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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역이야기

1기 · 중국 1차 사역

유기풍

중국 1차 사역 (1기) /

소속 / 사역기수
중국 1차 사역 (1기) /
주요 사역 지역
산둥성 지난시, 허난성 정저우시, 옌볜 조선족 자치주 옌지시, 충칭시, 쓰촨성 청두시, 중국-베트남 국경, 산시성 시안시, 안후이성, 미국 LA
주요 역할
탈북민 성경통독 훈련생, 북한 출신 선교사, 사역장 팀장, 이후 선교사 준비
최종 기록
한국 입국 후 예수전도단 DTS 및 해외 캠프 사역 / 미국 LA 체류 중

1기 · 사역 기록

사역의 발자취

지난 사역장에 온 금강산댐 출신 청년

1기 사역장이 산둥성 지난시로 이사 간 후, 주광호 선생이 유기풍 선생을 데리고 왔다. 유기풍 선생은 자신을 소개하면서 북한의 “금강산댐”에서 군 생활을 했다고 했다. 나는 처음 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것은 북한 사람들만 알아듣는 말이었다.

북한은 금강산 깊은 산골짜기에 거대한 댐을 지었다. 장비가 없는 북한은 김정일 위원장의 명령에 의해 중장비 대신 10만 명의 군인들을 동원했다. 기계가 해야 할 일을 군인들이 개미처럼 달라붙어 했다. 좁고 협착한 골짜기에 10만 명의 군인들이 밀집해 살았다. 이들은 북한군 중에서도 가장 생활 형편이 열악한 공병군인들이었다.

그들은 늘 굶주렸고 생필품 부족에 시달렸다. 낮에는 군인이었지만 밤에는 강도로 변했다. 다른 부대 병영을 찾아가 양식은 물론 입고 있는 속옷까지 벗겨갔다. 금강산 좁은 골짜기들은 밤이면 새들도 숨죽이고 날지 못하는 무시무시한 강도들의 천국으로 변했다. 그런 곳에서 10년 동안 군사 복무를 했다는 것은, 사실 군인이라기보다 산속의 토비처럼 살았다는 말에 가까웠다. 북한 사람들은 금강산댐에서 일하던 군인이라고 하면 다툴 생각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강도 중의 강도라는 자기소개

기풍 선생은 자기는 급이 높은 강도라고 했다. 그게 무슨 말인지 묻자, 일반 군인들을 상대로 강도질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군인 병영을 습격하는 것이 아니라, 길가에 숨어 기다리다가 병영을 습격하고 오는 강도들을 다시 습격해서 강탈하는 강도라는 것이다. 그러면 여러 번 싸우지 않아도 한 번에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결국 강도 중의 강도라는 말이었다.

말하는 내용도 살벌했지만, 이런 말을 덤덤하게 하는 이 사람도 정말 살벌했다. 유기풍 선생에게서는 누가 설명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살벌한 기운이 풍겨 나왔다. 키는 크지 않았고 몸도 조금은 왜소했지만, 그의 눈은 중국 진시황제의 병마용 병사들처럼 가늘었고 눈꼬리가 사납게 위로 치켜 올라가 있었다.

어이가 없었다. 주광호 선생이 데리고 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랬다. 꼭 자기 같은 사람들만 데려왔다. 연변에서 지난시까지 며칠 동안 열차를 타고 온 사람을 돌려보낼 수도 없었다. 화가 나서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 왜 저입니까? 왜 제가 이런 사람들만 맡아야 합니까?”

말없이 지켜보다가 변하기 시작하다

기풍 선생은 말을 별로 하지 않았다. 행동으로 말을 하는 사람이었다. 사역장의 질서와 훈련은 탈북자들에게 쉬운 것이 아니었다. 술도 못 마시고 담배도 피우지 못했다. 마음대로 외출도 할 수 없었다. 하루 종일 앉아서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암송해야 했다.

도중에 들어온 사람이어서 많이 힘들었을 텐데, 기풍 선생은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다. 말도 별로 하지 않고 그저 덤덤히 따라오면서 지켜보기만 했다. 다른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눈물 흘리고 기도하는 것을 말없이 보기만 했다. 그러나 찬양도 하고 함께 축복의 노래도 불렀다. 성경도 읽으면서 사역장이 싫지 않은지 떠나지 않고 계속 따라오기 시작했다.

