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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역이야기

3기 · 중국 1차 사역

신소광

중국 1차 사역 / 최순교 선생 사역장 (2000~2001년)

소속 / 사역기수
중국 1차 사역 / 최순교 선생 사역장 (2000~2001년)
주요 사역 지역
연변, 서안
주요 역할
탈북민 성경훈련생, 북한 선교사로 임명, 서안 사역장 사역
최종 기록
두 차례 북한 체포 후 기적적 석방. 한국 경유 캐나다 이민. 이후 연락 두절

3기 · 사역 기록

사역의 발자취

두 번 잡히고 두 번 기적으로 살아난 사람, 수갑 차고도 머리를 들었던 선교사

북한 시절과 탈북

신소광 선생은 북한에서 전문대를 나온 후 철도 공장에서 사회주의노동청년동맹 위원장으로 활동하다 탈북했다. 탈북의 구체적인 이유는 명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여느 북한 탈북자들과 눈에 띄게 달랐다. 외모부터 말과 행동에 이르기까지 단정했고 감정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다. 처음 보는 순간부터 잘 다듬어지면 정말 훌륭한 북한 선교사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광 선생은 최순교 선생이 파송되어 나가 데려온 선생으로, 순교 선생 팀이 서안으로 내려왔을 때 처음 만났다.

사역장 해체 위기에서 한 걸음 물러서게 한 말

순교 선생이 사역장에서 학생들에게 술을 사 준 적이 있었다. 이 소식을 듣고 크게 화가 났다. 순교 선생에 대한 믿음이 컸던 만큼 실망도 컸기에 팀을 해산하기로 했다. 첫 사역부터 적당히 봐 주면 선교사의 삶의 기본이 바르게 잡히지 않기 때문이었다. 사역장에 가서 단호하게 말했다.

“모두 짐을 싸서 연변으로 돌아가세요. 그리고 오늘부터 순교 선생은 팀장이 아닙니다.”

순교 선생은 말없이 결정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학생들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모두 잘못했다고 빌었지만 용서하지 않았다. 그때 소광 선생이 조용히 찾아왔다. 격한 감정으로 부르짖지 않고 차근차근 논리적으로 상황을 설명했다.

“선교사님, 우리 북한 사람들은 악한 정권 밑에서 살아왔기에 책임자가 하는 요구들을 어기고 몰래 나쁜 짓을 하는 것이 큰 죄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늘에야 알았습니다. 몰래 술 먹는 것이 이렇게 나쁜 짓이라는 것을.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정말 잘 해 보겠습니다.”

그 말을 듣고 한 걸음 물러서 한 번의 기회를 더 주기로 했다.

약속을 지키다

소광 선생은 약속을 지켰다. 훗날 최효선 형제가 다시 술을 사 먹자고 형제들을 선동하고 나섰고, 술을 사 주지 않는다고 순교 선생을 때리려고 달려들었다. 그때 소광 선생이 막아 나서서 말렸다. 정말 험악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 소광 선생 때문에 무난히 넘어갔다. 신뢰가 가는 사람이었다.

소광 선생은 마음 밭이 좋은 사람이었다. 빨리 은혜를 받기 시작했고 예수님을 영접했다. 순교 선생의 인도 아래 성경을 100번 이상 읽었고 세례를 받고 북한 선교사가 되는 모든 과정을 마쳤다. 북한 선교사로 임명되는 날 발언 시간에 이렇게 고백했다.

“우리가 이렇게 북한 선교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순교 선생님이 수없이 흘린 눈물의 대가입니다.”

모든 선생들이 동감했다. 특히 순교 선생은 오랫동안 참고 인내하면서 쌓였던 응어리들이 그 말 한마디에 다 풀려 버린 것을 지금까지도 잊지 못한다.

나를 쫓아내고 자신은 잡혀가다

순교 선생 팀이 파송되어 연변으로 올라갔을 때 뒤따라 올라가 숙소를 찾아갔다. 그때 소광 선생이 조용히 말했다. 우리가 다 잡혀도 내가 잡히면 안 된다고, 서안에 있는 수십 명 탈북자들을 생각하면 이렇게 무책임하게 행동해서는 안 된다고. 그리고는 나를 쫓아내다시피 했다.

다음 날 순교 선생 팀 숙소로 공안들이 들이닥쳤다. 소광 선생은 순교 선생과 함께 북한으로 끌려 나갔다. 중국 공안의 목적은 처음부터 나였기에, 두 선생을 모질게 고문하며 내 위치를 캐내려 했다. 그러나 두 선생은 그 무서운 고문 속에서도 입을 다물었다.

