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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Seon-ju Min

故 민선주

선교사 · B-7

민선주

절뚝이던 다리를 고침받은 뒤 설교자로 세워져, 고향 평성을 오가며 쌀을 나누고 은밀히 복음을 전했다. 중국으로 나오던 길에 체포되고도 신분을 밝히지 않은 채 북송되었고, 다시는 소식을 보내오지 않았다.

지역
중국
순교 사유
북한 선교 사역 중 체포·북송 후 소식 두절
기록 요약
1기 · 여덟 번째 탈북 · 북송 후 소식 두절
소속 / 사역기수
중국 1차 사역 (1기) / 열방빛교회 초기 멤버
주요 사역 지역
옌볜 조선족 자치주 옌지시 이란진, 허난성 정저우시, 옌볜 조선족 자치주 안투현, 북한 평성시
주요 역할
탈북민 성경통독 훈련생, 북한 출신 선교사, 북한 내지 선교 사역자
최종 기록
북한 내지 선교 중 체포 및 북송 이후 소식 두절 / 순교 추정

1기 · 사역 기록

순교의 발자취

기도로 회복된 두 다리로 복음 전하기 위해 다시 북한으로

이란진에서 데려온 절뚝거리던 청년

1기 사역 초기였던 1998년 8월 22일, 나는 주광호 선생과 함께 옌볜 조선족 자치주 옌지시의 시골 마을인 이란진에 가서 민선주 선생을 사역장에 데리고 왔다. 그곳 조선족 전도사님이 민선주 선생을 소개해 주었다.

민선주 선생은 처음 사역장에 왔을 때 다리를 심하게 절었고, 깡마른 몸매에 키가 작은 청년이었다. 나는 그에게 길선주 목사님의 함자를 따서 민선주라고 이름을 고쳐주었다. 그는 다리가 불편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팔 힘은 특별히 좋았다.

통독반에서 생활하다 오랜만에 나온 공원에서 멋을 부린 민선주 선생

일곱 번의 북송과 여덟 번째 탈북

민선주 선생은 절뚝거리는 다리 때문에 많은 고생을 했다. 북한을 탈출하려고 결심하고 일곱 번이나 두만강을 넘어왔지만, 다리 때문에 미처 도망가지 못해 매번 공안에 잡혀 북송되었다. 북한 보위부에서도 그를 장애인으로 취급하고 매번 풀어주었다. 선주 선생은 여덟 번째 만에야 절뚝거리는 다리로 탈북에 성공했다.

그러나 신체가 건강한 탈북자들도 살아가기 힘든 중국에서 장애를 가진 선주 선생이 거처할 만한 곳은 없었다. 그는 추운 겨울에도 역이나 길거리에서 땅에 떨어진 음식 찌꺼기를 주워 먹다가 사역장으로 왔다.

어머니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

민선주 선생은 나에게 어머니 이야기를 자주 했다. 그의 어머니는 산파였다. 북한에 있을 때 어머니가 자주 산모의 태를 가져오면 그 태를 삶아 먹으면서 굶주림을 달랬다고 했다.

어머니는 민선주 선생을 버리고 탈북하여 중국으로 갔다. 북한 여인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시골 마을의 가난한 한족 사람에게 팔려가서 살고 있다고 했다. 민선주 선생은 울면서 자기를 버리고 간 어머니를 원망했다. 그러면서도 어머니가 보고 싶다고 했다. 그의 말을 듣다가 눈물이 나왔다. 울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 눈물이 나왔다.

새벽 통독실에서 하나님을 만나다

민선주 선생은 처음 사역장에 와서도 장애인이라고 동료들이 무시한다고 섭섭해했고 힘들어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하나님께서 자기의 다리를 고쳐주신다는 믿음을 품기 시작했다.

그는 형제들이 잠든 새벽에 홀로 통독실에서 울면서 기도했다. 그렇게 기도하다 그는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과 교제하기 시작했다. 선주 선생은 은혜가 충만했고 빠른 속도로 변화되어 갔다. 성경을 이해하는 속도도 남달랐다. 성경 공부에 뒤처져 있는 기풍 선생이나 박요한 선생을 칼빈 선생 혼자 감당하기 힘들어하면, 선주 선생이 대신해서 가르쳤다.