기풍 선생도 칼빈 선생에게 성경을 많이 배웠다. 통독 시간이 끝나면 다른 사람들은 쓰러져 자기에 바빴지만, 기풍 선생은 침실에 들어가지 않고 계속 통독을 했다. 처음에는 승벽이 강한 사람이라 남에게 뒤떨어지고 싶지 않아서 그러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기풍 선생은 변하기 시작했다. 중국 무사들의 칼처럼 위로 휘어 올라갔던 눈꼬리가 어느새 아래로 부드럽게 내려왔다. 성형수술을 한 것도 아닌데 전혀 딴 사람 얼굴이 되었다. 말투도 많이 부드러워졌다.

은혜가 사람을 바꾸는 것을 자주 보았지만, 기풍 선생처럼 얼굴까지 바뀌는 사람은 이때 처음 보았다. 기풍 선생은 스스로 사명을 붙잡기 시작했다. 남을 괴롭히고 험하게만 살던 삶을 이제는 끝내고, 남은 생애에는 복음을 전하며 예수님을 전하면서 살고 싶다고 했다.

정저우 놀이공원과 소림사에서 보인 어린아이 같은 기쁨

허난성 정저우시 놀이공원에 갔을 때, 말이 없고 살벌하기만 하던 기풍 선생은 전혀 딴 사람이 되었다. 정신을 잃은 사람처럼 여기저기 뛰어다녔고, 이것저것 타보면서 신나고 즐거워했다. 이런 곳에 왔다는 것을 사진으로 남겨 누군가에게 자랑하고 싶다고 했다. 전동차가 지나가는 그 순간을 포착해서 사진을 찍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려 아까운 필름 몇 장을 허비하기도 했다. 참 고집이 셌다. 자기가 하겠다고 하면 꼭 해야 했다.

거친 사람들은 의리를 소중히 여긴다. 기풍 선생은 칼빈 선생이 자기에게 성경을 가르쳐 주느라 고생 많이 했다고 생각하며 많이 챙겨주려고 했다. 김권능 선생과도 친구였다. 사역장에 오기 전 옌볜 조선족 자치주 옌지시 이란진 돌가루 공장에서 서로 만나 친구로 지냈다. 사슴과 표범처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이 친구로 지내는 것이 신기했다.

북한 선생들이 선교사로 임명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정저우시 인근 덩펑시 숭산 소림사로 갔을 때 기풍 선생은 누구보다 좋아했다. 어려서부터 싸움꾼으로 살던 사람이라 중국 무술 영화를 참 좋아했다. 소림사는 기풍 선생에게 어린 시절의 성지와 같은 곳이었다. 우리는 유람을 갔지만 기풍 선생은 성지순례를 갔다. 너무 좋아하다 못해 경건하기까지 했다.

성탄절 밤, 마음을 연 기풍 선생

성탄절 명절이 오자 우리는 그날을 즐겁게 보냈다. 북한 선생들에게는 생애 처음 경험하는 성탄절이었다. 예수님을 알고 성탄절의 의미를 알게 된 북한 선생들은 새로운 즐거움을 맛보며 좋아했다. 김순교 목사님이 예배를 인도하시며 설교를 통해 예수님 탄생의 의미를 여러 면으로 잘 설명해 주셨다.

오후에는 정저우시 공원에 가서 사진도 찍고 산책도 하고 맛있는 음식도 먹으면서 밤늦게까지 놀았다. 그날 공원을 걸으면서 기풍 선생이 나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북한에서는 바나나 하나만 먹어도 6개월 이상 바나나를 먹어보았다고 자랑한다고 했다. 지금 이곳의 공원 가로등 불빛은 북한 어디에서도 볼 수 없다고 했다. 호롱불도 없어서 해가 지면 다들 잠자리에 든다고 했다.

기풍 선생은 신나게 이야기했다. 늘 말없이 사람을 경계하면서 살던 그가 경계심을 풀고 인간에 대한 미움을 풀고 마음을 열어 놓은 것이다. 겉보기에는 강도를 때려잡는 강도였지만, 조심스럽게 열어 보이는 그의 마음의 속살은 한없이 여리고 아름다웠다.