돌아올 수 없는 사람이 돌아오다

몇 달 후 소광 선생이 다시 돌아왔다. 연변에서 활동하는 이용섭 선생을 찾아온 것이다. 죽었던 아들이 다시 살아 돌아온 것 같아 너무 기뻤지만, 북한 선생들은 당황해했다. 잡혀가면 도저히 석방될 수 없는 사람이 기적적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모든 선생들이 그를 간첩으로 의심하며 격리시켜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사람됨을 믿었기에 의심 없이 우리가 있는 위치를 알려 주었고 다시 받아 주었다.

연변에서 학생들을 이끌고 서안으로 내려왔을 때 마중 나갔다. 소광 선생은 온몸이 퉁퉁 부어 있었다. 심각한 영양 부족 상태였다. 소광 선생도 울었고 나도 그를 붙잡고 하염없이 울었다. 아무 말 없이 눈물 하나로 참 많은 말을 주고받았다.

두 번째 체포 — 수갑 차고도 머리를 들다

소광 선생은 의욕적으로 사역장을 꾸려 사역을 시작했다. 그러나 한 달 후 서안에서 전체가 체포될 때 그도 다시 체포되어 북한으로 끌려 나갔다.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전번에는 일반 생계형 탈북자로 분류되었지만, 강제 노동 기간에 도망쳐서 재탈북한 데다 기독교 사건으로 잡혔기에 더 이상 용서받을 가능성이 없었다. 소광 선생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북한 온성군 보위부로 끌려 나갔다.

철도 보위부에서 온성군 보위부로 데리러 오며 호송 요원이 말했다.

“신소광! 너는 끝장이다. 너는 살 생각 하지 마라.”

소광 선생은 수갑이 채워진 채로 온성 역으로 끌려갔다. 지나가는 사람들과 역전의 군중들이 구경했다. 그러나 소광 선생은 자기가 한 일에 대해 당당했다. 수치스러움도 두려움도 없었다. 머리를 들고 태연하게 호송 요원들을 따라 걸었다.

역전에서 만난 친구

고향에 도착했다. 평소 함께 일했던 사람들 앞에 기독교인의 신분으로 나타나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소광 선생은 당황했지만 마음을 진정시켰다.

“괜찮아. 어떤 일에도 난 괜찮아. 마음은 든든해. 나는 여기서 끝날 거야. 내 생은 여기까지일 거야. 이제 정치범 수용소로 가겠지?”

청진 철도 총국으로 이송되기 위해 다시 역전으로 나왔다. 그때 군중 속에서 초등학교 동창 박동식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10년 군 복무를 마치고 조선노동당에 입당해 당당하게 돌아온 친구였다. 두 사람의 처지는 판이하게 달랐다. 보이지 않는 큰 장벽이 막혀 있었지만 친구는 거리낌 없이 소리쳤다.

“야 너 잡혀 나왔다며? 너 청진 가니? 건강해라. 제발 살아서 돌아와라.”

이 한마디 때문에 친구는 당 생활총화에서 비판 대상이 되고 출세에 큰 불이익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개의치 않고 우정과 격려를 표시했다. 친구를 위해 많은 말을 할 수 없어 침묵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너는 지금의 나를 모를 거야. 하지만 너도 언젠가는 하나님을 알게 되고 예수님을 믿을 때는, 비록 네 앞에서 초라하고 동정받는 것 같지만, 지금의 내 모습이 얼마나 자랑스러웠던 장한 모습이었는지를 알게 될 거다. 친구야 고맙다.”

열차에 오르자 호송 요원이 수갑 찬 손에 옷을 감아 보이지 않게 해 주었다. 친구는 열차까지 쫓아와 창문 밖에서 손을 흔들어 주었다.

청진 철도 총국 조사 — 복음을 가르치다

청진 철도 보위부 구류장 독방에 갇혔다. 간수가 들어와 옷에 붙은 단추, 벨트, 고무줄을 다 뽑고 솔기까지 뜯어 버렸다. 멀쩡했던 옷이 순식간에 너덜너덜한 수의가 되었다.

조사를 담당한 보위부 간부는 직급이 꽤 높은 50대의 노련한 간부였다. 첫 심문부터 색달랐다.

“너 주기도문 한번 외워 봐라.”

암송한 주기도문을 외웠더니 다시 요구했다.

“이번에는 사도신경을 외워 봐라!”

그의 책상 위에는 서안 사역장 관련 자료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학생 수, 선생들의 활동 상황 등을 이미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소광 선생도 더 이상 숨길 것이 없었기에 그대로 다 말했다.

