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이름으로 활동한 신용재 선생
신용재 선생은 두 개의 이름으로 활동했다. 어떤 이들에게는 자신을 신용재로 소개했고, 또 어떤 이들에게는 신수재로 소개했다. 용재 선생의 본명이 무엇인지는 분명히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1기생 최바울 선생 사역장에서 훈련받고 파송되었던 이용섭 선생이 학생으로 데리고 온 사람이었다.
Yong-jae Shin
선교사 · B-15

함흥화학공업대학을 나와 성경의 깊이를 파고들며 스스로 말씀을 정리해 나간 사람. 사역을 시작한 지 한 달 만에 시안에서 체포되어 보위부 앞에서 믿음을 고백했고, 15년 형을 받고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갔다.
3기 · 사역 기록
수첩에 적어 온 질문들이 신앙고백으로 돌아 온 청년
신용재 선생은 두 개의 이름으로 활동했다. 어떤 이들에게는 자신을 신용재로 소개했고, 또 어떤 이들에게는 신수재로 소개했다. 용재 선생의 본명이 무엇인지는 분명히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1기생 최바울 선생 사역장에서 훈련받고 파송되었던 이용섭 선생이 학생으로 데리고 온 사람이었다.
신용재 선생은 북한의 명문 대학 중 하나인 함흥화학공업대학을 졸업한 사람이었다. 이 대학은 북한에서 군대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갈 수 있는 특수한 교육 경로였고, 그런 기회는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북한에서 출신 성분이 좋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머리가 매우 비상했기 때문에 기술 분야의 대학까지는 갈 수 있었다고 했다.
이용섭 선생의 사역장에서 공부하던 신용재 선생은 원래 공부만 하던 체질이었다. 성경을 성실하게 배웠고, 성경 말씀의 깊은 의미를 진심으로 알고 싶어 했다. 이후 이용섭 선생이 옌지 지역에 상주하며 학생 모집을 전담하기로 하면서 그 사역장이 해산되었고, 신용재 선생은 김성근 선생 사역장으로 옮겨 오게 되었다.
김성근 선생은 사역장에서 설교 답안을 정해 학생들에게 매일 저녁 돌아가며 설교를 시켰다. 설교가 끝나면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질문하게 했는데, 신용재 선생은 늘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질문했다. 설교 당번 형제들은 그의 질문에 대답하기를 가장 어려워했다. 형제들이 ‘두고 봅시다. 신용재 선생이 설교할 때……’라고 했지만, 정작 신용재 선생은 예상 질문을 철저히 준비해 빈틈없이 설교했다. 그는 항상 질문을 수첩에 적어 김성근 선생에게 가져왔고, 이해가 될 때까지 묻고 또 물었다.
우리 사역장에서는 조직신학을 따로 가르치지 않았다. 그러나 성경을 읽던 신용재 선생은 성경의 핵심 의미들을 조직화해야 할 필요를 느끼고 스스로 체계적으로 정리해 나갔다. 김성근 선생 사역장의 조선족 김문권 선생은 신용재 선생을 두고 ‘정말 귀하다’고 평가하며, 앞으로 특별한 하나님의 일꾼이 될 사람이라고 말했다.
신용재 선생은 외모와 성품, 공부하는 모습까지 학자다운 사람이었다. 성실하게 자기 일을 감당했고, 다른 탈북자들에게서 흔히 보이던 우울하고 경직된 표정이 거의 없었다. 늘 웃고 있었고 행동에는 여유가 있었다. 김성근 선생은 그를 특별히 아껴 여러 번 자랑했으며, 보물처럼 아끼던 가족 점퍼에 기름을 발라 광을 내서 선물할 정도였다.
3기생 선생들이 화산으로 올라가 북한 선교사로 임명받던 날, 신용재 선생도 북한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김성근 선생 밑에서 훈련을 받은 후 선생으로 세워졌고, 이후 이용섭 선생이 모집해 내려보낸 학생들을 맡아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4기부터는 선생들을 따로 파송하지 않고, 이용섭 선생이 단독으로 옌볜 지역에서 학생 모집을 담당했다. 그렇게 모집되어 내려온 학생들을 3기생 선생들이 인계받아 사역을 시작했다. 신용재 선생도 열의를 가지고 사역을 시작했지만, 사역을 시작한 지 한 달 만에 서안에서 전체 사역장이 체포되는 사건을 맞았다.
서안에서 사역장 전원이 체포되었을 때 신용재 선생도 자신의 학생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는 북한 온성군 보위부로 끌려갔다. 북한 보위부는 북한 사람들에게 공포의 상징과 같은 곳이었다. 대부분의 형제들이 보위부 권세 앞에서 머리를 땅에 떨구고 숨도 크게 쉬지 못했지만, 신용재 선생은 그 자리에서 당당하게 일어섰다.
신용재 선생은 보위부 간부를 바라보며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당당하게 고백했다. 성경을 통해 만난 하나님은 그에게 죽음을 초월하게 하는 힘이었다. 평소 조용하고 화도 잘 내지 않던 사람이 그날 보위부 사람들 앞에서 담대하게 일어서는 모습을 모든 학생들이 보았다. 기록자는 ‘우리는 죽는 날까지 신용재 선생의 그 당당하던 모습을 잊지 못할 것이다’라고 회고했다.
2001년 여름, 신용재 선생은 다른 북한 선생들과 함께 온성군 보위부에서 15년 판결을 받고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갔다. 이후의 구체적인 소식은 전해지지 않았지만, 그의 담대한 신앙 고백은 함께 있던 형제들에게 깊은 증언으로 남았다.