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단련대에 네 번 끌려간 사람
박광일 형제는 북한 함경북도 은덕군에서 살다가 중국으로 탈북했다. 그러나 국경을 넘을 때마다 체포되어 북한으로 송환되었고, 그때마다 노동단련대에 보내졌다.
그가 노동단련대에 들어간 횟수는 모두 네 번이었다. 한 번 들어가면 여섯 달씩 강제노동을 해야 했으므로, 그는 오랜 시간 굶주림과 폭력, 중노동을 반복해서 견뎌야 했다.
3기 · 중국 1차 사역
중국 1차 사역 / 김누가 선생 사역장
3기 · 사역 기록
노동단련대 네 번과 죽음의 병을 지나 기도의 힘을 체험한 사람
박광일 형제는 북한 함경북도 은덕군에서 살다가 중국으로 탈북했다. 그러나 국경을 넘을 때마다 체포되어 북한으로 송환되었고, 그때마다 노동단련대에 보내졌다.
그가 노동단련대에 들어간 횟수는 모두 네 번이었다. 한 번 들어가면 여섯 달씩 강제노동을 해야 했으므로, 그는 오랜 시간 굶주림과 폭력, 중노동을 반복해서 견뎌야 했다.
노동단련대는 여행증명서 없이 이동한 사람, 직장에 이유 없이 출근하지 않은 사람, 생계형 탈북자 등을 수용해 강제노동을 시키던 곳이었다. 1997년 이후에는 중국에 다녀온 생계형 탈북자들도 대개 여섯 달 동안 이곳에 갇혔다.
수용자들은 새벽 5시부터 저녁 8시까지 일했고, 작업장을 오갈 때에는 자신들을 중국 도강자와 조국 배반자라고 부르는 구호를 반복해야 했다. 일이 없을 때에도 돌무더기를 계속 옮기게 했으며, 달아나면 감옥으로 보내질 수 있었다.
하루에 지급되는 양식은 썩은 옥수수 약 100그램에 불과했다. 굶주린 수용자들은 옷을 빵과 바꾸어 먹었고, 겨울에도 별도의 방한복을 받지 못했다.
가족이 음식과 옷을 보내 주거나 반장에게 돈을 건넬 수 있는 사람은 그나마 버틸 수 있었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극심한 굶주림과 영양실조를 견뎌야 했다.
네 차례의 노동단련대 생활을 겪은 박광일 형제는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완전히 짓눌려 있었다. 사람과 이야기할 때 상대의 얼굴을 바라보지 못하고 머리를 숙인 채 말하곤 했다.
식사할 때에는 누가 밥을 빼앗아 갈까 두려운 사람처럼 밥그릇을 꼭 붙잡고 허겁지겁 먹었다. 아무리 많은 양의 밥도 1분 안에 먹어 치울 정도로 굶주림의 기억이 몸에 깊이 남아 있었다.
박광일 형제의 몸에는 성한 곳이 거의 없었다. 특히 폐결핵이 매우 심각해 매일 많은 피를 토했다. 피를 토할 때마다 사역장 안에는 피비린내가 가득했다.
함께 생활하던 사람들은 그가 회복될 것이라고 기대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가 사망하면 시신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를 걱정할 정도로 상태가 위중했다.
김누가 선생은 박광일 형제가 기도하면 나을 수 있다고 믿었다. 아침 한 시간과 저녁 한 시간의 공동 기도 시간마다 형제들과 함께 그의 회복을 위해 기도했다.
박광일 형제의 상태 때문에 김누가 선생이 힘들어한다는 소식을 들은 최광 선교사도 사역장을 찾아갔다. 형제들을 격려하고 함께 기도 모임을 가지며, 병든 한 사람을 공동체 전체가 품도록 이끌었다.
사역장에서는 소록도 북성교회 남효선 장로님과 성도들에게도 박광일 형제를 위한 특별한 중보기도를 부탁했다.
서로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었지만, 중국의 사역장과 한국의 소록도 교회는 기도로 연결되었다. 박광일 형제는 자신을 위해 매일 기도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서 큰 위로와 힘을 얻었다.
여러 사람이 한마음으로 기도한 뒤 박광일 형제의 병세는 눈에 띄게 좋아지기 시작했다. 매일 피를 토하던 증상이 줄어들었고, 몸도 차츰 회복되었다.
얼마 후 폐결핵이 완치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죽음을 걱정하던 사람이 다시 일어나 생활하고 말씀을 배울 수 있게 된 변화는 사역장 형제들에게도 큰 사건이었다.