일주일 팀장 사역과 수영장 사건

북한 선교사로 세워진 후, 북한 선생들은 순번대로 1주일씩 사역장을 이끌었다. 기풍 선생이 한 주간 사역장을 책임지고 운영하는 차례가 되었다. 자신감이 넘쳐 있는 그에게 일주일 생활비 500위안을 주면서 잘해보라고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사역 첫날 기풍 선생은 평소 북한 선생들이 먹고 싶어 하던 음식들을 잔뜩 사다가 식탁에 산더미처럼 쌓아놓았다. 그리고 사역장의 일과를 확 뒤집어 버렸다. 월요일 아침부터 축구를 하러 가자고 했다. 오전에 축구를 마치자 오후에는 또 수영장에 가자고 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북한 선생들에게 사역장을 맡긴 이상 처음부터 시시콜콜 간섭하고 싶지 않았다. 선생들이 실수를 많이 하기를 바랐다. 그래야 나의 경험을 더 많이 가르쳐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수영장에서 사고가 터졌다. 북한 선생들은 한겨울에 수영을 해본다며 신나게 수영장을 찾았다. 생전 처음으로 남녀가 함께 사용하는 수영장에 들어와 본 것이다. 북한 사회는 여성에 대해 이슬람 국가들보다 더 보수적이고 엄격했다. 수영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여자들을 보더니 모두 정신이 나가 버렸다. 수영은 하지 않고 한 줄로 앉아 입을 크게 벌리고 여자들만 구경했다. 사람들이 이상하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더는 방치할 수 없어 북한 선생들과 기풍 선생을 억지로 끌고 나왔다.

결국 기풍 선생은 이틀 만에 한 주간 생활비를 다 써버렸다. 돈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일은 북한 선생들에게 어려운 문제 중 하나였다. 그들은 늘 끼니 걱정을 면하는 것에 만족하며 살아왔기에 돈을 계획적으로 사용하는 일에 서툴렀다.

40일 금식 결심과 중도에 끝난 금식

수영장 사건으로 인해 선생들의 영적 상태가 흐트러질까 걱정이 되었다. 사역장의 분위기가 산만해지면서 여러 문제가 생겼다. 북한 선생들이 서로 다투기 시작했고 특히 기풍 선생과 자주 다투었다. 화가 난 기풍 선생은 자기 방에 들어가 문을 닫아 버리고 나오지 않았다.

나는 기풍 선생을 달래 내 방으로 불러놓고 수영장에 간 것이 왜 잘못되었는지 차근차근 설명했다. 그제야 기풍 선생은 즉흥적으로 행동했던 자기 잘못에 대해 진정으로 후회했다. 그는 사역자로서 정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40일 금식기도에 들어갔다.

기풍 선생이 금식을 시작한 지 18일째 되던 날, 잠시 한국으로 갔던 김순교 목사님이 돌아왔다. 목사님은 사탕, 과자 등 맛있는 먹거리들을 가득 가져왔다. 한국에서 온 사탕이 너무도 먹고 싶었던 기풍 선생은 자기도 모르게 사탕 한 알을 입 안에 넣고 삼켜버렸다. 이로 인해 40일 금식은 중도에 끝나고 말았다.

숲속 마을에서 드러난 변화

기풍 선생은 친구인 김권능 선생과 함께 파송되었다. 두 사람은 김권능 선생의 아버님이 숨어 살고 있는 숲속 마을을 찾아갔다. 장만식 아바이가 그곳에서 김권능 선생 아버님과 함께 살고 있었다. 장 아바이는 북한에 있을 때부터 기풍 선생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변화된 기풍 선생을 보고 깜짝 놀랐다.

다시 나타난 기풍 선생은 술을 마시지 않았다. 담배도 피우지 않았다. 사람들과 말할 때에도 정중했고 겸손했다. 거기에다 김권능 선생과 번갈아 매일 가정예배를 인도하면서 숲속 마을에 있는 탈북자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찬송가도 가르쳐 주었다.

장만식 아바이는 매일 보면서도 믿기 힘들어 말했다.