아이스크림 하나에 담긴 사랑의 갈망

하나님을 만난 후부터 민선주 선생은 변해가기 시작했다. 정저우대학교 캠퍼스에서 축구를 할 때였다. 선주 선생은 운동장 옆에 앉아서 구경만 했다. 구경하기가 지루한지 아이스크림 하나 사달라고 졸랐다. 시합이 끝나면 다른 형제들과 함께 먹자고 기다리라 권했지만 그는 자꾸 졸라댔다.

“먼저 하나 사주면 안 되나요? 예? 하나만요 선생님, 나만 하나 사주세요.”

사역장의 형평성만 생각하고 있던 나는 민선주 선생을 꾸중했다. 훗날 어머니 이야기를 할 때에야 선주 선생이 왜 그랬는지 깨닫고 많이 후회했다. 어려서부터 어머니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그는 나에게서 사랑을 느끼고 싶었던 것이다. 그가 원한 것은 아이스크림이 아니라 사랑이었다.

하나님을 만나고 난 후부터 그의 행동은 달라졌다. 자기가 먹기 위해 감추어 놓았던 과자도 다른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자기의 장애만 크게 보던 그가 다른 사람을 돌보기 시작했다.

금식과 설교로 깊어진 변화

민선주 선생은 금식을 자주 했다. 처음 사역장에 와서는 자기를 버리고 간 어머니를 늘 원망했지만, 금식하면서부터는 어머니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고 자기를 버린 가족들을 위해서도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의 설교 실력은 날이 갈수록 높아져 갔다. 그는 정말 북한 사람답지 않게 설교를 잘했다. 박베드로 목사님이 그의 설교를 듣고 감탄했을 정도였다. 그의 설교에는 설득력이 있었다. 민선주 선생과 대화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빨려 들어가서 설득당하는 것을 자주 경험했다. 설교로 인해 그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지난행 열차와 3일 금식 회개

지린시에서 산둥성 지난시로 이사 가는 날이었다. 기차에 올라 화장실로 가다가 화장실 안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무디 형제를 만났다. 이사하면서 여러 문제로 고달팠던 나는 나도 모르게 벌컥 화를 내었다.

“뭐 하는 거예요? 엉? 너 무디! 너 북한으로 다시 돌아가! 너는 부모님 말도 이렇게 안 들어? 왜 이렇게 말 안 들어?”

무디 형제는 깜짝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말없이 열차 칸으로 들어갔다. 내가 사과하자 그는 익숙하지 않은 경어를 사용하며 어색하게 사과를 받았다. 제남까지 가는 3일 내내 거듭 사과했지만 그는 처음처럼 어색했다.

당황했던 것은 나를 향한 북한 형제들의 태도가 몹시 냉랭해진 일이었다. 내가 아무리 북한 형제들을 사랑하고 몇 개월을 동고동락했다 하더라도, 그들에게 나는 그저 친절한 남조선 사람이었고 무디 형제는 자기들과 같은 북한 사람이었다. “우리가 다 같이 잡혀도 선생님은 고작 추방당하겠지만 우리는 잡혀가서 죽어야 합니다.” 이것이 나와 그들의 차이였고 내가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지난시로 이사를 간 후 나는 이 문제를 가지고 3일간 금식하면서 주님 앞에 철저히 회개했다. 민선주 선생이 괴로워하는 나를 이해해 주었고 나와 함께 3일 금식도 해주었다. 금식 이후 사역장의 분위기는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때 아무 말 없이 함께 금식하던 민선주 선생이 정말 고마웠다. 그 고마움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정저우 놀이공원과 환호하던 선주 선생

정저우에서 공부할 때 우리는 놀이공원에 갔다. 한국의 롯데월드나 에버랜드에 비하면 정말 초라한 놀이공원이었지만, 북한 형제들은 이곳을 미국의 디즈니랜드를 만난 것보다 더 기뻐하고 즐거워했다.

민선주 선생은 놀이기구를 탈 때 괴성에 가까운 환호를 질렀다. 누가 보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고함을 지르면서 놀았다. 그 모습은 사역장 안에서의 아픔과 달리 어린아이처럼 자유로웠다.

박요한 선생과 함께 놀이공원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민선준 선생

“이 다리 좀 고쳐주십시오”

칼빈 선생의 폐병이 하나님의 은혜로 치유되는 것을 본 민선주 선생은 자기 다리도 기도하면 고쳐주신다는 확신을 가지기 시작했다. 파송되면 많은 곳으로 다녀야 했지만, 자신이 가진 장애 때문에 걱정이 많았다. 그는 나와 사역장 동료들에게 자기 다리를 위해서도 기도해 달라고 공식적으로 부탁했다.

