊은 수치와 죄책감, 상실을 함께 짊어져야 했다.

더 이상 연락하지 못한 청년

체포 사건 이후 이우열 선생은 더 이상 사역 공동체와 연락하지 않았다. 매부의 행동 때문에 동역자들을 볼 면목이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가 이후 어디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조용하고 신중했던 열여덟 살의 통역자가 사역장 안에서 평화를 만들고, 모든 훈련을 마쳐 북한 선교사로 세워졌다는 사실은 남아 있다.

역사적 평가 — 사람 사이를 이어 준 평화의 통역자

이우열 선생은 강한 카리스마나 화려한 설교로 기억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말보다 행동이 조용했고, 갈등이 많은 공동체 안에서 최순교 선생과 북한 형제들 사이를 연결하는 중보자였다.

그의 이야기는 통역이 단순히 말을 옮기는 일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이어 주는 사역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또한 작은 안전의 경고를 가볍게 여기고 편리함을 앞세운 결정이 얼마나 큰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도 남긴다. 어린 나이에 말씀과 공동체 훈련을 마치고 선교사로 세워진 그의 섬김과 신중함은 중국 1차 사역의 중요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