“아이쿠! 야 이놈 봐라, 저놈이 이리케 사람이 돼서 돌아왔어? 히야, 거 신기하다야.”

김권능 선생의 아버님인 김 아바이도 말했다.

“그거 너 거 공부하는 거게 뭐가 있긴 있는 모양이다야!”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기풍 선생의 변화된 모습을 보고 놀라워했고 신기하게 여겼다. 장 아바이는 정색을 하고 기풍 선생에게 공손하게 말했다.

“나도 사역장에 학습하러 가문 안 됨까? 기풍 선생님.”

기풍 선생은 57세나 되는 장 아바이가 공부하러 간다고 하자 만류했다. 그러나 장 아바이는 죽어도 학습하러 가겠다고 그의 다리를 붙들며 매달렸다.

학생 모집과 옌지 역전 앞 사역장

기풍 선생은 김권능 선생의 아버님과 함께 숲속 마을에서 살던 탈북자들과 안투현 조선족 교회에 있던 탈북자들을 모집했다. 장만식 아바이, 김권능 선생의 동생 김영윤, 북한에서 넘어온 지 겨우 3일밖에 되지 않은 유칼빈, 김예진, 이현수 형제와 조선족 김 선생 등 모두 8명의 형제들을 모집했다.

기풍 선생은 옳다고 확신하는 일이 있으면 즉시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학생 모집을 끝낸 기풍 선생은 나에게 사역비를 독촉했다. 위험한 옌볜을 떠나 중국 남방 지역으로 가서 사역을 시작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사역비가 없었다. 나는 중국으로 들어올 비행기 값도 없어 한국에서 계속 모금 활동을 해야 했다.

사역비가 오지 않자 기풍 선생은 함께 공부했던 조선족 전관화 선생의 아버지께 사정해서 돈을 빌려 사역을 시작했다. 옌지시 역전 맞은편 건물에 사역장을 만들어 놓고 사역을 시작했다. 북한 보위부가 제집 드나들 듯 드나드는 옌지시에서, 중국 공안이 늘 지나다니는 역전 길 옆에 사역장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믿는 사람의 믿음은 그대로 이루어진다. 기풍 선생의 단순하고 확신적인 믿음으로 인해 두 달 동안 옌지 역전 앞에서 사역하면서도 아무 사고가 발생하지 않았다. 그 후 기풍 선생은 충칭시로 사역장을 옮겨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했다.

충칭 사역장의 어려움과 한국행 제안

북한 선교에 대한 기풍 선생의 의욕과 열정은 컸지만 사역은 순탄치 않았다. 기풍 선생 팀이 충칭시로 내려간 후에도 나는 약속된 시간에 사역비를 공급할 수 없었다. 충칭에서 사역비가 떨어지자 기풍 선생은 곤경에 빠졌다. 옌지시에 있을 때에는 주변 조선족 교회에 부탁해 최소한 먹을 것을 지원받을 수 있었지만, 아는 사람이 전혀 없는 충칭에서는 꼼짝없이 굶어야 했다.

사역비가 제때 공급되지 않자 기풍 선생도 학생들도 이 사역의 가능성에 대해 확신을 잃고 동요하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당장 떠나겠다고 난리를 부렸다. 기풍 선생은 감당하기 어려웠다. 나를 기다릴 수도 없고, 사역장을 해산하고 떠나자고 해도 차비가 없었다. 중국어도 모르는 북한 형제들이 충칭에서 눌러 살 수도 없었다.

결국 그들은 한국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기풍 선생에게 제안했다.

“선교사님이 맨날 이렇게 힘들게 사역하시는데 우리가 한국 가서 돈 벌어서 도와주는 게 어떻습니까? 한국에 가문 정착비도 준다구 하는데, 그 돈 모아서 마음껏 북조선 선교 하라고 선교사님에게 주고 우리는 한국 가서 다시 통독하는 게 어떻습니까? 베트남 가서 한국 대사관 들어가면 바로 한국 보내준다구 하는데 우리 다 같이 베트남 갑시다.”