선주 선생은 매일 새벽 4시 반부터 일어나 기도했다.

“하나님, 하나님이 북한 복음화를 위해 필요하니까 저를 부르셨는데, 제가 다리가 이래 가지고 무슨 일을 하겠슴까? 주님, 이 다리 좀 고쳐주십시오. 하나님, 저 이 다리 가지고 아무것두 못함다. 다리 안 낫고서는 성경을 배워도 쓸데가 없습니다. 이 다리 하나님이 고쳐 주세요!”

나는 그가 얼마나 많은 밤을 홀로 깨어 울면서 기도해 왔는지 알고 있다. 나를 비롯해서 사역장의 다른 선생들도 알고 있었다.

정저우대학교 운동장의 기적

파송을 위해 시작했던 사역장 전체 금식이 끝나고 보식도 마치기 전에 민선주 선생은 다시 장기 금식에 들어갔다. 선주 선생이 금식을 시작한 지 20여 일이 지난 토요일이었다. 우리는 정저우대학교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금식해 기운이 없고 성치 못한 다리 때문에 선주 선생은 그날도 벤치에 앉아 구경만 했다.

그런데 갑자기 민선주 선생이 운동장 한가운데로 어정어정 기는 것처럼 힘없이 내려왔다. 그때 기다렸다는 듯이 축구공이 그의 앞으로 굴러갔다. 그런데 세상에, 민선주 선생이 그 공을 몰고 상대방 골문 앞까지 가더니 바로 골인시켜 버리는 것이 아닌가.

나와 선생들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정말 선주 선생이 정상인처럼 걷고 뛸 수 있다는 것이 보면서도 믿어지지 않았다. 나는 그를 얼싸안고 실성한 사람처럼 웃었다. 선생들도 펄쩍펄쩍 뛰며 박수를 치고 “할렐루야!”라고 외쳤다. 선주 선생도 엉엉 울면서 자기 다리를 만졌다. 그는 10년 동안 절름발이로 살았고, 그 다리 때문에 온갖 설움과 슬픔을 당했던 사람이었다.

폐병말기에서 은혜로 완치된 모자 쓴 칼빈 선생과 앉은뱅이되기 직전에서 건강을 되찾은 뒷줄에 모자쓴 민선주 선생

안투현 시골 교회 사역과 설교

민선주 선생은 파송된 후 옌볜 조선족 자치주 안투현에 있는 작은 시골 교회에 은거하면서 학생 모집을 시작했다. 북한 형제 2명과 자매 1명, 탈북자 부부 한 가정을 모집했고, 그들을 데리고 안투현 시골 교회에 머물며 곧바로 사역을 시작했다.

그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면서 예배 때면 그 교회 성도들에게도 설교했다. 사역장에서도 설교를 잘하던 선생이라 시골 교회 성도들의 마음을 쉽게 사로잡았다. 소문이 나자 주변 한족 교회에서도 선주 선생을 데려가 예배를 드렸다. 심지어 술 먹을 일이 있으면 자기 교회 전도사님이 아니라 선주 선생에게 허락을 받아 가곤 했다. 조선족과 한족들은 그가 신분증도 없는 북한 탈북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말씀을 배우고 싶어 극진히 대접하고 섬겼다.

민선주 선생의 설교에 은사가 있었다. 한국에서도 종종 설교를 통해 은혜를 끼쳤다.

이 처장님과의 만남

나는 옌볜과학기술대학교 이 처장님을 만났다. 이 처장님은 우리가 지난시에서 사역할 때 주광호 선생과 함께 우리를 만나러 옌지시에서 지난시까지 내려오셨던 분이다. 우리가 사역비가 없어 고생한다는 말을 듣고 많은 돈을 가지고 왔지만, 내가 “돈은 하나님이 준다”고 다소 뻣뻣하게 나오자 화가 났는지 한 푼도 헌금하지 않고 돌아가셨던 분이었다.

북한 선생들을 파송시키고 옌지시에서 활동하면서 나는 이 처장님과 다시 만나게 되었다. 몇 달 전에 와서 보고 간 북한 선생들이 이제는 성경을 잘 알 뿐 아니라 설교도 잘하고 북한 선교사로 활동한다고 말씀드렸다. 이 처장님은 믿을 수 없다고 했다. 한번 만나 봐야 인정할 수 있다고 했다.