간부가 마침내 핵심 질문을 꺼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너 남조선 선교사한테서 어떤 임무 받았나? 어떤 지령을 받았냐 하는 것이야.”

소광 선생이 답했다.

“우리에게는 어떤 지령이나 임무가 없습니다. 오직 두 글자, 사랑이라는 것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정말 아직까지 받지 못했던 그런 사랑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서로 형제라고 불렀습니다. 형제들은 나를 선생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는 서로 간에 사랑으로 발까지 씻어 주었습니다.”

소광 선생은 조사를 통해 오히려 그 보위부 간부에게 예수의 사랑과 복음이 무엇인지를 자상하게 가르쳤다.

기적 같은 석방 — 아버지 덕

조사가 마무리될 무렵 고향 담당 보위부 지도원이 찾아왔다. 정치범 수용소로 이송하러 온 것이라 생각하며 각오를 했다. 그러나 청진 철도 보위부 부장이 들어서며 선포했다.

“조선노동당과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와 김정일 장군님의 크나큰 배려와 사랑으로 너는 이 시간 이후로 모든 죄가 없어졌다. 그러므로 새 출발하는 마음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너는 이제 집으로 돌아간다.”

마음속에서 큰 돌멩이 하나가 툭 떨어졌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고향으로 가는 열차에서 담당 보위부 지도원이 설명해 주었다. 신원 조회를 해 보니 소광 선생의 가계가 너무 깨끗했다. 남조선 친척도 없고 범죄 경력도 없으며 아버지는 6.25 전쟁 때 자원입대해 부상까지 당한 사람이었다. 보위부 안에서 회의가 열렸고, 우연히 탈북하다 사건에 휘말렸을 것이라는 결론이 모아졌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한 것이었다. 담당 보위부 지도원이 말했다.

“너 이제 다시 중국으로 달아나거나 기독교에 대한 말을 한마디라도 하면 그때는 더 이상 기회는 없다. 그때에는 너는 정말 마지막이다.”

보위부 생활 30년에 이런 경우는 처음 봤다고 했다. 기적 같은 기이한 용서였다.

다시 탈북, 그리고 한국으로

소광 선생은 고향으로 내려와 강제 노동단련대에서 철길에 못을 치는 일을 하게 되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피하고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감시받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고독했다. 조금이라도 실수하거나 실수할 기미가 보이면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소광 선생은 석방된 지 5일 만에 다시 밤을 타서 중국으로 탈북했다. 그리고 한국으로 인도되었다. 한국으로 온 후 소광 선생은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 그 후 연락이 끊어졌다.

지금도 소광 선생을 생각하면 늘 아쉽고 아까운 마음이 크다.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하기만 하면 정말 귀한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임받을 수 있다고 믿고, 그렇게 되기를 지금도 기도하고 있다.

역사적 평가

신소광 선생은 중국 사역 역사에서 가장 극적이고 깊은 이야기를 가진 인물이다. 두 번 잡히고 두 번 기적처럼 살아났다. 수갑이 채워진 채 역전을 걸어가면서도 머리를 숙이지 않았고, 보위부 조사실에서 오히려 복음을 가르쳤다.

사역장에서도 가장 논리적이고 침착하게 위기를 넘긴 사람이었고, 나를 쫓아내다시피 하며 사역을 지키려 했던 사람이었다. 하나님은 가장 깨끗한 가계와 가장 단단한 심지를 가진 이 사람을 두 번씩이나 살려 내셨다. 그가 다시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기를 지금도 기도하고 있다.

육성 그대로

남긴 글 · 편지

최광 선교사님 사모님께 보낸 편지

아래 편지는 신소광 선생이 사역 중 최광 선교사님 사모님께 보낸 편지 내용이다. 편지글은 원문 그대로 보존하였다.

사모님께

안녕하십니까 사모님

저는 최순교 선생님 밑에서 서안에서 공부하고 있는 신소광입니다. 사모님과 선교사님 가정에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늘 함께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저희들이 오늘 이렇게 주님의 말씀을 배우고 북한 선교사로 세워져 갈 수 있게 된 것은 사모님과 선교사님, 그리고 많은 기도의 동역자들이 계신 덕분입니다. 저희는 날마다 말씀으로 무장하고 복음의 사명을 위해 준비하고 있습니다.

사모님, 저희를 위해 계속 기도해 주십시오. 저희도 사모님과 가정을 위해 날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모님과 온 가정을 지키시고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01년

신소광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