학생들도 흥분했다. 결국 기풍 선생은 이들을 데리고 한국으로 가기로 했다. 이때부터 그는 베트남으로 가는 길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청두로 가라 했더니 베트남으로 떠나다

내가 충칭의 기풍 선생 사역장을 찾아갔을 때는 이미 사역장의 모든 일과가 흩어지고 한국으로 가기 위한 준비를 할 때였다. 나는 깊은 내막까지는 알지 못했고, 기풍 선생 사역장의 형제들이 심하게 흐트러져 있는 것만 느꼈다.

나는 기풍 선생 사역장을 내가 살고 있는 쓰촨성 청두시로 옮겨 체계적이고 세밀한 도움을 주기로 했다. 이사 경비를 제공했다. 그러다 보니 예상했던 생활비보다 훨씬 많은 돈을 주었다. 한국으로 가기로 했던 기풍 선생 팀에게는 하늘이 준 기회였다. 기풍 선생과 사역장 학생들은 청두가 아니라 베트남을 향해 떠났다.

그들은 3일을 꼬박 열차와 버스를 타고 중국과 베트남 국경에 도착했다. 이제 국경을 넘는 문제만 남았다. 그러나 국경에는 베트남 전쟁 당시의 지뢰들이 그대로 묻혀 있었다. 잘못 들어섰다가 지뢰가 폭발하면 발이 잘려나가거나 시체도 찾을 수 없게 될 수도 있었다. 설령 지뢰밭을 넘는다 해도 맹수와 독사가 우글거리는 정글을 통과해야 했고, 그다음에는 마을을 지키는 국경 수비대까지 지나야 했다.

중국-베트남 국경의 지뢰밭

팀의 책임자인 기풍 선생이 지뢰밭에 제일 먼저 들어섰다. 군인 시절 금강산댐 건설만 해온 그는 지뢰밭을 통과해 본 경험은 없었고, 지뢰의 원리에 대해 조금 배웠을 뿐이었다. 전쟁 영화에서 본 행동을 흉내 내며 조심스럽게 한 걸음씩 앞으로 나갔다. 먼저 발을 내딛기 전에 뇌관을 이어주는 전기선이 없나 손으로 더듬어 확인하고, 한 발 한 발 내디뎠다. 그러면 뒤의 사람들은 기풍 선생이 밟고 지나간 자리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다시 밟고 앞으로 걸었다.

이 길은 베트남과 중국을 넘나드는 마약 밀매꾼들도 들어서기 싫어할 정도로 위험한 길이었다. 맨 앞에 가는 기풍 선생은 새로 발을 옮겨 디딜 때마다 온몸을 땀으로 목욕했다. 몇 백 미터밖에 되지 않는 거리를 두 시간도 더 지나서야 넘었다. 기적적으로 단 한 사람도 지뢰를 밟지 않고 무사히 지뢰밭을 넘어섰다.

그들은 다시 무서운 정글로 들어가 밤새도록 걸어 마침내 마을에 도착했다. 새벽이라 국경 수비대 초소 앞도 무사히 지나왔다. 그러나 베트남 땅에 들어왔지만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하노이로 갈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말도 통하지 않았다. 방향도 알 수 없고 밤새 초긴장 속에 걸어 모두가 녹초가 되었다. 조금 쉬었다 가려던 이들은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들었다.

베트남 수비대와 국경 사이에 갇힌 사람들

눈을 떴을 때는 베트남 수비대 군인들이 이들을 완전히 포위하고 총 끝으로 흔들어 깨울 때였다. 군인들이 뭐라고 물었지만 난생처음 듣는 베트남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군인들은 이들을 묶어 병영으로 끌고 가 조그마한 방에 가두었다. 이후 중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을 데려왔다. 기풍 선생과 학생들은 자기들이 중국인이 아니라 북한에서 온 탈북자들이라고 서툰 중국어로 설명했다. 한국 대사관으로 인도해 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베트남 관료들은 갑자기 들이닥친 이 불청객들을 왔던 대로 다시 돌려보내라고 지시했다. 이들은 수갑이 채워진 채 다시 중국과 베트남 국경으로 이송되었다. 군인들이 이들을 데려다 놓은 곳은 끔찍하게 무서웠던 지뢰밭 입구였다. 군인들은 총대로 찌르며 저쪽으로 다시 넘어가라고 내몰기 시작했다.