이 처장님은 민선주 선생을 만났다. 민선주 선생이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하는 것도 보았다. 그는 설교를 통해 너무나 분명하고 은혜롭게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말하고 있었다. 그의 설교를 들은 이 처장님은 감탄했다. 은혜라기보다 신기하다고 했다. 그때부터 이 처장님은 민선주 선생을 극진히 아끼고 사랑했다. 훗날 선주 선생이 체포되었을 때 그를 감옥에서 구출해 내기 위해 많은 돈과 도움을 주셨다.

북송 이후 다시 선 사역자

민선주 선생은 기풍 선생과 함께 한국으로 가기 위해 우리 사역장을 떠나갔다가 북한으로 북송되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사역자로 다시 서게 되었다.

한국에 와서 내가 열방빛교회를 개척했다는 말을 듣고 그는 찾아왔다. 그때부터 열방빛교회 초기 멤버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열방빛교회에서 설교할 때 많은 분들이 은혜를 받았다. 특히 김성근 선생은 그의 설교에 너무 많은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칼빈신학대학교와 다시 북한으로 향한 마음

민선주 선생은 한국에 와서 칼빈신학대학교에 입학하여 신학 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중국에서 누렸던 하나님의 은혜보다 더 큰 은혜가 있을 줄 기대하고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순수하게 성경만 읽고 성경적인 시각에서 신앙이 형성된 선주 선생에게는 인본주의적 색채가 짙은 자유주의적 신학 사상이 고통스럽기만 했다.

갈등하던 선주 선생은 신학교를 팽개치고 중국으로 가서 다시 북한으로 들어갔다. 막무가내였다. 그의 심장에는 북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끓고 있었다.

평성에서의 은밀한 복음 전도

선주 선생은 고향으로 찾아갔다. 그의 고향은 평양의 위성 도시인 평성시였다. 그는 집집마다 은밀하게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아주머니, 여기 쌀이 있어요. 이 쌀로 밥을 해서 드시고 힘을 내세요.”

북한 사람들은 낯선 사람이 와서 공짜로 쌀을 주자 꿈을 꾸는 것처럼 믿지 못하고 바라보기만 했다.

“아주머니, 하나님께서 살아 계세요. 힘내세요. 하나님을 찾으세요. 그러면 살 길이 생깁니다.”

선주 선생은 올 때처럼 다시 조용히 사라졌다. 이렇게 돌아다니다 돈이 떨어지면 다시 중국으로 넘어와 한국으로 왔다. 그는 서울대학교 연구소에 계시는 김병로 박사님으로부터 사역비를 지원받으면서 이 사역을 지속했다.

체포와 침묵, 소리 없는 헌신

그 사역은 너무 무모했고 위험했다. 한두 번은 성공할 수 있지만 지속적으로 진행할 수 있는 사역이 아니었다. 나는 화를 내면서 말렸다.

“지금 선주 선생이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일꾼으로 준비하는 거예요. 학교로 돌아가서 공부를 하세요.”

민선주 선생은 나의 말을 듣지 않았다. 이미 신학에는 마음을 돌렸다. 다행히 그는 몇 년간 잡히지 않고 무사히 사역을 진행했다. 그러나 끝내 일은 터지고 말았다. 북한에서 은밀히 중국으로 나오다가 중국 공안들에게 체포되었다. 북한 땅을 벗어났다고 안전하다고 방심했던 것이다.

선주 선생의 여권은 중국 지인의 집에 맡겨두고 있었다. 북한 땅에 가지고 갈 만한 물건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체포된 선주 선생은 중국 공안들에게 여권이 있는 곳을 말하고 여권을 가져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침묵했다. 여권만 제시하면 남한으로 추방되어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지만, 묵묵히 입을 다물고 탈북자의 신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선주 선생은 북한으로 호송되어 갔다. 그 후 그는 더 이상 소식을 보내오지 않았다. 북한에 가서도 일반 생계형 탈북자로 밝히면 다시 풀려나올 수 있었지만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곳에서도 묵묵히 몸으로 주님의 복음을 보여주는 길을 택한 것이다. 민선주 선생은 북한을 위해 자기 생명을 소리도 빛도 없이 던졌다.

북한 가정집을 재현한 곳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민선주 선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