무엇보다 기쁜 변화는 박광일 형제 자신이 회복의 과정을 형제들의 기도와 연결해 받아들였다는 점이었다.
그는 자신을 위해 기도한 김누가 선생과 사역장 형제들에게 감사를 표현했다. 기도의 힘을 인정하기 시작한 것은 하나님을 향해 그의 마음이 열리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박광일 형제는 자신을 위해 기도한 소록도 북성교회 남효선 장로님과 성도들에게 감사 편지를 보냈다.
편지에서 그는 북한 복음화를 위해 자신들을 기도로 돕는 교회에 깊은 감사를 전했다. 또한 말씀의 뜻을 깊이 배우고 충실한 주님의 종으로 성장하겠다고 다짐하며, 자신도 북성교회 성도들의 회복을 위해 계속 기도하겠다고 약속했다. 편지 전문은 문서 뒤 부록에 별도로 수록했다.
박광일 형제는 죽음에 가까웠던 병과 회복의 과정을 지나며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사실을 체험했다.
이 경험은 단순히 몸이 좋아진 사건에 머물지 않았다. 타인의 얼굴을 바라보지 못하고 밥그릇을 움켜쥐던 사람이 자신을 위해 기도해 준 이들에게 감사하고, 다른 사람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으로 변화되기 시작했다.
몸이 회복된 뒤 박광일 형제는 김누가 선생에게 성경을 배우며 하나님에 대해 알아 갔다. 말씀을 통해 자신이 경험한 기도의 의미를 이해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예수님을 마음으로 영접했다.
노동단련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과 마음을 움츠렸던 그에게 사역장은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고 말씀을 배우며 다시 살아가는 공동체가 되었다.
박광일 형제는 사역장에서 말씀을 배우고 신앙을 받아들였지만, 북한 선교사로 임명되는 단계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다. 병이 회복된 뒤 그는 사역장을 떠났고, 이후 다시 연락이 닿지 않아 어디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의 이야기는 반복된 북송과 노동단련대 생활이 한 사람의 몸과 마음에 얼마나 깊은 상처를 남기는지를 보여 준다. 동시에 죽음을 앞둔 한 사람을 공동체가 포기하지 않고 붙들었던 기록이기도 하다.
김누가 선생과 사역장 형제들, 소록도 북성교회 성도들의 기도 속에서 그는 몸을 회복하고 하나님을 알아 갔다. 이후의 행적은 알 수 없지만, 그의 감사 편지는 절망 속에서 다시 열린 믿음의 흔적으로 남아 있다.
육성 그대로
편지의 표현과 표기는 작성 당시의 문장을 최대한 보존하였다.
<소록도 북성교회> 남효선 장로님과 성도님들에게
그동안 안녕하십니까
한국에 계시는 <소록도 북성교회> 남효선 장로님과 성도님들에게 감사의 편지를 정중히 올리는 바입니다.
남효선 장로님과 성도님들께서 북한의 복음화를 위하여 하나님의 품속에 안겨 귀한 종으로 성장하여 나가는 데 큰 힘이 돼 주시고 크신 은혜를 받을 수 있게 기도를 성심성의로 매일과 같이 하여 주시는 데 대하여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 편지를 장로님과 성도님들에게 정중히 올리는 사람은 함경북도 은덕군에서 살던 박광일이라고 합니다.
저는 라 선생님으로부터 <소록도 북성교회> 남효선 장로님과 성도님들이 저희들을 위하여 매일과 같이 기도로 해 주신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감동되어 저희 작은 가슴으로 어떻게 감사를 표현해야 될지 모르며 기쁨으로 억제할 길 없습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저는 성령으로 이 몸이 차고 넘칠 수 있게 말씀의 참 뜻을 깊이 알고자 하는 데서 공부를 잘하여 충실한 종으로 성장해 나가겠습니다.
저는 진심으로 <소록도 북성교회> 남효선 장로님과 성도님들을 위하여 매일 매시간 이어 가면서 저의 적으나마 기도가 도움이 되리라고 굳게 믿으면서 언제나 기도에 제목에 빠짐없이 넣고 생활해 나가고 있으며 앞으로 바쳐나가겠습니다. 장로님과 성도님들이 귀하신 몸에 병이 꼭 나으리라고 굳게 믿습니다.
응심 깊으시고 낙관에 넘쳐 살아가고 계시는 장로님과 성도님들이 맡은 바 병 치료에 힘을 기울이고 꼭 완치되리라고 믿고 약속하면서 안녕히 계십시오.
2001년 1월 13일탈북자 박광일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