북한 형제들은 죽어도 중국으로는 가지 않겠다고 버텼다.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찬송을 부르며 통성기도를 시작했다. 베트남 군인들은 갑자기 이상한 노래를 부르고 고함을 지르는 이들을 멍하니 지켜보다가 결국 곤봉으로 때리며 강제로 해산시켰고, 이들은 다시 지뢰밭으로 떠밀려 들어갔다.

다시 한 발짝 한 발짝 조심조심 지뢰밭을 넘어 중국 쪽으로 돌아왔다. 이를 지켜보던 중국 국경 수비대는 넘어오는 이들을 차례로 붙잡았다. 그런데 중국 군인들도 이 문제에 휘말리기 싫었는지 이들을 다시 베트남 쪽으로 쫓아냈다. 베트남 군인들도 다시 막았다. 결국 이들은 두 나라 국경 사이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앉아 있었다. 보다 못해 화가 난 중국 군인들이 결국 “너희들 가고 싶은 데로 가라”며 중국 쪽으로 쫓아버렸다. 주님의 은혜였다. 합법적 절차로 호송되었다면 이들은 모두 북한으로 끌려갔을 것이다.

광둥성 변방에서 걸려 온 전화

베트남 군인들에게 돈과 물건을 모조리 빼앗겼고, 심지어 신발까지 빼앗겨 완전히 거지 행색이 된 이들은 중국 광둥성 변방의 작은 도시를 헤매며 며칠을 노숙했다. 며칠째 굶어 쓰러질 것 같자 기풍 선생이 할 수 없이 나에게 전화를 했다.

사라진 기풍 선생 팀 때문에 마음고생이 많았으나 모두 무사하다는 소식을 들으니 너무나 반갑고 기뻤다. 즉시 돈을 송금하니 3일 후 모두 무사히 청두시에 도착했다. 그동안의 사연을 듣자 나는 기가 막혔다. 충격으로 쇼크가 왔다. 머리와 목은 물론 등까지 마비되어 음식도 제대로 먹을 수 없고, 중풍 환자처럼 거동도 불편해졌다.

기풍 선생을 해임시켜야만 했다. 세워진 북한 선생을 해임시키는 일은 고통스럽고 어려운 일이었다. 팀장이라는 자부심은 탈북자들에게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컸다. 나는 주님의 도우심만 믿고 그를 해임했다. 사역장에 계속 남아 다시 공부하겠다는 형제들은 김권능 선생, 허익두 선생, 최바울 선생 사역장에 분산시켜 보냈다. 장만식 아바이는 김권능 선생 사역장으로, 김영윤 형제는 최바울 선생 사역장으로, 유칼빈, 김예진, 이현수 형제는 허익두 선생 사역장으로 보냈다. 나는 기풍 선생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사역자로서의 마음가짐을 되찾기를 바라며 그를 최바울 선생 사역장으로 보내 다시 학생으로 공부하게 했다.

다시 맡긴 사역장과 전해지지 않은 진심

몇 달 후 민선주 선생이 자기 학생들에게 리더의 권위를 잃고 해임되었다. 나는 기풍 선생을 다시 믿고 싶었다. 한 번 과오를 범한 사람을 다시 믿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는 늘 기풍 선생이 아까웠다. 어떻게 키운 선생인데, 얼마나 많은 눈물과 기도로 세워진 선생인데, 한 번의 과오로 모든 것을 잃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다시 기회를 얻어 아름답게 회복되기를 바랐다.

나는 기풍 선생에게 민선주 선생의 사역장을 맡겨 주었다. 그러나 나의 진심은 전달되지 않았다. 기풍 선생은 나를 완곡하게 오해하기 시작했다. 원래 팀장이 해임되고 새 팀장에게 익숙하지 않았던 민선주 선생의 학생들은 나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그것을 알고 기풍 선생은 화를 냈다. 자기들은 허울뿐이고 실제 모든 사역은 내가 진행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기풍 선생은 민선주 선생과 함께 한국으로 떠나면서 편지를 남겼다.

