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길수라는 이름과 “이선장”이라는 호칭
이선장 선생이 우리에게 소개한 본인의 이름은 리길수였다. 대부분의 북한 탈북 형제들이 그렇듯이 그 이름이 실제 본명인지는 확인하기 어려웠다. 우리는 그가 북한에서 선장 일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그때부터 그를 “이선장”이라고 불렀다. 사역장 안에서는 나이가 많은 분에게 “형제”라는 호칭을 붙이기 어려워하는 분위기도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이선장이라는 호칭이 자리 잡았다.
Seon-jang Lee
선교사 · B-16
북한에서 선장으로 일하다 탈북해 50대 중반의 나이로 사역장에 들어왔고, 학생으로 배우다 처음으로 학생들을 맡아 사역했다. 2001년 시안에서 가족과 함께 체포되어 북송된 뒤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갔다.
3기 · 사역 기록
선장 출신, 오십 중반의 나이에도 늘 겸손했던 제자
이선장 선생이 우리에게 소개한 본인의 이름은 리길수였다. 대부분의 북한 탈북 형제들이 그렇듯이 그 이름이 실제 본명인지는 확인하기 어려웠다. 우리는 그가 북한에서 선장 일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그때부터 그를 “이선장”이라고 불렀다. 사역장 안에서는 나이가 많은 분에게 “형제”라는 호칭을 붙이기 어려워하는 분위기도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이선장이라는 호칭이 자리 잡았다.
이선장 선생의 아버지는 김일성 주석궁을 설계한 사람으로 전해졌다. 중국에서 하얼빈공대를 졸업한 수재였고, 평양에서도 좋은 대접을 받으며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아들의 일로 지방으로 내려오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이선장 선생도 선장이라는 직책을 잃었다. 그는 북한에 있을 때부터 김일성 정치의 허약함과 북한 정권의 실체를 잘 알고 있었다. 중국으로 나온 뒤에는 북한 정부의 실체를 폭로하는 책도 썼으나, 그 책은 유실되어 빛을 보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2기생 김권위 선생이 파송되어 나갔다가 이선장 선생을 학생으로 모집해 데리고 왔다. 그는 2기생 김예진 선생의 사역장에 배치되었고, 내가 처음 그를 만난 곳은 허난성 정저우에 있던 김예진 선생 사역장이었다. 처음 만난 한국 사람 앞에서도 그는 기가 죽지 않고 활달했다. 북한에서 선장도 했고 운동도 잘하고 싸움도 잘한다고 말할 만큼 자신감이 있었다. 50대 중반의 나이에 가족을 잃은 비관적인 상황이었지만, 그의 태도에는 여전히 패기와 기백이 남아 있었다.
이선장 선생은 처음부터 자신이 젊은 형제들을 휘어잡아 리더로 지도해 보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가 사역장에 들어온 것은 리더로서가 아니라 학생으로서였다. 먼저 성경을 배우고, 신앙의 삶에 익숙해지고, 먼저 세워진 선생에게 순종하는 훈련을 받아야 했다. 나는 그에게 1년 동안은 김예진 선생 밑에서 순종하며 공부하라고 권면했다. 그는 처음에는 무안해했지만 마지못해 “잘 해 보겠습니다”라고 답했다.
그 후 전 사역장 형제들이 함께 모여 축구할 때 이선장 선생을 다시 만났다. 그때 김권위 선생은 이선장 선생이 정말 열심히 한다며, 특별히 앞장서서 궂은 일을 하고 다른 형제들이 잘못하면 꾸짖으며 사역장이 잘 돌아가도록 협조한다고 말했다. 김권위 선생은 그에게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훗날 김예진 선생의 사역장이 해산된 뒤 형제들은 여러 사역장으로 흩어졌다. 이때 이선장 선생은 적극적으로 김성근 선생의 사역장으로 가고 싶다고 했고, 그 뜻을 따라 김성근 선생 사역장으로 보내졌다. 그는 사역장에 온 첫날부터 성근 선생에게 그동안 궁금했던 것들을 묻기 시작했다. 질문들은 대부분 깊이가 있는 것들이었고, 믿고자 노력하는 사람만이 던질 수 있는 진지한 질문들이었다.
당시 북한 형제들에게는 성경과 신앙에 대한 질문이 많았다. 그러나 그 질문들은 사람을 곤혹스럽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믿고 받아들이려는 고뇌에서 나온 것일 때가 있었다. 이선장 선생의 질문도 그러했다. 성근 선생은 그의 질문에 성의껏 답했고, 그 곁에 연세 있는 분이 있었기 때문에 일반 학생들과는 달리 예우해 주었다. 결국 이선장 선생은 성근 선생 사역장 형제들 가운데 처음으로 학생들을 인수받아 사역을 시작하는 사람이 되었다. 성근 선생의 첫 열매였고, 그래서 성근 선생은 그를 향해 남다른 애정과 관심을 가졌다.
3기생 선생들이 훈련 과정을 마치고 북한 선교사로 임명될 준비가 되었을 때 우리는 화산으로 올라갔다. 당시 성근 선생이 총팀장이었기에 반드시 동행해야 했지만, 이선장 선생이 사역장을 비우면 자신이 다시 흔들리고 다른 사람이 자신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며 올라갈 수 없다고 했다. 이선장 선생의 책임감과 열정에 감동한 성근 선생은 1박 2일 동안 대신 사역장을 맡아 주고 그를 화산으로 올려 보냈다. 그래서 성근 선생은 정작 자신이 꼭 참석해야 할 임명식에 함께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이선장 선생이 얼마나 성실하게 학생들을 가르치고 진심으로 사랑하는지를 경험했기에 크게 마음 상하지 않았다.
화산에 올라간 이선장 선생은 사진 찍는 것을 절제했다. 다른 형제들은 좋은 경치를 보면 서로 사진을 찍고 싶어 했지만, 그는 거의 사진을 찍지 않았다. 예배를 드릴 때도 감격해 했지만, 일부러 자신의 모습을 남기려 하지 않았다. 성근 선생 팀이 다 함께 사진을 찍을 때 겨우 한 장 남은 정도였고, 그래서 오늘 남아 있는 그의 사진 자료는 많지 않다.
4기생 사역장 가운데서도 이선장 선생의 사역장은 매우 열심히 움직였다. 김의환 총장님이 사역장을 방문했을 때 우리는 총장님을 이선장 선생 사역장으로 모셨고, 총장님은 그곳 형제들에게 3기생 세례식을 베풀어 주셨다. 이선장 선생은 자신의 학생들과 함께 사역의 현장을 지키며 성실하게 섬겼다.
2001년 6월 11일, 시안 사역장 전원이 중국 공안에게 체포되던 날 이선장 선생도 자기 학생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들은 모두 북한으로 끌려갔다. 북한 보위부 사람들 앞에서 몇몇 선생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고 당당히 선포했고,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갔다. 그 일곱 명 가운데 한 사람이 이선장 선생이었다.
이선장 선생은 아버지와 동생도 우리 사역장으로 데리고 와 있었다. 그래서 시안에서 체포될 때 그의 가족도 함께 북한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상황은 비관적이었지만 이선장 선생은 늘 그랬듯 당당했다. 그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났고, 그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