두 번째 베트남행과 하노이의 좌절

기풍 선생은 화가 나서 떠났고, 나의 마음은 찢어졌다. 사람에게 마음을 전하는 일이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이라는 것을 이때 경험했다. 너무 다른 문화, 너무 다른 생각으로 살아가던 나와 북한 선생들에게 이 큰 차이를 설명할 방법은 사실상 없었다. 그저 모든 것을 당하고 감내해야만 할 뿐이었다. 이것이 사역이었다. 억울한 일을 당해도 참아야 하고, 고통스러운 일을 당해도 선교사는 여전히 저들을 믿어주고 사랑하면서, 덤덤히 한 발자국씩 걸어가는 것이 사역이라는 것을 배웠다.

한국으로 가기 위해 베트남으로 떠난 기풍 선생과 민선주 선생은 지뢰밭을 무사히 넘었고, 전의 경험을 살려 베트남 국경 수비대에 잡히지 않고 국경도 넘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하노이로 가는 길을 알 수 없었다. 기풍 선생이 철길을 따라가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수도 하노이는 철길을 따라가다 보면 반드시 도착한다는 생각이었다.

두 사람은 한 달을 철길을 따라 걸었다. 그렇게 하노이를 찾아가는 데 성공했고, 천신만고 끝에 한국 대사관도 찾았다. 하지만 구세주처럼 생각하고 뛰어 들어간 한국 대사관에서는 30분도 안 되어 이들을 쫓아내버렸다. 유일한 희망이 물거품처럼 사라지자 이들은 갈 곳이 없어졌다.

광저우, 상하이, 그리고 다시 북송

두 선생은 할 수 없이 몇 천 리 길을 걸어 다시 중국으로 되돌아왔다. 지칠 대로 지친 기풍 선생은 하반신이 마비되어 길에서 몇 번씩 쓰러지기도 했다. 그 강인한 기풍 선생이 쓰러지는데, 신기하게도 민선주 선생은 쓰러지지 않았다. 주님께서 고쳐주신 병든 다리는 건강한 사람의 다리보다 더 튼튼했다.

중국에서 방황하던 두 선생은 광둥성 광저우시로 가기로 했다. 한국 사람들이 많이 있으니 차비라도 얻을 수 있지 않겠냐는 작은 희망 때문이었다. 광저우를 향해 걸어가던 두 사람은 배가 너무 고파 공안국에 들어갔다. 감옥에 들어가면 밥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북한 탈북자들이요!”

공안들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거지같아 보이는 사람들이 두꺼운 책 한 권씩을 들고 있는 것이 이상했는지 한 공안이 무슨 책이냐고 물었다. 민선주 선생이 웃으며 말했다.

“이건 성경책이요! 당신도 예수 믿으시오!”

공안은 “네 꼴 보니 예수 믿고 싶은 생각 하나도 없다. 썩 나가!”라고 하며 돈 몇 푼을 쥐어주고 밖으로 내쫓았다.

두 선생은 북한에서 도둑 열차를 타고 다니던 경험을 살려 화물 열차 꼭대기에 올라타고 광저우로 갔다. 그러나 도착한 지 3시간 만에 모두 공안에 체포되었다. 신원을 알 수 없는 두 선생은 일반 노숙자 무리에 섞여 중국 여기저기로 보내졌고, 서로 흩어졌다. 민선주 선생은 한동안 강제노동을 하고 풀려난 뒤 상하이시로 갔다. 추운 겨울날 상하이 거리에서 너무 춥고 배가 고파 지나가는 공안에게 두 팔을 모아 내밀며 애걸했다.

“나는 북한에서 도망쳐 온 사람임다! 제발 날 좀 잡아가 주십시오!”

상하이 간수소에 갇혀 있던 민선주 선생은 그곳에서 다시 기풍 선생을 만났다. 이렇게 넓은 중국 대륙에서 기약 없이 헤어졌지만, 다시 만난 것을 보니 이들이 갈 길은 결국 여벌이 없는 외길이었다. 한국으로 떠났던 두 선생은 결국 북한으로 끌려갔다. 두 선생은 신의주 보위부 집결소에서 일주일 동안 취조를 받고, 다시 안전부 집결소로 옮겨져 석방될 때까지 몇 달 동안 함께 있었다.

신의주 감옥에서의 회개와 회복

북한 신의주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기풍 선생은 자기가 잘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님이 원하는 삶에서 이탈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는 회개했다. 절절하게 회개기도를 드릴 때, 그의 마비되었던 한쪽 다리가 풀어졌다.

기풍 선생은 집결소에서 병들고 굶어 죽어가는 북한 사람들에게 자기 옷을 팔아 먹을 것을 사주기도 하고, 자기 식사를 나누어 주기도 하면서 주님의 사랑을 실천했다. 예수님에 대해 전혀 모르는 북한 사람들에게 기도해 주었고 예수님을 전하면서 살았다.

2000년 2월 16일, 기풍 선생은 김정일 생일 특사로 석방되어 다시 중국으로 넘어왔다. 그는 중국 랴오닝성 선양시에서 캐나다 출신 선교사님과 장로님을 만나 다시 북한선교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때부터는 정말 신실하게 주님의 일을 감당했다. 기풍 선생을 칭찬하는 말들이 선교사들의 세계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시안에서 다시 만난 기풍 선생

2000년 말 내가 산시성 시안시에서 사역할 때, 기풍 선생도 시안에서 5개월 정도 사역을 했다. 그때 막내딸 명현이와 함께 기풍 선생의 사역장을 방문했고, 사역비도 지원했다. 기풍 선생 팀 학생들과 우리 사역장 북한 형제들이 서로 만나 축구도 하며 친밀하게 지냈다.

그때 기풍 선생이 나에게 신년 축하장을 보내주었다. 그냥 노트 한 장을 찢어서 휘갈겨 보낸 신년 축하장이었지만 나에게는 소중한 보물이 되었다. 마음을 좀처럼 표현하지 않는 북한 사람들이었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의 가장 진실한 표창이기 때문이다.

한국 입국 이후의 길

그 후 기풍 선생은 시안을 떠나 안후이성으로 사역장을 옮기고 사역하다가 한국으로 입국했다. 한국에 들어온 후부터는 예수전도단에 소속되어 홍천 DTS에서 6개월 공부하고 캐나다로 갔다. 그곳에 있는 예수전도단 캠프 간사로 6개월을 섬기다가 다시 미국으로 갔다.

원문 기록에 따르면, 그는 미국 LA에 지내면서 영주권이 나오면 예수전도단 소속으로 남미와 아프리카로 선교사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내가 심은 씨앗이 다른 곳에서 아름답게 자라 열매가 되었다. 하지만 나는 기쁘다. 정처 없이 험한 삶을 살아가던 기풍 선생이 주님을 만나 선교사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만족하고 기쁘다. 주님께 감사드린다.

육성 그대로

남긴 글 · 편지

기풍 선생이 최광 선생에게 남긴 편지

최광 선생님에게 전합니다.이렇게 펜을 들어 욕 많이 하십시오 다름이 아니라 제가 이 사역에 지도자로 설수 없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모세형제와 다윗 형제를 만나고 온 이후부터 우리가 이 사역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선생님이 이 사역을 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1기 사역이 해체된 후 최광 선생님은 우리를 동역 하는 차원인 줄 알았는데 여전히 최광 선생님이 이 사역을 진행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모세, 다윗, 석한, 주복, 등 저희 학생들을 갈라놓은 일 잘 고 있을 것입니다. 선생님은 우리를 준비시키면서 늘 강조하셨지요? 북한 선교는 우리 북한의 영혼이 감당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긴 말하기 싫습니다. 제가 떠난 동기는 먼젓번에 떠난 동기와 다릅니다. 잘 알다시피 처음엔 북한 사역을 위해서 떠나게 되었지만 이번엔 나를 위해서 떠나는 것입니다. 가다가 다리가 잘라진다면 선생님을 만나지 못하겠지만 한국에 갔다면 최선생님을 만날 것입니다. N.S.M 사무실을 통하여 저의 위치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사역을 위하여 권면하고 싶습니다. 사역 방법을 바꾼다면 저와 같은 불신자들이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글씨를 잘 못써서 선주 선생님이 글을 적었습니다. 기도 많이 하겠습니다. -샬롬- 기풍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